[Opinion] 영화 "두 교황", 한 치 앞을 모르는 생 앞에서

글 입력 2020.04.0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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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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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단이 맞닿아 있다는 얘기가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닌 게 애초에 비교할 수 있다는 건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는 뜻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은 상반될지 몰라도 두 교황에게는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신에게 자신의 평생을 바친 사람이라는 점.


종교에 있어선 조심스럽다. 전 세계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싸울 수 있는 주제가 있다면 정치와 종교일 테니까.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먼저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의견을 묻는다면 피하진 않겠지만 여기저기 가치관을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둘 다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정치가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이해관계와 관점의 차이라면, 종교는 신을 믿을 것인지, 믿는다면 어떤 존재를 어떻게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주변에 있는 여러 종교 신자 중에는 실망스러운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일부 신자 때문에 나머지 신자나 그 종교 전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에겐 한 사람을 통해 어느 종교의 이미지가 제법 바뀔 수도 있다. 믿음과 실천이 괴리되는 걸 보면 어떤 게 '제대로 된 믿음', '진실한 믿음'인지 잘 모르겠다. 단순히 교회나 성당이나, 절을 가는 등의 꾸준한 종교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종교를 충실히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믿음과 소망, 사랑을 외치는 교회 신자가, 탐욕을 내려놓아야 할 불교 신자가 타인을 괴롭히고 과욕을 부리는 모습도 봤다. 영화 속에서 베네딕트 16세 역시 최측근 비서와 몇몇 신부의 부도덕한 성 추문으로 머리를 싸매야 했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어떤 종교에서든 처음부터 사람을 핍박하고 고통받게 하라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 간 분쟁으로 괴로워하는 전 세계 곳곳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절대적인 믿음이 소중한 가치를 훼손하더라도 합리화될 수 있을까? 이상과 멀어져 간다면 현실의 종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게 종교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복잡해서 마음 한구석에 미뤄두고 있는 아리송한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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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은 "두 교황"이지만 균일하게 두 교황을 다루진 않는다. 영화가 프란치스코 교황이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의 고충을 드러내고 교황을 넘겨주기 위한 안내자 같은 역할이다. 영화에서는 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이 교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 베네딕토 16세의 제안을 거절하며 들려주는 과거 이야기가 펼쳐진다. 교황 혹은 교황이 될 자격이 충분한 두 분이 서로 교황이 될 수 없다 말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의도한 바일 수도 있지만 두 교황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에서 드러난 모습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혼자가 편하고, 피아노 치기를 좋아하고, 각종 이슈에 보수적이며 원칙을 고수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고, 탱고와 왈츠를 즐기며, 진보적인 편. 가만히 보면 프란치스코 교황을 은근히 아끼는 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딱히 두 교황 중 누가 더 좋고 나쁘다를 논하는 영화는 아니다. 처음엔 두 교황의 고구마처럼 목메는 대화 때문에 나까지 입이 말랐지만 결과가 중요한 것 아닌가! 양극단에 있던 두 교황은 어느새 서로에게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된다. 아마 놀라지 않았을까. 서로가 생각보다 잘 맞는 사람이라는 게. 깊이 파묻혀있던 이야기를 꺼내 고해성사를 하고, 피자를 먹고 춤을 추고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본다. 역시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른다.


무엇보다 둘의 대화가 즐겁다. 모두 달변가이며 자기주장이 확실하다. 사직서를 수리해달라고 집요하게 종이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나, 알고서도 계속 온갖 이유를 들어 모르쇠 하는 사람이나 양보가 없다. 그러나 두 교황은 서로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서로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서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도 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대체로는 성경)도 풍부하게 쓴다. 누군가와 모든 입장이 달라도 저 정도로 막힘없이 듣고, 받아들이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마음의 배가 부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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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축구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리가 없다!

 


영화가 좋았던 것과는 별개로 호기심이 병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일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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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베네딕토 16세



1. 교황에 욕심이 있었다?


- 영화: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손사래를 치며 다른 추기경을 선출해달라는 말과 대립적으로, 콘클라베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여러 추기경들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교황에 욕심내는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과 함께 식사를 하던 추기경 역시 베네딕토 16세(당시 라칭거 추기경)는 자리를 원한다면서 교황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라칭거 추기경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어지간히 싫어하는 것처럼 표현된다.


- 현실: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 78세였기 때문에 은퇴를 준비 중이었고,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기요틴의 도끼날이 목에 떨어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미 노령의 나이라서 교황을 해야겠다는 꼭 야망이 넘쳤다고 보긴 어렵겠다. 실제로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싫어했는지까지는 잘. 진실은 두 분이 아실 것 같다.



2. 교회의 성 추문 해결에 미진했다?


- 영화: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 고해성사한 내용에서는 자세히 표현되지 않았지만 아동 성추행 있는 전적이 있는 신부를 고해성사만 하고 처벌 없이 다른 교구로 옮기게 해 계속 성추행이 일어나도록 방조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이라면 엄격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고 고해성사를 마쳤다.


- 현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아 1980년-90년대 아동 성추행을 발견하고 기소하는데 노력해온 것을 고려할 때 문제의 방관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영화에서 강경하게 입장을 표명한 것에 비해 현실에서는 고위 사제들의 성범죄를 덮어주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이를 교황이 덮어줬다고 표현해야 할지, 혹은 교황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아랫선에서 덮으려고 하는 건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3.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영화: 초반에는 왜 좋아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과 월드컵 결승전을 함께 관람하더니 오, 이거 재밌다는 느낌을 드러낸다. 축구가 좋은 건지 프란치스코 교황을 놀리는 게 좋은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막판엔 두 분 모두 객관성을 잃고 '에이, 축구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를 시전한다.


현실: 베네딕토 16세는 고향 바이에른 뮌헨의 열성팬. 축구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건 두 교황의 차이점을 부각하려는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마침 두 교황의 나라인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결승에 진출해서 이슈가 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두 교황 모두 일찍 숙면에 드셨다는 보고가 있다. 왠지 대외용 보고였으면 좋겠는 게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가 결승에 진출한다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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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1. 연인 아말리아와 사제의 길


- 영화: 타이밍 한 번 장난 아니다. 20대 청년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프로포즈를 준비하러 가는 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사제의 길로 들어선 걸로 표현된다. 무심결에 들어간 성당에서 신부님은 오늘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고, 베르골리오는 신호를 기다려왔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이게 신호인가 봐요. 이 말을 끝으로 사랑하는 여자 아말리아와 이별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안개 낀 어느 높은 산 바위에 앉아있던 모습은 괴롭기 그지없다.


- 현실: 아말리아에게 12살에 결혼하고 싶고, 결혼하지 않으면 사제가 되겠다는 편지를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에게 거절당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마음속에 여전히 아말리아가 남아있었는지,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프로포즈하는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말리아는 그때 마음을 받아주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을 볼 수 없었을 거라며 다행스러워했다.



2. 독재자의 친구 혹은 어쩔 수 없는 선택?

 

- 영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군부에 협조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책을 없앴다. 곧 군부가 잡아들일 위험이 있는 신부와 지인들에게 소식을 알렸지만 그들에겐 왜 자신들처럼 나서서 참여하지 않냐는 비판을 받았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요리오와 할리스 신부를 자격 정지했다가 그들이 납치당해서 괴로워했다. 군부에선 신부들을 납치하여 고문했고 지인은 바다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요리오 신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원망했으며 할리스 신부와는 화해를 했다고 표현된다.


- 현실: 군사독재 하에서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이었기 때문에 가장 권위가 높았던 게 사실.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게 협조한 것도 맞고, 그러면서 군부에서 탄압받는 사람들을 돕기도 했기 때문. 붙잡힌 사제들을 호소하여 풀려나도록 하기도 하고, 심지어 여권(!)을 빌려줘 정치범을 탈출시키는 등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논란의 관건은 '협조'의 범위다. 사람을 구한 것과 별개로 군부에 사람을 넘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영화에서는 자신이 보호하려다가 실패하고 신부들을 파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납치되었던 신부 중 요리오 신부가 추후에 암살단에 자신들을 넘겼다고 고소를 진행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고, 영화와 달리 할리스 신부는 화해한 게 아니라 침묵을 지키고 있다. 교황 즉위 시점까지 이와 관련된 재판에 연루되었고 재판에 출석하지 않거나 법정에서 모호한 답변을 남겨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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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두 교황"에서 본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한 데 모인 추기경들. 지극히 아날로그한 비밀회의 콘클라베. 문을 걸어 잠그고 한 명씩 투표를 해서 투표용지를 실에 꿰고(!) 태워서 하얀 연기과 검은 연기로 결과를 표현했다. 입어보기는커녕 눈으로 제대로 본 적 없는 옷을 입고, 할 줄 모르는 언어를 구사하는 교황과 추기경 역시 이질적이었다. 가장 이질적이었던 건 그들이 선택한 삶이었을 것이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속적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믿는 신과 종교에 귀의하는 삶. 뭔가를 더 가지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 애쓰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가벼울지도, 동시에 아무것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무거울지도 모르는 삶.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좀 웃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종교도 없는 사람이 종교를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해진다니. 믿음이 가장 중요한 종교에서 믿지 못하는 건 치명적이다. 납득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는 것도 일정 부분 작용한다. 하지만 수많은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다른 보이지 않는 것들은 왠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나와 모순된다. 종교 신자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이 부담스럽고 피로해서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나를 나 자체로 보지 않고 한 종교 신자를 볼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신자로 보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종교가 지우는 책임과 의무가 귀찮은 건 아닌가? 정해진 시간에 모여 활동하면 사라지는 주말이 아깝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 모든 이유들도 한 가닥씩 영향력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회의감이 들 때의 두려움이다. 무작정 발을 들여놨다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면 허망하진 않을까.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어야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 모순이 줄어들지 않겠나. 다른 사람에게도 그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고.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믿어도 되는 걸까? 모두에게 열려있으니 편하게? 믿고 있다고 해도 흔들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긴 하다. 종교의 의미, 믿음의 의미는 곱씹을수록 어렵다.


"두 교황"에서는 그에 대한 포근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믿음의 끈을 이어왔다고 해도 그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했던 미사에서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텔레비전에 비유했다. 텔레비전이 그냥 이유 없이 안테나가 신호가 잘 잡히지 않을 때가 있고 기도할 때도 하다못해 신부도 마찬가지라,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 날은 '그래, 그래도 시도는 했잖아' 할 뿐이라고. 아마 가끔은 곤란한 상황일 때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상황이 술술 풀릴 때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대부분은 힘겹게 한숨을 내쉬면서 헤쳐나갈 때가 더 많다. 신부님이라고 쉽지 않다는 말이 뭉클했다. 실수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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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베르골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

 

 

영화에서 안개와 연기가 상징처럼 느껴진다. 안개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위기와 혼란에 빠져서 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연인 아말리아와 헤어지고 올라간 바위에 안개가 자욱했고, 그가 군부독재가 끝난 후 귀양 가듯 자리 잡은 곳에서 혼자 갈대밭을 헤치고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힘든 시기였겠지만 그 안갯속에서 그는 사제가 되기로 했고, 여태까지와는 다른 마음으로 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미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의 프란치스코가 있게 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구름은 끼어있지만 맑은 하늘이 보인다. 안개가 지나갔다.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좌절하던 그가, 정처 없이 걷기만 했던 그가 달라졌다. 얼굴이 삶을 말해준다는 말을 실감한다. 젊은 날의 그는 날카롭고 불안했으나 지금의 그는 주름마저도 성격인 양 물 흐르는 것처럼 온화하고 부드럽다.


연기는 일종의 '신이 보내는 신호'에 가깝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평생을 함께 하던 하느님의 목소리가 난생처음 음소거 상태가 되곤 불안감에 휩싸였다. 매일 들리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자신의 기도를 거절이라도 하듯 꺼진 촛불의 연기가 이상하게 아래로 내려가는 걸로 보게 되었는데 이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가 자리를 내려와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교황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을 하고 근거를 찾고, 실행에 옮기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자연스럽게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긍정적인 의미다. 콘클라베에서 교황이 선출되면 하얀 연기가 굴뚝에 위로 피어오른다. 그렇다면 애초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된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선출이 맞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다만 많은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끝까지 일이 잘 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까지 잘 마무리를 하고 싶다고 꼭 마음처럼 되진 않는 것이라 이해하기로 했다. 뭔가가 잘 되고 잘못되었다는 건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 새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고 두 교황이 함께 화목하게 있는 모습에선 연기가 위로 사라진다. 제대로 됐다는 의미처럼. 두 교황에서 의외로 눈여겨볼 숨겨진 출연진은 바로 이 연기가 아닐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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