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0.03.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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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성착취 카르텔이 드러낸 한국 사회의 이면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는 실재를 가공하거나 덧씌우는 게 아닌 이면을 관철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가닿는다. 나를 이끄는 다큐멘터리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희미해지는 것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기어코 나와 관계 맺게 하는 것. 한 사람의 협소한 세계를 넓혀 전과는 비교도 못할 풍부하고 슬픈 세계를 보여주는 것. 그런 시도는 인간이 가진 망각과 외면의 힘을 가뿐히 이겨버린다.


킵 앤더슨 감독의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라시cowspiracy>를 보고 먹어도 되는 동물과 안 되는 동물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처럼. 고통받는 이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관계 맺은 이상, 차마 몰랐다는 변명으로 악습을 반복할 수 없고 전처럼 회피할 수도 없다. 오만한 나에게 다큐멘터리와 르포르타주가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반비 출판사에서 출간된 『길하나 건너면 벼랑 끝』은 수십 년간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르포르타주이다. 책은 ‘순결하고 무고한 피해자’의 자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해 여부를 떠나 희롱과 비난을 받아왔던 성착취 피해 여성의 삶을 실제 당사자의 목소리로 전한다. 미성년의 여성이 20년 동안 겪은 인신매매와, 간신히 지옥에서 벗어나 성착취 피해 여성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1.JPG

출처: 닷페이스 "왜 성매매를 못빠져나왔냐"고 묻는다면

 

 

“나는 왜 성매매를 했을까? 내가 잘못한 것일까?” - 본문에서


저자의 미성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가난한 집안,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알면서도 방관하는 어른들, 가사를 위한 학업중단, 친족 간 성폭행, 강간, 임신과 낙태, 데이트 폭력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여성의 숱한 역사이자 다름 아닌 우리의 일이다.


너무 아파 고함을 질러봤자 대답 없는 적막뿐인 외딴 방에서 저자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성매매 업소의 업주였다. 친절한 얼굴의 업주는 손님이 노래할 때 박수치기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저자를 유혹한다. 동생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부족함 없이 살게 하고 싶은 어린 마음은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저자를 어둠의 늪을 향해 스스로 걸어가게 했다.



고통의 늪에서 그는 혼자


하지만 업소는 여성이 돈은 모을 수도, 원할 때 나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을 하는 대가로 받는 선불금은 매달 1~3할가량의 이자가 더해져 여성 앞의 빚이 되고, 각종 꾸밈비용, 지각비와 결근비가 더해진다. 어마어마한 이자 빚과 억지스러운 명분의 벌금은 지각과 결근을 하지 않고 일을 해도 청산되기는커녕 더 쌓이기만 한다.


폭력을 일삼는 업주와 마담은 빚 재촉을 하며 2차를 강요하고, 매출을 올리기 위해 남성들이 가하는 가학적이고 엽기적인 행위를 묵인한다. 업소 주변의 가게들은 아가씨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고, ‘소개소’의 소개쟁이들은 업소에 여성을 팔아 이익을 챙긴다. 성구매자 남성, 업주와 마담, 주변 상인들과 소개쟁이, 공무원과 지역사회가 모두 묵인하고 가담한 성착취 카르텔 속에서 여성은 자율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사고파는 물건으로 전락한다.


 

이제야 마주한 당신의 얼굴은


늘어나는 이자와 빚을 갚기 위해 소개소를 거쳐 업소를 전전한 저자는 가라오케에서 룸살롱으로, 지금은 성매매 집결지로 불리는 ‘유리방’으로, 보도방으로, 티켓 다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지옥을 벗어나려는 분투는 더 짙은 어둠으로 그를 이끈다. 벼랑 끝에 당도했다는 감각을 마주했을 때 친구의 소개로 저자는 여성인권지원센터에 찾아간다.


상담원의 도움을 받아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고 가족으로부터 잠깐 벗어나 쉼터에 머물며 저자는 난생처음으로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고 오랜 아픔을 어루만지게 된다. 오랜 단죄와 오명을 씻어낸 후 마주한 성착취 피해 여성의 삶은 그간 그들에게 덧씌워진 ‘문란’, ‘허영’, ‘발랑까진’, ‘되먹은’ 같은 수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마주한 그는 아프고 어리고 소외된,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끝없이 분투하는, 나와 같은 여성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였다면, 내 삶이 이러했다면, 내 선택은 이와 달랐을까.



끝없이 반복되는 성착취 카르텔


최근 사회를 공분하게 만든 일명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저자가 겪은 폭력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어린 여성의 미숙함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범죄에 들이는 수법, 여성을 노리개로 취급하여 추악한 일을 저지른 후 수익을 올리는 인신매매, 불법 촬영, 그것을 무려 ‘자연스러운 욕구의 분출’이라 여기며 ‘향유’한 수만 명의 남성까지.


‘텔레그렘 n번방’ 사건은 어떤 미친 사이코패스에 의해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니다. 뿌리 깊은 가족주의의 폐단과 비틀어진 남성 권력이 만들어낸 공고한 성착취 카르텔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언제든 재생산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추악한 이면이자 강남역 살인 사건, 웹하드 카르텔 등의 여성 혐오 범죄의 연장이다.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니.’가 아닌 가공 없는 현실 그자체인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2019년부터 도마에 올랐던 텔레그램 n번방은 최근에 들어서야 공론화되었다. 긴 외면과 망각의 터널을 지나 이제야 우리는 벼랑 끝에 매달린 여성들을 만났다. 지금껏 목소리를 내지 않고 주저한 나 자신에게 끝없는 죄악을 느끼며 그들에게 미안해 울었던 나날을 지나, 다시는 그 벼랑 끝에 당신을 혼자 남겨두지 않겠노라 지면을 빌려 다짐한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가 싸우고 불화하고 더 강해져서 당신을 안아주겠노라고.

 


[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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