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위로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지복의 성자' [도서]

글 입력 2020.04.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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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서문이 가슴을 울린다. 한때 <작은 것들의 신>으로 독자에게 카스트 제도의 모순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던 아룬다티 로이의 책이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에 읽고 나면 상흔처럼 마음에 깊이 남을 때가 있다. 내게 <작은 것들의 신>이 그랬고, 아룬다티 로이의 (평론을 포함한) 모든 문장이 그랬다. 그런 그가 20년만에 발표한 <지복의 성자>는 어떤 이야기일까. 서문은 이 책 역시 쉽게 읽히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소설은 무덤에서 지내는 늙은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 이름은 '안줌'이다. 남성기와 여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당혹스럽게 한다. 안줌은 분명 존재하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 당연히 이 질문은 그녀에게 단어의 조합이나 하나의 명쾌한 문장으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소리 없는 배아의 울부짖음으로 전해졌다."


어머니는 아이를 성자 사르미드에게 데려가 속삭인다.

 


'이 아이는 제 아들 아프타브입니다. 제 아들을 당신께 데려왔습니다. 이 아이를 보살펴주소서.그리고 제게 이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하즈라트 사르미드는 그렇게 해주었다. 사르미드의 손길은 안줌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인도의 거센 물결을 자신의 '설명할 수 없음', 히즈라라는 정체성에 기대 헤쳐가고, 아주 늙은 여인이 되어 무덤가에서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 때까지. 어머니는 자신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지만, 사르미드가 안줌에게 선사한 힘은 더 큰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법에 대해 알려준다. 안줌은 언어를 잃은 사람들, 내적,외적 모순에 고통받고, 공포와 체념을 들이쉬며 산 사람들에게 그 모순 속에서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건 묻지 않고 일단 품에 안는 것이다. 그녀는 자이나브를 품고, 사담을 품고, 틸로와 무사, 미스 제빈 2세,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전부 끌어 안는다. 안줌의 존재는 소설을 관통하는 깊은 강이다. 영혼에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그 강가로 모여든다.

 

*

 

크게 3부로 나눌 수 있는 이 책에서, 첫 1부는 안줌이 태어나서, 히즈라들의 거처인 콰브가에서 지내다 그녀가 콰브가를 떠나 새 삶을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1부에서 인도의 '외적'인 문제, 정치,종교적 당파성, 전쟁 등의 문제는 부각되지 않는다. 1부는 히즈라의 이야기를 한다. 콰브가라는 숙소에 모여, 역사에 아무 자리도 없이 그림자로, 또는 '행운'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여기 행복한 사람 없어. 행복이 가능하질 않아.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결국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 해결될 수가 없으니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도-파키스탄 전쟁. 나중에 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외적인 문제들에 대해 말한다. 카슈미르 분쟁같은. 하지만 시작은 안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왜 작가는 안줌에서부터 시작했을까? 가장 비천한 자라서? <지복의 성자>는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처럼) 인도의 장대한 서사를 말하고 있지 않다. 대신 인도의 상황이, 종교가, 역사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만드는지 얘기한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증오와 침묵을 가르치며 영혼을 불구로 만들려 하는지, 하지만 모든 당파성, 남과 여, 종교 분쟁, 성스러움과 부정의 혼돈을 속에 안고 산 안줌은 굴종하지 않는다. 내면의 인도-파키스탄 전쟁만큼이나 그녀를 이끄는 힘은 모성애다. 태어난 생명을 마땅히 사랑하고 보살피려는 본성. 그녀는 항상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베풀 아이를 바란다. 자이나브는 콰브가에 두고 와야했지만, 공원에서 다시 버려진 아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투사들의 비겁함에 분노하고, 당당하게 아이를 위해 싸운다.

 

 

"이 아기는 신의 선물이에요. 나에게 줘요. 나는 아기에게 필요한 사랑을 줄 수 있으니까. 경찰은 아기를 정부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던져넣을 겁니다. 아기는 거기서 죽을 거고."



안줌이 콰브가를 떠나 무덤가에 집을 짓고, 사담을 만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어느날 시위가 벌어지는 공원에서 아기 하나를 위해 경찰과 맞설 때까지를 2부라고 하자. 3부는 시점과 주인공이 변한다. 안줌은 조연으로, 히즈라들의 안식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도 잠시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3부의 주인공은 버려진 아기를 안아든 묘한 여인, S. 틸로타마다. 대학교 때 건축을 전공하고,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녀는 작가의 페르소나 같다.


틸로의 삶은 안줌과 다르지만, 역사의 그림자, 자신을 설명할 말을 갖지 못한 인물이라는 점은 비슷하다. 지체 높은 가문의 여자와 하층 카스트의 결합으로 태어난 틸로의 피부는 검다. 수녀원에 버려진 그녀를 그녀의 어머니가 입양한다. 틸로는 도도하고, 입이 험하며,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다.


3부는 그런 틸로의 이야기가 세 남자와 엮어 양파 껍질처럼 천천히 드러난다. 남자들의 등장은 이야기에 '외적'인 문제를 불러들인다. 인도-카슈미르 분쟁. 틸로의 세 남자는 모두 이 피비린내 나는 분쟁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 비플랍은 지배자/권력층으로서, 나가는 알려진 기자로서, 무사는 투쟁하는 이슬람 전사 지도자로서. 이때까지 <지복의 성자>는 말그대로 그림자, 문 안에 있는 사람들, 누군가 자신을 이끄는 대로 따라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였지만, 세 남자의 등장으로 소설은 역사-정치적 강렬함를 두른다.


제 삼자, 멀리서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비플랍은 견고한 상류층이다. 그는 틸로와 무사에게, 인도-카슈미르 분쟁에서 고뇌할 필요가 없는 권력자이다. 하지만 비플랍이 계속 틸로를 알고자 하기 때문에 카슈미르 분쟁은 독자에게 더 생생한 현장이 된다. 그녀의 내면은 너무나 고요하고 떳떳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틸로는 중력처럼 이 남자들을 추상성의 세계에서 끌어내린다. 비플랍이 한때 틸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틸로를 둘러싼 모든 것(카슈미르 분쟁!)은 당파성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건 서로의 상호관계성, 기억과 감정에 기반한 사건이다. 이게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분쟁이다. 기억과 감정. 분쟁은 '믿음'이나, '의견'의 충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가치들은 추상적이다.


틸로의 연인, 무사가 이슬람 전사로 나서게 된 건, 믿음의 각성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 이야기를 조르는 딸의 목소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작가는 분쟁을 우리 눈높이 가까이에 내려놓는데, 그러면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피와 눈물과 오물에 범벅이 된 사람들이 영혼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신을 부르짖는 걸 보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딘가에 '비유'가 될 수 있는 문제를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슈미르 분쟁은 오직 카슈미르 분쟁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추상성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틸로와 무사의 간절함을 어디에도 감히 비유할 용기를 내지 못하겠다. 미스 제빈 2세의 사연을 들은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의 심정이 이 책을 읽고 난 내 감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편지를 들은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먼 곳의 미지의 여인의 이야기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보았다."



나는 <지복의 성자>가 사랑과 삶에 대해 말한다고 느꼈다. 어떤 세속적인 성스러움에 대해. 존재의 비천함에 대해, 영혼이 부서지는 이유와, 고통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대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아룬다티 로이의 문장은 내 눈을, 뇌를, 가슴을 벌침 쏘듯 마취시키고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의 음영을 가슴에 새긴다. 알몸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틸로, 무사의 어린 딸이 숨어있는 묘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다짐을 하면서도, 곁에 누운 연인을 끌어안는 무사.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아룬다티 로이는 명연설 '9월이여, 오라'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그 중 한 대목은 작가가 <지복의 성자>에 바치는 작가의 말같아 인상 깊다.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 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 하나뿐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쓰는 글은 국가와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 권력의 편집증과 잔인함에 관한 얘기이며, 권력의 물리학에 관한 얘기입니다. (...)


그러나 정말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상실감에 대해서입니다. 상실과 잃어버림, 슬픔, 실패, 망가짐, 감각의 마비, 불확실성, 두려움, 감정의 죽음, 꿈의 죽음, 절대적으로 냉혹하고, 끝없이, 습관처럼 반복되는 이 세계의 불공정함. 함. 이러한 상실감이 개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전체 문화, 언제나 그것을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로 삼고 살아온 사람들 전부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있을까. 땅에서 한뼘도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 자꾸만 납작해지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작가는 소설의 끝을 사람이 아니라, 작은 쇠똥구리 귀 키욤의 행동에 집중한다.

 


"모두라 함은 쇠똥구리 귀 키욤은 제외한 것이었다. 그는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혹시 하늘이 무너지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공중으로 다리를 뻗은 채로. 하지만 그조차도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하니까. 왜냐하면 미스 제빈, 미스 우다야 제빈이 왔으니까."


 

성인 사르마드는 힌두교인 소녀를 사랑하여 인도로 건너온 17세기 아르메니아 상인이다. 진정한 이슬람교도임을 증명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아직 충심으로 알라를 받들수 없다 주장해 목이 잘린다. 인도인들은 굴종하지 않는 자유와 사랑을 추구한 그의 정신을 기려 영묘를 만들고 그를 '지복의 성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으로 추앙한다. 동성애자로서 그는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소설 속 삶이, 그들의 영혼이 다 성자의 품 안에 있다. 역사의 얼룩 아래를 흐르는 깊은 강, 이 강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야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까.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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