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15. 나 하나쯤은 기생충을 싫어해도 되지 않을까?

글 입력 2020.03.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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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기생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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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 하나쯤은 기생충을 싫어해도 되지 않을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작년 5월,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국제 장편 영화상,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까지 거머쥐면서 영화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는 모두 누렸다.

 

나는 2019년 5월 30일 개봉 이후 몇 개월이 지난 최근에야 <기생충>을 보았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고 칸 황금종려상으로 작품성까지 입증됐으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 년 가까이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건 순전히 귀찮아서였다. 개봉 무렵 나는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영화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사이 <기생충>은 무려 1,028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작년 못 보고 놓친 개봉작들이 많았다. 내가 아무리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본 영화보다 안 본 영화가 훨씬 많다. 그런데 <기생충>이 언급될 때면 그 당연한 사실이 용인되지 않았다. 모두가 내가 당연히 <기생충>을 봤을 거로 생각했다.

 

영화의 아카데미 4관왕이 문화·예술계 이슈로 떠오를 때 사실 나는 별 감흥이 없었다. 얼마나 훌륭한 작품성을 지녔는지 모르기에 자랑스러워할 여지가 없었다. 기뻐하는 사람들에 동참하고 싶었지만, 단지 한국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뿌듯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화 애호가로서 <기생충>의 예술적 성취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인정해야 하는 의무감이 생겼다.

 

사람들이 내가 당연히 <기생충>을 봤을 거라고 여긴 것처럼 나도 내가 당연히 그 영화를 좋아할 줄 알았다. 예고편을 통해 확인한 영화의 톤이 내 취향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려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고 칸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4관왕이라는 부가적인 정보가 내 예상에 확신을 더했다.

 

드디어 뚜껑을 연 <기생충>은 과연 뛰어난 작품성의 영화였다. 러닝 타임 내내 나오는 상승과 하강 구조, 빠른 전개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신랄하면서 처연한 대사와 빼곡한 디테일까지. 왜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과 ‘천만 영화’라는 안 어울리는 두 개의 타이틀을 모두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별점을 매기려는데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분명 잘 만든 영화가 맞는데 높은 점수를 주려니 망설여졌다. 작품성과 상관없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불쾌함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기생충>의 줄거리와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알았던지라 그런 부류의 영화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내가 느낀 불쾌함은 여타 다른 영화에서 느꼈던 것과 결이 달랐다. 기분이 더럽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익히 알려졌듯이 <기생충>은 빈곤을 다룬 작품이다. 빈곤과 관련된 또 다른 영화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빈곤과 사회 복지 시스템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계급구조를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과장해서 부각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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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부유한 이선균, 조여정 가족과 가난한 송강호네 가족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제목에 걸맞게 가난한 이들은 부유층에 기생하면서 감히 신분 상승을 넘본다. 송강호네 가족이 속임수를 써 차례대로 이선균네 집에서 일자리를 얻는 중반부까지의 흐름이 그러한 점을 잘 나타낸다.

 

중반부까지는 영화가 지닌 블랙코미디 특유의 경쾌하면서 서늘한 흐름이 좋았다.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부유함과 가난함을 살리는 디테일도 감탄스러웠다. 그러나 가장 큰 변곡점인 지하실에 사는 진짜 기생충이 등장하는 부분부터 나는 이 영화가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영화의 특정 인물이 아닌 인물을 그런 방식으로 축조한 영화 자체가 불쾌했다.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에서 부유한 사람은 위선적이고 악하며 가난한 사람은 선량하게 묘사된다.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문법을 완전히 무시한다. 오히려 상류층을 일반적인 사람으로 묘사하고 하류층을 음흉하고 기이하게 묘사한다. 기택(송강호)과 충숙(장혜진)의 대사가 그 이유를 알려준다.

 

“그 집 사모님은 부자인데도 착해.”

“부자니깐 착한 거야.”

 

슬프지만 돈은 인간성까지 좌우한다. 이기적이고 예민하고 조급하고 비열해지는 등의 부정적인 성격이 빈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 뉴스 면에서도 돈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성도 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나도 돈 몇 푼 때문에 비겁해지는 경험을 자주 겪었다. 그렇기에 초반부 기택네 가족에게 속기만 하는 부유층이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속고 돈을 날려도 되는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짜 기생충, 가정부 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만은 그렇게 단편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영화는 비정상적인 삶, 박 사장(이선균)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심, 눈살 찌푸려지는 비주얼(얼굴이 아닌 옷차림과 머리, 표정 등 전반적인 것을 나타내고자 쓴 단어다.) 등 여러 요소로 그를 기괴하게 묘사하는 것에 집중했다. ‘감독이 바라본 빈곤층은 설마 저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아닐 것이다. 작품의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부유층과 빈곤층에서 내가 감정 이입할 대상은 당연히 빈곤층이었다. ‘나의 사적인 폭력’ 열두 번째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우리 가정은 정부의 복지혜택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빈곤층이었다. 시간이 지나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직장인이 되었고 나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서 어느 정도 자립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지만, 돈 몇 푼에 아쉬워하는 건 여전했다. 그러나 근세에게만은 결코 이입하고 싶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은 굉장히 충격적이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지하실에서 뛰쳐나와 기정(박소담)을 죽이고 그 모습을 본 부잣집 아들 다송(정현준)은 기절한다. 박 사장으로부터 ‘냄새난다’는 뒷말을 들은 기택은 근세의 악취에 코를 막는 박 사장을 보며 치욕감을 느끼고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한다. 영화는 안다. 부유한 사람이 너그럽고 가난한 사람이 추악해지는 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의 추악함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 사장네 가족이 뭘 잘못했다고 저런 파국을 맞아야 하지?’ 딱 한 가지 잘못이 있다. 사람을 아래로 보고 선을 긋는 태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랫사람이 선을 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박 사장 캐릭터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들의 선 긋기는 냄새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다송은 기택네 가족에게 똑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기정은 그 냄새를 반지하 냄새 즉, 가난의 냄새라고 말한다. 냄새난다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치욕스럽다. 특정 사물이 아닌 나에게서 악취가 풍겨 나온다는 걸 알게 될 때 나란 존재는 한없이 더럽고 부끄러워진다. 기택에게 살인까지 저지를 분노를 심어준 것도 결국 냄새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게 부유층이 파국을 맞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파국의 현장에서 그들은 분명 무고한 피해자였다.

 

약자가 열등감으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걸 보니 영화 <조커>를 봤을 때처럼 마음한 구석이 찝찝했다. 영화의 의도는 분명 약자의 악행을 유발한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묘사가 과하게 극단적일 경우 악행이 정당화되거나 약자가 타자화되는 위험이 있다. 관객은 사회 부조리 때문에 추악해진 약자에게 연민 대신 공포와 불쾌함만 느끼게 된다.

 

근세와 나는 다르다고 겨우 마음을 다스렸는데 영화는 기택까지 근세와 같은 인물로 만들어버렸다. 우발적인 살해 이후 기택은 근세가 살았던 지하실로 도망쳐 속죄하는 의미로 그곳에서 살아간다. 화려한 저택이 아닌 저 아래 지하실이 기택에게 맞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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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와 동일시되는 건 기택만이 아니다. 기우(최우식)를 창밖을 내다보며 밑에 가봐야 한다고 말하자 그에게 과외 받는 부잣집 딸이 (상류층의 파티가 진행 중인) 밑에 가봤자 뭐하냐고, 여기서 자기와 놀자고 말한다. 그 말에 기우는 그보다 더 밑이라고 답한다. 빈곤층이 갈 곳은 눈부신 지상이 아니라 어두운 지하다. 결국 영화는 상류층에겐 기택네나 근세네나 모두 똑같은 지하의 존재라는 씁쓸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런 메시지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취방을 자꾸 둘러봤다. 분명 이전까진 만족스러웠는데 박 사장네 저택을 보니 좁고 허름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일하는 동안에도 영화가 계속 생각났다. 어떤 영화는 감동을 남기고, 어떤 영화는 전율을 남긴다. 이 영화는 내게 박탈감을 남겼다.

 

만약 영화가 기택네 가족이 노력해서 성공하는 결말을 그렸다면 나는 더 강하게 분노했을 것이다. 가난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록 잔인하리만치 냉정한 계급 담론이 유쾌한 건 아니다. 그 잔인함이 기괴하게 묘사된 약자에서 나와서 더 그렇다.

 

오래전 봉준호 감독이 상류층이기 때문에 이 영화가 위선적이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의견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개인의 배경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감독의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내가 느낀 영화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상류층의 시선이었다.

 

앱 ‘왓챠’에서 본 영화평 중 봉 감독의 페르소나는 사실 부잣집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평이 유독 공감됐다. 다송은 제일 먼저 가난의 냄새를 맡고 거리낌 없이 그에 대해 말한다. 지하실에서 근세가 불을 깜빡이며 던지는 모스 부호의 메시지도 해석한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침략자에게 약탈당한 인디언을 유흥거리로 소비하는 다송의 태도와 영화가 빈곤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 평에 나처럼 공감된다는 댓글도 있었지만, 비판하는 댓글이 더 많았다. 감독의 의도를 왜곡하고 피해 의식이 점철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봉준호 감독이 어떤 의도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봉 감독의 인터뷰를 들으면 가난한 이에게 박탈감을 안겨줄 의도는 없는 게 확실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박탈감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나의 입장은 빈곤층이었고 빈곤층이 바라본 <기생충>은 한없이 불쾌했다.

 

오히려 영화의 그런 불쾌함이 빈곤과 계급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말을 들었다. 납득되는 말이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영화만큼, 혹은 영화보다 더 불쾌하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인식시키는 게 예술의 역할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를 매도하고 싶지 않다. <기생충>을 극찬한 평론가와 칸 국제영화제, 아카데미의 안목을 무시할 생각도 없다. <기생충>은 분명 잘 만든 영화다.

 

내가 진짜 비판하고 싶은 건 그 평에 달린 피해 의식이라는 댓글이었다. 영화에서 소수자는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흑인, 동양인, 성 소수자, 장애인 등을 약자의 위치에 놓고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이 나오면 당연히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내겐 <기생충>이 그런 영화였다. 소수자의 입장에서 남긴 비판을 ‘피해 의식’, ‘열등감’이라는 말로 일축하는 수많은 댓글을 보며 다시 한번 빈곤층을 대하는 이 사회의 폭력성을 실감했다. 자본주의로 인한 계급구조를 꼬집는 영화에서 오히려 빈곤층 관객이 소외되는 이 기현상에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떤 것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게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지녔다고 해도 말이다. <기생충>은 잘 만든 영화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를 싫어한다. 영화를 보는 안목이 없다고 말해도 좋다. 가난한 자의 피해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생충>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천만 관객을 넘었고 평단의 호평도 자자하고 영화가 받을 수 있는 명예는 모두 누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생충>에 열광하는 세상을 향해 나는 소심하게 허락을 구해본다. 나 하나쯤은 기생충을 싫어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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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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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ㄱㅎㅇ
    • 정말 잘 만든 영화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불편하고 마음이 답답했었는데 그 부분을 잘 정리하여 적어주신 것 같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1 0
  •  
  • ㅇㄱㅇ
    • 영화 내내 보는 찝찝함이 저만 있던게 아닌거같아서 공감합니다. 호평이 있으면 이런 비평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간만에 좋은 리뷰 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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