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 -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글 입력 2020.03.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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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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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아내로서 결혼이라는 약속을 지키고자 제우스 주변 여자들을 해코지하는 헤라,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마음껏 탐닉하는 아프로디테, 사랑과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는 아르테미스. 이 세 인물이 신전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세 인물은 서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서로를 비난하기도,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도 하면서 긴 토론을 이어간다.
 
헤라는 ‘너 없으면 죽는다’는 제우스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결혼을 했지만, 제우스는 어김없이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능력 있는 신이었던 헤라는 그저 ‘질투의 신’이 되어버렸다. 헤파이토스는 헤라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아프로디테와의 결혼을 요구했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아프로디테는 다른 남신들처럼 많은 상대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비난은 오로지 아프로디테의 몫이었다. 아르테미스는 동생인 아폴론보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려다가 덫에 빠져 사랑하는 오리온을 죽이게 되고, 다시는 사랑 따위 하지 않겠다며 고립을 택한다.
 
철저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만을 이야기하는데도 아무런 간극 없이 자연스레 한국 사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넌 무슨 말만 하면 남자, 여자로 나누더라?’, ‘술이랑 여자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와 같은 남성 인물들의 대사는 모두 우리 사회에서 한 번쯤 꼭 들어봤을 법한 말들이다. 남성 인물들은 끊임없이 여성을 소유화하면서 교묘하게 그것을 옳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견고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동일한 시선을 갖게 된다. 세 주인공의 토론에서도 여신들은 남성의 시선에서 상대방을 비난한다. 데이트폭력을 당한 아프로디테는 ‘걔 잘못이 없다는 거 아니야. 때린 건 백번 잘못이지. 그런데 네 잘못도 없지 않다고.’ 따위의 말을 들어야 했고, 남자 없이 사는 아르테미스는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그런 말들을 들으며 여성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기원전 서구의 이야기를 극사실적인 한국 현대 사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데도 아무런 괴리감이 없다. 두 그림은 완벽하게 겹쳐진다. ‘가스라이팅’, ‘데이트폭력’, ‘K-장녀’ 등 그 행위를 나타내는 언어만 조금 다를 뿐 본질은 같다. 이는 이런 문제들이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닌, 기나긴 역사의 모든 사회 흐름 속에 항상 존재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지금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이다.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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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의 삶’을 검열하며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조롱하던 세 여신은 점점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사랑과 삶의 본질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헤라와 아프로디테는 사랑에 상처받고 회피하는 아르테미스에게 ‘휘청거리고 혼란스러운 사랑도 다 삶의 일부’라 말하고, 오랜 토론 끝에 세 여신은 어떤 관계 속에서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혼자만의 변화로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하다면 주변과 사회까지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질문을 던지며 남성으로서의 시선을 거두어내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아르테미스가 대화를 이어나가려던 그때, 헤르메스가 등장해 제우스의 불륜 소식을 전해준다. 지금껏 열심히 이야기하던 헤라는 다시 여자들에게 복수하러 가버리고, 아프로디테는 다시 헤르메스와 사랑을 나누는 데에 집중한다. 아프로디테는 아르테미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만, 헤르메스의 품에 안겨있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에 아르테미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떠난다.
 
분명 유의미한 대화를 나누던 여신들이 남성 한 명의 등장만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남성지배적인 사회구조가 얼마나 견고하고 오랜 기간 축적되어온 권력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여신들끼리의 토론에서 가장 강하고 직설적으로 본인의 주장을 드러내던 아르테미스도 헤르메스가 그 자리에 끼어들고, 그에 대한 헤라와 아프로디테의 반응이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아 보이자, 입을 다물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세 여성의 토론에 남성이 개입함으로써 또다시 여성은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잃은 것이다. 만약 남성들의 토론에 한 여성이 끼어들었다면 그 토론은 중단되었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야기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변화의 불씨는 더 큰 불길로 발전하지 못하고 사그라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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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 여신이 제자리로 똑같이 돌아간 것처럼 보여도, 이 열띤 토론 후에 맞는 각자의 일상은 조금은 다를 것이다. 한 번의 토론으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연극에서의 이야기는 중단되었지만, 어쩌면 그 이후에 세 여신은 전보다 더 많이 교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성들 간의 연대에서 비롯된 힘이 생길 것이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로 세 여신의 치열한 토론에 함께한 관객들 또한 각자 변화의 불씨를 안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아 보이는 현실이지만, 이런 연극이 있기에 우리는 조금씩, 점점 더 많은 변화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또 언젠가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가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페미니즘 입문극 -


일자 : 2020.02.29 ~ 2020.03.29

시간
평일 8시
주말 3시
월 쉼

장소 : 콘텐츠 그라운드

티켓가격

전석 40,000원

  

주최/주관

창작집단 LAS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창작집단 LAS
 
 
창작집단 LAS는 즐겁게 공연을 하기 위해 모인 젊은 예술가들의 집단입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력으로 무대화하려 노력합니다. 이는 연극, 문학, 무용, 음악, 미술, 영상 등 어느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 한층 진보된 무대언어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이 시도가 관객들에게 생소하고 일방적인 소통방식으로 다가가는 것보다 이성적, 감성적인 공감으로, 신선한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놀이'에서 출발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연극은 놀이다'라는 개념을 잊는다면 우리가 시도하는 과정들이 결코 즐거워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즐겁게 공연하는 창작집단 LAS입니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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