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신이 이야기하는 여신 -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아르테미스' 리뷰
글 입력 2020.03.21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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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아_포스터.jpg

 

 

여자는 여자 편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여성혐오 발언은 오랫동안 여초 집단을 규정해왔다. 실제로 여초 집단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 여자들이 모이면 은근한 기싸움이 치열하다, 겉으로는 친한 척하면서 다들 속으로는 욕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러한 통념에 반발하며 2010년대 중반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자는 여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등장했다. 꾸준히 여초 집단에 속해 있던 당사자로서 이러한 인식 변화는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자는 여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여자를 돕는 건 여자 뿐' 또는 '여자는 여자를 도와야만 한다'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여성이라는 광범위한 집단을 또 다시 좁은 틀에 가두는 결과를 낳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에는 신들의 모임을 앞두고 조금 일찍 도착한 여신 셋이 등장한다. 그들은 과거 '파리스의 황금 사과 이야기'에서처럼 가장 아름다운 여신의 자리를 놓고 다투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서로의 편이 되어 주는 것도 아니다. 같은 여신이기는 해도 이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신이기 이전에 욕망하고 질투하며 자기만의 주관이 있는 개인이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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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이어질수록 세 여신이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드러난다. 특히 사랑을 둘러싼 이들의 입장 차이는 첨예하다. 처음부터 바람을 피는 남편 제우스에게 분노한 모습으로 등장한 헤라는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맺은 약속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에게 사랑이란 약속으로 지속되는 것이고, 지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반면 아프로디테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대를 찾아 헤매며 순간의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아프로디테는 감정이야말로 사랑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아르테미스는 둘에 비해 매우 폐쇄적인 인물로, 남자는 물론이고 다른 신들과도 좀처럼 교류하지 않는 인물로 비춰진다.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헤라와 아프로디테를 딱하게 여긴다. 그에게 사랑은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는 함정 같은 것이다. 아르테미스는 주관이 뚜렷하지만 그만큼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면모가 있다.

 

주거니 받거니 하던 대화가 전환점을 맞는 건 아프로디테의 남성 편력 이야기를 듣다 못해 헤라가 적당히 하라는 식의 한 마디를 건넨 순간, 문득 울려퍼지는 아프로디테의 물음이다. 모두 합의 하에 가진 관계들인데 왜 자제하라는 소리는 자신만 들어야 하냐고, 내가 여자라서 그런 거냐고. 그렇게 묻는 아프로디테의 질문은 연극에 방점을 찍는다. 서로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세 여신은 그들을 짓누르던 고민들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발견해낸다.


 

 

페미니즘 극은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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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디테의 질문 이후 연극은 꽤 무거운 이야기로 채워진다. 다르다고만 생각했던 헤라와 아프로디테는 공통된 경험을 발견한다. 헤라는 제우스에게,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에게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건 신이지만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혹시 그 폭력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여'신들이다. 연극은 '페미니즘 입문극'을 표방한 만큼 본격적으로 관련된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간다.

 

2010년대 중반 우리 사회를 강타한 페미니즘 물결은 여러 분야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이전과 달리 여성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 여성이 겪는 부조리와 차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여기에 발맞춰 여러 작품이 등장했다. 나 역시 페미니즘 극을 표방하는 몇몇 작품을 감상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시대에 맞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는 창작자들의 노력은 인정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에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데 그치거나 관객에게 과도하게 계몽을 하는 듯한 작품도 있었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그런 함정들을 영리하게 피해간다. 셋 중 가장 자기 주장이 강한 아르테미스는 아프로디테와 헤라에게 진지한 말투로 여성이 힘을 합쳐야 한다, 여성인 네가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 말하며 페미니스트들이 할 법한 말들을 다소 딱딱하게 쏟아낸다. 그런 대사가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쯤 헤라나 아프로디테가 꼭 의문을 제기한다. 말하는 건 쉽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연극은 이론적인 아르테미스와 현실적인 아프로디테 사이를 오가며 여러가지 페미니즘 이슈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입문극'으로 이 극이 좋았던 건 90분 내내 말하는 이들이 세 명의 여신이라는 것이다. 남신들은 몇몇 장면에서 삽화처럼 등장할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한심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에 그동안 여러 연극에 여성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나 돌이켜보면 의미 있는 '미러링'이다.

 

 

 

정답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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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후반, 세 여신의 대화는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서로를 상처입히기만 하는 관계가 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제우스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헤라의 이야기, 유일했던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진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는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준 상대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윽고 여신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관계 속에서의 자신을 사랑하기란 참 쉽지 않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모습과 실제 우리의 모습은 늘 다르기 때문이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소수자성을 띠고, 그런 소수자성을 가진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은 그래서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신이고 각각 고유한 개성을 지닌 개인이지만, 개인의 개성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부딪힐 때 그것은 억압받거나 왜곡된다. 아프로디테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정숙하지 못한 행실 탓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거나 헤라가 제우스와의 결혼 후 '질투의 여신'이라는 오명을 얻어야 했던 건 이 때문이다. 아르테미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남동생 아폴론을 보며 자신이 여자라서 경쟁에서 밀린 건 아닌가 의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르테미스의 말처럼 여성들은 모두 단결해 여성을 향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어야 하는 걸까. 물론 그런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이 이론처럼 단순명쾌하지는 않다. 헤라가 당장 제우스와의 관계를 청산하거나 아프로디테가 남자를 그만 만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한 걸까.


연극 속 여신들은 결론을 내지 못한다. 갑작스레 돌아온 헤르메스 탓에 헤라는 다시 제우스를 쫓아가고 아르테미스는 헤르메스와 밀회를 나누며, 아르테미스는 사냥을 하러 돌아간다. 여성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정답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 까닭은 답이 각자의 안에 각각 다른 형태로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한 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자신의 답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연극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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