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영화]

글 입력 2020.03.06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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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불안을 뚫고 뮤지컬 <레베카>를 보고 왔다. 뮤지컬 <레베카>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동명 영화 <레베카>(1940)를 뮤지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뮤지컬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역시나 '댄버스 부인'이다. 영화에서 서늘함 아래 들끓는 집착과 광기가 뮤지컬에서는 보다 직접적이고 격정적으로 노래를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번 글은 뮤지컬<레베카>가 아니라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레베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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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고아인 주인공(Joan Fontaine)은 반 하퍼 부인의 말동무로 고용되어 몬테카를로의 호텔에 묵게 된다. 휴양지에서 만난 신비로운 남성인 '맥심 드 윈터'(Laurence Olivier)에게 반한 주인공은 결혼한 뒤 맨들리저택으로 가게된다. 맥심에게는 '레베카'라는 사별한 전 아내가 있었고, 맨들리 저택 곳곳에는 레베카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모든 흔적은 저택을 관리하는 '댄버스 부인'(Judith Anderson)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레베카의 이니셜이 새겨진 수건부터 주소록까지 저택의 안주인으로 레베카 이외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하다. 아름다움, 지성, 교양 모든 면에서 자신과 레베카를 비교하게 된 주인공은 점점 더 큰 불안에 휩싸인다.

 

*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게 유일한 아카데미 작품상을 안겨준 영화인 <레베카>의 특별한 점은 레베카라는 인물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이름조차 알 수 없지만 레베카의 존재는 그 실체가 없음에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주인공, 맥심, 댄버스 부인 모두 레베카를 생각하지만 레베카에게 지닌 감정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관객들 역시 레베카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의 배경이 맨들리 저택으로 변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레베카를 떨쳐낼 수 없게 된다. 히치콕 감독은 레베카라는 인물을 통해극을 이끌어 가지만 그의 실체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주인공의 불안은 그 실재하지 않는 인물에 의해 점점 극대화 된다. 사실 불안의 실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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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버스 부인의 집착과 광기는 레베카를 계속해서 극 안으로 끌어들이는 중요한 요소다. 레베카의 방은 어제까지 쓰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다. 주인공에게 방을 구경시켜 주며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떠올리며 그와 보냈던 추억들을 되짚는다. 댄버스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주인공이지만 우리는 레베카의 머리를 빗겨주는 댄버스 부인을 보게 된다. 맥심이 자신의 범행을 밝히며 오두막의 빈 공간을 비출 때 역시 레베카의 환영을 보게 된다. 인물이 없는 빈 공간을 연속해서 비춤에도 불구하고 레베카라는 인물이 연기를 하고 있는 듯 생명력이 느껴지고 서스펜스가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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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하는 요소는 연출도 있지만 주인공의 심리 변화 역시 그 중 하나다.


아버지를 여의고, 그럴듯한 재능이 없어 스스로 위축된 주인공의 직업은 반 하퍼 부인의 말동무였다. 부유한 계급의 비위를 맞추고 시간을 보내주며 돈을 받는다. 맥심과의 결혼생활도 사실 별로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가지 못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모든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은 사실 불안하다. 스스로 삶의 기반을 다지지 못한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약하고 불안정한 주인공에 이입하며 불안을 느끼게 된다. 휴양지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고 행복한 초반부를 지나 맨들리 저택에 온 주인공은 불안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주인공은 자신을 끊임없이 레베카와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댄버스 부인 앞에서 무력하게 휘둘린다.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적 우위에 있는 레베카에게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불안감은 극대화된다.


영화의 마지막 30분 동안 레베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다. 맥심은 레베카를 증오했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충격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다. 주인공의 불안은 사실 맥심의 알 수 없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때때로 불안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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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레베카보다 뒤떨어지지만 주인공은 순수함과 정숙함 때문에 맥심의 마음을 얻는다. 레베카의 영리함과 난잡한 성생활은 주인공의 순수함과 정숙함에 대비되고 맥심의 행위를 정당하게 만든다.


맥심의 불안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과 삶의 주도권을 레베카에게 빼앗기는 것이었다. 맥심은 레베카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 주도권도 되찾는다. 하지만 결국 레베카는 이겼다. 모든 인물은 레베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아마 맨들리의 화재까지도 말이다. 레베카는 실체 없는 불안에 떨지 않았을 것이다. 암이라는 구체적인 죽음의 궤적조차 스스로 바꿔놓을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바라는 여성성에서 벗어난 사악하고, 욕망을 드러내고, 집착하는 캐릭터는 언제나 처벌받는다. 당시에는 당연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20년에 이 작품을 보는 나는 레베카나 댄버스 부인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주인공보다는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뮤지컬에서도 '댄버스 부인'이라는 캐릭터에 방점을 찍은 것이리라.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는 불안감과 내 자리가 없다는 불안감,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불안감에 떨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히치콕의 작품을 본다.

 

*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고전 명작인 1940년 <레베카>는 저작권의 문제 없이 유튜브에서도 즐길 수 있으니 한 번씩 보셨으면 좋겠다.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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