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온몸이 차분해지는 욕망의 쓴 맛 - '핫 걸 원티드', '핫 걸 원티드: 턴 온' [영화]

글 입력 2020.04.0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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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

포르노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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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차분하게 만들고 싶다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 게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포스터만 보면 세상 저래도 되나 싶은 작품들을 볼 때 호기심이 동해서였다. 영화 "원초적 본능"이 그랬고, "님포매니악 1,2"가 그랬다. 포스터는 영화를 얼마나 담고 있을까. 발상의 전환이나 생산적 현타가 필요하다면 여지없이 추천. 넷플릭스에서 "핫 걸 원티드(Hot Girls Wanted)"와 "핫 걸 원티드: 턴 온(Hot Girls Wanted: Turned On)" (이하 "턴 온")을 보고 난 지금 역시, 이렇게 또렷한 정신일 수가 없다.

 

포르노. 사람들끼리는 대놓고 편하게 말하진 않고,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그 존재'. 최근 텔레그램 n번방의 소식을 들으면서도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 비겁할 수도 있지만 수요와 공급은 서로를 탓하기가 좋은 구조다. 공급하는 입장은 수요가 있으니까 만들었을 뿐이고, 내가 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 만들었을 거라 할 것이다. 수요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 생각도 못하던 것이 현실에 있는 걸 보니 샀을 뿐이라고 하겠고.


아니, 그 사이의 돈을 탓할 수도 있겠다. "핫 걸 원티드"와 "턴 온"을 볼 때도 가장 익숙해진 말은 돈 벌려고 하는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왜 이게 돈이 되는 일일까. 안 된다고 할수록 하고 싶은 마음과 사회적 금기가 여기에 얹어져야 한다. 몰래, 비밀스럽게 보는 게 아니었다면? 백화점, 서점, 인터넷 쇼핑이나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포르노를 쉽게 구하고 볼 수 있고, 사회적으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졌다면 이렇게까지 성공했을까? 경제적 가치가 우리가 아는 유명한 기업들 그 이상이다. 생각해보시라 '취미가 뭐예요?' '포르노 감상이요' '오 포르노 감상 좋죠. 저도 좋아해요' '전 00 감독/00 배우가 좋더라구요' '저도요! 취향이 통하네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독서나 영화 감상이랑 비슷한 급이었다면 말이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요상하다.

 

 

*

"핫 걸 원티드",

 포르노가 망하지 않는 이유

 

"핫 걸 원티드"에서 가장 놀랐던 건 툭 뱉은 말이 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초반부터 포르노 배우를 관리하는 에이전트 라일리가 이런 말을 한다. 'Every day, a new girl turns 18, and every day a new girl wants to do porn. I'll never run out.' 매일 성인이 되는 여자들이 넘치고, 그 애들이 포르노를 찍고 싶어 하니 절대 사람이 모자랄 일은 없을 거란다. 절대로. 의아했다. 옆집 소녀 같은 친구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아마추어 포르노야 그럴 수 있다 치자. 미국 전 역에서 18살 남짓 된 친구들이 갑갑한 고향을 한 번 벗어나서 자유롭게 여행하고 돈을 벌겠다고 '공짜 마이애미 비행기 티켓'에 혹해서 포르노를 찍으려 한다니! 부모님처럼 고향에 갇혀 평범하게 살고 않고,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모아야 백 날 제자리걸음인 것도 싫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그게 최선이었을까? 유교가 혈관에 흐르고 있긴 했는지 혼란스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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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문화권의 차이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영상 초반에 나왔듯 포르노를 더 어린 나이에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성에 개방적인 시대이기 때문이라 보는 게 더 설득력 있다. 그리고 그보다 설득력 있는 것은 돈을 위해 성을 상품화해서 파는 것이 사람들에게 괜찮은 선택지라는 점이다. 로또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일확천금이다. 그 밑바탕에는 지금 이대로의 현실에 답이 없다는 인식이 있다. '정석'대로 돈을 버는 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노력하고 땀을 흘려서 얻는 만족감은 있더라도 손에 쥐어진 돈은 적다. 그 와중에 만질 수도 없는 돈을 만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영영 그곳에 다다를 수 없을 거라고 이미 알고 있다.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본다. 젊은 몸이 눈에 띈다. 젊음은 상품성이 있고 시간이 지나면 그 상품성은 떨어져 버린다. 시기적절하게 마침 그걸로 돈을 좀 벌겠다는데 문제가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포르노야말로 가장 스테디셀러인 사치품이 아닌가. 5시간 일하고 최저시급으로 따지면 5만 원도 채 못 버는 게 현실이니까. 직장 상사 분이 던졌던 농담이 떠올랐다. 집을 사려면 숨만 쉬고 400여 년을 일해야 가능하겠더라구요. 10만 원, 100만 원 단위에도 손이 떨리는 나 역시 자조적인 입장인 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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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마추어 포르노 진출이 마음에 걸리는 이유들이 후반부에 펼쳐진다. 그 상품성이란 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유효기한이 짧고, 합법이라는 것 이외에 포르노는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포르노 시장 자체가 '이 중에 네 취향이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마인드로 채워지기 때문에 과격한 장르 또한 많다. 남자 감독이 많고, 영상 역시 남성이 많다고 가정하고 제작하기 때문에 여자 배우들이 혹사당하는 경우도 많다. 원하지 않아도, 즐길 수 없어도 늘 처음인 척 연기해야 할 때도 많다. '안면 학대'라는 장르는 여자를 억지로 토하게 하고 핥아먹게 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 장르를 여성학을 배운다는 듀크대의 한 학생이 찍었는데 모순적인 느낌이 곱절은 됐다. 아마 그 영상의 시청자는 같은 이유로 곱절은 만족스러웠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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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인터뷰에서 그녀는 성 노동자를 자유로운 존재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상 그녀가 정말 자유로웠을까? 영상 속의 그녀는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온갖 욕을 들으며, 성기를 빨고, 게다가 구토까지 하는 삼단 콤보. 포르노 배우들은 화면 안과 밖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화면 안만 보고 있다. 우리가 그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거나 어떤 사람인지, 업계의 현실은 어떤지 다양한 시각을 갖출 수 있는 기회 역시 없다. 매 촬영 때마다 촬영에 합의를 구하고 온전한 정신인 성인인지 확인을 했으니 합법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걸로 충분한가.

 

배우들이 느끼는 모욕감이나 고통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때로는 강간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2주마다 혈액검사를 받지만 몸에 무리가 와서 병에 걸리기도 한다. 그만두고 돌아온 배우가 집세와 각종 생활비를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이 몇 백만 원 되지 않았다는 말엔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거야말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서 사기당한 셈 아닌가. 일장춘몽을 이렇게 짧고 굵게 느낄 수 있을까. 돈은 남지 않지만 영상은 남아있을 것이다.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남짓 업계에 발을 담갔다 사라지는 수많은 여자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초반에 스타가 되겠다며 노래를 부르던 이는 자신은 고깃덩어리라며 가슴, 엉덩이, 성기만 있으면 될 뿐 여기선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



*

"핫 걸 원티드: 턴 온"

: 숨겨진 이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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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걸 원티드"가 포르노 업계에서 살아남지 못한 여배우의 경험담을 주로 담고 있다면 "턴 온"은 포르노 업계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배우, 감독, 회사 CEO 등 다양한 경우를 다룬 점이 흥미롭다. 굳이 앞에서 '여배우'를 쓴 건 <턴 온>에서는 남자 배우의 고충을 따로 중점적으로 다룬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든 일이 되면 쉬운 게 하나 없다지만 극한 직업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암만, 함께 찍는 포르노인데 남자 역시 힘들지 않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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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적으로 얼굴을 짓누르라는 요구에 머뭇거리던 손

 

 

한 남자 배우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표현해야 할 때 힘들어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사정하지 않으면 영상 촬영이 끝나지 않는다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오래 일하는 경우는 15년 넘게 일할 수도 있다는 게 여자배우와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사정하는 데 어려워 보이는 즉시 일이 끊길 수도 있고 여러 약을 먹어야 할 때도 있다고. 정말 별거 아닌 멘트지만 그 배우에게 '어서 발기해!' '사정할 것 같아? 얼마나 남았어?'라는 포르노 감독의 말이 고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상황을 지시대로 따라준 그의 몸이 대단하다.


업계 종사자들은 처음부터 포르노로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주비행사, 프로 풋볼 선수, 보석 세공사가 되고 싶었던 이들이 어쩌다 보니 포르노 배우, 포르노 회사의 CEO가 되어있을 뿐이다. 사회적인 인식이 달라졌다고 성에 개방적인 시대라고 해도 포르노를 보는 시청자의 관점이지, 포르노 업계의 종사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가장 가깝게 본인 자신,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이 포르노 때문에 괴로워한다. "핫 걸 원티드"에서 포르노 회사 에이전트 라일리는 아웃백에서 서빙이나 하던 루저가 지금 자기 주변 어느 누구보다 잘 나가고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탄다며 자랑을 했다. 하지만 <턴 온>에서의 그는 안타깝다. 좋은 차를 튜닝하고 꿈결 같은 요트를 구매하고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 통장에도 넣어놨지만, 아버지는 늘 직업을 바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만 하시고 친척들에게는 강제 절연당했다. 여전히 시간 대비 효율성이 좋은 직업이지만 고소득인 만큼 사회적인 비판이라는 고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그들이 찾아 헤매던 부와 돈이 그들은 생각보다 그리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꿈은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삶이었다.



*

포르노 업계가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

 

"턴 온"의 에피소드 중엔 포르노 업계가 가진 문제를 다방면에서 개선하려는 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렇게 업계 종사자들의 고충을 봤다고 해서 선뜻 그래, 포르노를 없애버리자! 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인체의 신비 수준으로 가르쳐 준 것으론 모자라서인지, 호르몬의 노예와 욕망 덩어리들인 우리는 모자라는 지식을 포르노에서 배우고 있다. 인터넷 클릭 몇 번이면 볼 수 있으니 어려울 것도 없고, 남녀노소 다 보니 고객이 떨어질 일도 없으니 비즈니스 걱정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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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을 추구하지만 예산이 점점 줄어요!

 

 

하지만 포르노 업계라고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료로만 포르노를 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포르노의 퀄리티 역시 하향 평준화되고 있다. 그밖에 작품성이 실종된 전개와 연출, 구조상 남성 중심의 판타지, 포르노 배우들의 짧은 직업 수명이 포르노 업계의 현실이자 위기이기도 하다. 이런 위기에 대응해 최선을 다해 고퀄리티로 예술적인 면모를 끌어올리려는 포르노 감독, 여성이 만족할 수 있는 포르노를 제작하는 감독, 그리고 포르노 배우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돕는 회사가 있었다. 원하지 않는 장르는 하지 않아도 되고 영상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재정관리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말이다.

 

포르노의 고급화 전략, 여성의 판타지를 반영하는 점은 공감했다. 말마따나 넷플릭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게 포르노인데 그런 것치고는 결과물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넷플을 보는 우리와 포르노를 보는 우리가 전혀 다른 사람은 아니지 않나? 넷플릭스처럼 정액제로 회원을 받고 일정량의 작품들을 일괄적으로 보게 하는 것도 완전 무료로 운영하는 것보다는 수익이 날 텐데, 계속 금액을 내고 구독할 만큼의 퀄리티가 보장되어야 가능하다. 영화는 '포르노 같다, 외설적이다'라는 게 혹평이겠지만 포르노가 '영화 같다, 감성적이다'라는 게 혹평이진 않을 것이다. 누가 알겠나. 포르노가 영화와 구분이 어려워지면 그거야말로 정말 많은 게 바뀌진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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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판타지를 다룬 포르노 감독은 최근 영화의 추세와도 비슷하다. 몇 년간 여성을 다룬 영화나 여성 감독들이 눈에 띄는데 그만큼 영화계가 남성 위주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사, 캐릭터, 주인공 및 연출에서 여성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성공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에리카 러스트 감독 역시 여성을 위한 포르노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포르노를 제작하게 됐는데 반응이 좋다. 세계 각지의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한다. 꼭 여성만을 위한 영상은 아닌 게 남성들 역시 이 영상을 통해 여성들이 원하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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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다 그녀처럼 왕관을 쓰진 못했을 것

 

 

다만 포르노 배우를 케어하는 시스템은 아직까지는 그리 설득력은 없었다. 성공한 포르노 배우의 경우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배우를 새로 영입하고 관리할 때 자신의 노하우를 전달하려고 한다.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방법과 조언을 알려주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선택은 배우의 몫'이었다. 약에 의존한다거나, 원하지 않는 장르의 작품을 찍어도 특별한 제재나 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방임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확고한 목표가 있는 배우라면 흔들리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들에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은 이 바닥은 이런 곳이라며, 결국은 우리는 경쟁자이고 자기 자신을 망치는 사람은 안타깝지만 지켜볼 뿐이라는 입장이 마지막에 한 발 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망가지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시작했던 일이 아니었나?



*

포르노만 다룰 줄 알았지?


"턴 온" 역시 전작처럼 '포르노'라는 소재를 다룬다고 예상하고 봐서 절반 정도는 예상외의 에피소드들이었다. 포르노를 넘어서 인터넷이나 sns에서 나타나는 인간상 자체를 다루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에피소드들은 포르노를 다룬 에피소드에 비해 현실적으로 묘하게 막장이면서 묘하게 훨씬 교훈적이었다. 캠걸과 캠걸과 4년 넘게 사랑에 빠진 단골손님, 그리고 데이트 앱 틴더 등을 중독적으로 쓰는 남자의 이야기, 친구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올린 10대 청소년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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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미국에 있는 캠 걸과 호주에 있는 단골이 4년 만에 실제로 만났다. 온라인에서의 친밀감과 사랑은 오프라인에서도 똑같을까? 아무리 직업이라 그래도 쿨 내가 진동하긴 하는데 캠 걸은 남편도 있는데 단골이 여행경비도 다 준비해놨다고 호주로 여행을 가버린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아주 바짝바짝 타들어간다. 다른 남자한테 아내를 보내야 하는 남편은 남편대로 속이 타고, 처음 사랑하는 캠걸을 제대로 만나는 단골은 설레서 입이 타는 상황.


이미 4년간 알았기 때문에 오프라인으로 만나면 자연스럽고 좋을 것 같다는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어색하고, 쾌활한 컨셉으로 하루 종일 보내야 하는 게 지치고, 생각보다 자신을 너무 좋아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고 미안해하게 된다. 자신은 남편이 1순위인데, 그에겐 자신이 1순위이자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그를 구속했다는 죄책감을 느낀 것이다.


애당초 별생각 없이 여행을 간 그녀나, 남편이 뻔히 있는 걸 알면서 여행을 오라고 하는 그나 이해가 되진 않는다. 그걸 꼭 만나봐야 아는 건가. 다행히 둘 다 좋은 쪽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자. 안될 걸 알았지만 그를 조금 응원하게 된 건 그가 4년간 그녀에게 호주를 여행하러 올 수 있게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그녀와 함께하는 동안 시종일관 꿀 떨어지는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4년간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한 마음과 정성이면, 당신은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예요.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자신을 전형적인 너드라 부르고 평생 어느 여자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던 그가 그녀가 떠난 후 이런 말을 했다. '희망이 생겼어요. 자신의 짝이 있을 거라는 희망. 그런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희망.' 처음에는 신기했고, 다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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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틴더 같은 데이팅 앱을 애용하는 '준 연예인'의 남자. 40살의 나이에도 20대의 젊은 여성들과 짧게 돌아가면서 데이트를 하는 그. 지금 이대로 좋은 걸까?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후, 그와 만나보려고 하는 여자들이 늘어나 그는 인기를 즐기며 살고 있다. 다량의 데이트 경험으로 매너가 좋지만 그와 별개로 이별 매너는 꽝이다. 데이팅 앱 덕분인지 이별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얼굴을 보거나 전화로 말하지도 않고, 다른 여자들과 노는 사진을 sns 계정 올리거나 문자로 통보하는 정도다. 그를 많이 좋아했고 마음 정리가 되지 않는 한 여자가 그에게 찾아와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해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얘기하자 그제야 남자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반성을 한다. 시작보다 끝이 훨씬 중요한데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떠나고 잠수를 탄다. 왜냐? 우리는 가볍게 만난 거니까. 헤어지는 것도 가볍게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앞의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걸 굳이 말로 해줘야 아냐' 싶다. 만났던 여자들의 이름은 적어놓으면서 이별은 제대로 고하지 못했다니, 이제 일일이 한 명씩 사과를 해야겠다며 고민하는 마흔 살의 그가 여전히 어려 보였다. 좋은 의미는 아니고. 사람만 탓할 건 아닌 게 데이트 앱 덕택에 선택의 폭을 넓어졌다. 말 그대로 '세상에 너 말고도 여자/남자는 많아'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굳이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깊은 관계라는 걸 만들 필요가 없어 보인다. 물론 익숙해진다고 상처 받지 않느냐, 혹은 행복하냐 하면 그렇진 않다. 기술이 발달했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같은 방식으로 변하진 않으니까. 그가 무척 마음에 들어하던 여자와 어머니의 대화가 더 인상 깊었다. 궁금하긴 하다. 그가 영상 속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 같은 여자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슨 말을 할지.


여자 - "데이트를 할 때 사람들은 너무 빨리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나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서요. 상대도 그렇게 얘기하고요. 정글의 세계예요. 데이트의 세계는 정글이에요."

엄마 - "그럼 어떻게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깊게 사랑하겠어?"

여자 - "모르겠어. 그러니까 지금도 혼자지. (웃음)

 


*

Last but not least

마지막인 만큼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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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친구의 강간 장면을 생중계한 어느 10대의 재판 이야기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들릴 만한 하긴 하다. 처음부터 강간인지 합의된 성관계인지 조금 헷갈리긴 한다. 어떤 남자가 친구와 자신을 집으로 초대했고, 어느새 보니 둘은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고 술을 마시고 자신은 할 일이 없어 페리스코프라는 라이브 스트리밍 앱으로 놀고 있던 상황. 틀어놓다 보니 접속한 사람들이 반응이 너무 좋았고 계속 찍으라고 해서 찍던 중에 친구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로 당황스러운데, 일단 모르는 사람이 집에 초대한다고 집에 가는 것도, 그 사람이 주는 술을 먹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랑 친구가 섹스 중인데 할 일이 없다고 페스코프를 하는 것도(합의된 관계였으면 이럴 때 친구는 자연스럽게 빠져주는 게 좋은 친구 아니었나!), 그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도 요모조모 다 이상했다. 10대의 변명이라기엔 올린 건 다른 것에 비하면 그렇게 수위가 높지도 않아요라니. 동의도 없이 친구를 영상에 올리다니 그건 수위가 상관이 없지 않나.


이메일, 동영상, 사진은 '남는다'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올리는 것들에는 관대하다. 일면 모순적이다. 타인으로부터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싶고 사생활 침해 역시 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sns에 일거수일투족을 남기고, 온라인으로 소통하면서 수많은 정보를 알리기도 한다.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말이다. 자극적인 부분을 내려놓으면 우리 역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위험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진 않은가. 내가 올린 글, 영상과 사진이 나를 속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발 늦게 찾아온다.


물론 이 10대가 강간 혐의가 있는 남자와 똑같은 벌을 받는다면 그건 좀 아리송하다. 말리지 않았다고 똑같은 벌을 받는다니! 그 행동 하나로 20년 동안 기록되는 성범죄자가 될 만한 일인가 싶기도 하고. 똑같은 형량은 아니고 1년 미만으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표정은 덤덤하지만 속은 복잡해 보였다. 과연 그녀가 그날만 피했다고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았을까?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나도 해도 된다는 생각은 분명 위험하다.


그 와중에 궁금한 건 채팅방에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을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를 다 제외하고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자극적인 댓글이 극단적인 상황을 이끄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채팅방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거나 속상해서 투신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낄까? 나는 채팅방에서 말만 했을 뿐이고 더 보여달라고 했다고 보여준 사람이 바보라고 말하면 그뿐인가?

 


*

당신이라고 예외란 법은 없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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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 온"에서 주고자 한 메세지는 "핫 걸 원티드"와는 확연히 달랐다. 유투브에서 포르노 배우와 업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치우친 시각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며 업계 종사자가 비판하기도 했다. 우리는? <핫 걸 원티드>에서 옆집 친구 같은 사람들이 큰 계획 없이 아마추어 포르노에 입문하고 있고 포르노 업계엔 문제가 너무나 많다는 점엔 공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내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인가 하면 다른 문제다.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며, 포르노를 소비하는 화면 밖에 누군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전작에 비해 <턴 온>에서 다룬 포르노 배우와 업계는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전작과의 균형을 고려한 내용 구성이라고 본다. <핫 걸 원티드>가 빛을 쫓아 날개를 펄럭이다 주저앉은 지쳐 돌아온 느낌이라면, 오랫동안 빛을 향해 흔들리지 않고 날개를 펄럭이는 것 역시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스스로를 단단하고 명확하게 만들고, 약점을 보완하고 틈새를 공략하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게 쉬운 건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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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단지 그뿐인가. 나머지 에피소드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 이렇게 황당하지만 놀라운 재판 이야기를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는 게 결론이다. "턴 온"에서 조명받는 주인공들은 우리와 피부로 와 닿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극단에 있다. 우리 중 누구든 자신이 번 돈으로 웹 캠에서 만난 사람에게 돈을 내고 감정이 쌓일 수도 있다. 누구든 데이트 앱을 활용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상처 줄 수 있다. 누구든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다가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담을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남들이 보면 어이없을 그 이야기들이, 굳이 그걸 말로 해줘야 해야 알까 싶은 실수의 주인공이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주인공에게 어떤 교훈을 얻었냐는 잔인한 질문은 우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교훈을 얻었나? 당신은 어때? 어쩌면 당신도 그럴지도 모르고, 이미 그랬을지도 모르지. 여태까지 그런 적이 없다고? 다행이네. 근데 확실해? 정말 비슷하게라도 그러지 않을 자신 있어? 저 대답 중 하나라도, 한순간이라도 멈칫했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한 번씩 멈칫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

욕망, 사랑, 관계라는 고민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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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웹 캠, 데이트 앱, SNS, 라이브 스트리밍. 우리의 욕망. 사랑과 인간관계. 생활 자체를 바꿔놓은 장르와 플랫폼. 이들의 단 하나의 공통점을 꼽자면 우리를 피상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장점이야 부정할 수 없다. 데이터나 와이파이가 통하니 거의 모든 곳에서 마음만 먹으면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언제나 어디서나 사용 가능하다. 비록 혼자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우리를 연결해 준다, 잘 활용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커리어도 쌓을 수 있고, 욕망이든 사랑이든, 네트워크든 원하는 것을 충족할 수 있다.


단점도 모르는 바 아니다. 심한 경우,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관심으로 인해 나의 판단의 기준이 희미해지고 휘둘리게 된다. 화면 속으로 보이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잔뜩 온라인으로 관심을 받은 후에 나에 대한 '존재감'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진짜 섹스, 진짜 사랑, 진짜 사람, 진짜 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건 왜일까. 우리가 여전히 직접적인 감각이 지배하는 존재라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그걸 따라야만 할 필요가 있었나?

 

나는 균형점을 찾지 못해서 뒤돌아왔다. 내 머리와 마음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영상으로 보는 것 말고 내가 보고 느끼는 게 좋다. 실제론 말도 잘하지 않는 사람과 SNS로만 친구를 맺기만 하는 건 친구 수 채우기 같아서 쓸쓸하다. 데이트 앱에서 내가 점수 매겨지는 것도 슬프고 다른 사람을 내가 점수 매기는 것도 서글프다. 거기서 사람을 가볍게 만나고 잠수를 타야 한다면 찔린다. 늘 잘 살고 있는 모습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꼭 보지 않아도 좋다. 은근히 속이 꼬일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 내가 싫어진다. 왜 좋은 소식에 속으로 쫌팽이처럼 질투나 하고 있냔 말이다. 내 얘기를 내 입으로 말하면 자화자찬에 TMI지만, 온라인이나 SNS에 올리면 TMI가 아닌 것도 아리송하다. 당신이 뭘 먹었고 입고 봤는지도 물론 궁금하지만,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한데 그건 너무 진지한 내용이겠지.


하지만 내가 편하면 된 것이지, 안 그런가. 나만 수많은 점이 부족하고 뒤처진 건가, 친구가 너무 없구나,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이렇게 속이 좁은가! 같은 회의감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팔로워, 조회 수, 좋아요, 하트, 댓글 등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나 역시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다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대단하단 것도 새삼 알았다. 때때로 생각나면 들어가 볼 수 있게 있으나 마나 한 계정이야 있다. 늘 여전히 모든 건 그대로다. 어쩌면 나는 기술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한 실패자인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수많은 정보와 사람이 범람하는 세계에 던져졌을 때 뒤돌아서 버렸다. 크고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인싸가 되긴 싹수부터 글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가. 이게 나라면, 나 하나쯤 하지 않는다고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핫 걸 원티드: 턴 온>에서 '턴 온'(turned on)은 유행, 멋진, 성적인 흥분을 모두 포함한 복합적인 뜻이라는 게 막바지가 되어서야 떠올랐다. 보고 나니까 더 확고해졌지 뭔가. 유행에 꼭 민감하고 싶지도 않고, 꼭 힙하거나 멋지지 않아도 되고, 흥분은 말해 뭐 하나, 두 편의 다큐를 보고 나면 몸이 달아오르긴커녕 흥분이 파사삭 식어버린다. 앞으로 포르노를 떠올리면 핫 걸 원티드 시리즈에서 본 것들이 많이 기억날 것 같다. 내겐 제목과 정반대 효과를 주었지만, 좋은 의미로 나만 당할 순 없지.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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