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슴에 남아 있는 죽음 - "걸어도 걸어도" [영화]

글 입력 2020.03.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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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다양한 수상 이력 때문에 이미 이 영화를 알고 있는 분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는 죽은 큰아들의 기일에 모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준페이는 10년 전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하다가 사망하였습니다. 준페이는 온가족의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엄마와 두 동생들도 준페이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기일에 온 가족이 모이고 화목한 분위기가 만들어지지만 저마다 불편한 마음이 조금씩 있습니다. 극적 과장이나 비현실적 요소 없이 인간의 모습, 그리고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크기변환]걸어도 걸어도 포스터.jpg


 

이 영화를 통해 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걸어도 걸어도》의 매력은 내용과 표현의 섬세함에서 두드러집니다.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일부러 한 장면을 길게 지루하게 끄는 미장센, 가벼운 대사 속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의미들, 그리고 그러한 대사들의 배치까지, 흥미로운 특징을 집어서 말하자면 각 특징으로 훌륭한 평론을 몇 장씩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주제들은 차치하고 오늘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걸어도 걸어도》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영화의 ‘양지(陽地)’를 맡고 있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굳이 이 영화를 동원하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 훌륭한 영화를 통해 죽음에 관해 생각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죽은 큰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준페이는 각 인물의 삶에 은연중에 묻어 있습니다. 각 인물들의 크거나 작은 성격변화라든가 미래에 대한 인식 같은 것들에도 준페이가 죽은 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육신에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면 이 세상과 분리됩니다. 저승세계의 존재 여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저승세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쨌거나 그 사람의 생명이 이승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의 이야기는 “죽음”을 위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영화의 이야기는, 그리고 영화에는 나타나지 않은 각 인물의 생활은 부재하는 준페이라는 인물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일가족이 준페이의 기일을 위해 각지에서 모입니다. 엄마와 딸은 아침 일찍 주방에서 재료를 준비합니다. 평소에 가족에게 연락도 않고 지내는 료타도 재혼할 여인과 의붓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준페이가 바다에서 구해낸 요시오 군도 감사인사를 하러 기일마다 이 집을 방문합니다. 있지도 않은 사람으로 인해 (있지도 않은 사람이라니, 너무 매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만)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준페이는 이제 없습니다. 이 세계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계일 것입니다. 열역학에서는 우리가 관찰하는 영역을 ‘계(system)’, 그 밖의 영역을 ‘주위(surroundings)’라고 부릅니다. 나의 계는 현실입니다. 이 현실의 계에 준페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준페이라는 비물질적 존재(영혼이라고 해야할까요)는 모든 인물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는 없지만 그로 인해 각각의 인물들에게는 특유 감정이 일게 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로 인한 감정은 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의 인간이 준페이로 인해 때론 슬퍼하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말이 이 세상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그들이 서있는 위치를, 그들이 하는 행동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실에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남아 그들에게 역동적인 변화, 심정적이거나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물리적인 생명은 더 이상 없지만 영적인 생명력은 현실 속에서 생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김소월의 방식을 이용해보겠습니다. 김소월은 대중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본인의 작품에서 무덤의 이미지를 자주 등장시킵니다. 모든 그리움의 감정(그리움의 감정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슬픔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이상형적인 풍경들이 모두 좌절되어버리고 나서 시적 자아는 무덤으로 향합니다. 무덤에서 절망감을 느끼고 절규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어느새 무덤의 영혼들에게서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김소월의 시세계에서 무덤은 감정의 파탄 이후에 이르는 공간인 동시에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무덤에는 모든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있는데, 망자라고 해서 영혼까지 죽어있진 않습니다. 이곳에서 죽은 영혼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적 자아는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정의 밀도’가 높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서사가 죽음의 사건과 맞물려 있어서 슬픕니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해맑게 놀고 있는데 어른들에게는 미묘한 우울감과 죄책감이 느껴집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게 적당히 던지는 유머들은 불안정해 보입니다. 여차하면 분위기가 무너져버릴 것 같습니다. 죽음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이렇게밖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인물들이 죽음에 젖어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기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기일은 우리 삶의 극히 일부이고 우리는 보통 평범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나의 계는 현실입니다. 문명과 물질세계는 죽음과 상관없이 반복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떠난 자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대체됩니다. 단순히 생명의 죽음에만 관한 것은 아닙니다. 곁에 있던 무언가는 사라지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채워집니다. 그런 식으로 현실은 같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유지되려고 하지만 개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개인은 만들어지고 대체당하는 존재입니다. 세계와의 이질감은 그래서 발생합니다. 세계는 잘 굴러가고 있는데, 왜 나는 지치고 피곤하고 그만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크기변환]걸어도 걸어도.jpg

 

 

부재하는 것에 가끔씩 관심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부재하는 것의 소리를 듣길 바랍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그랬듯이 물질적으로 부재한다고 해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 존재가 사라져도 오롯이 남아서 생동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김소월은 무덤에서 죽은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시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원래 있다가 없어진 존재도 있고 애초에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영화의 결말은 아쉽습니다. 굳이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관객이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영역도 있는 것입니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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