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I)’라는 여성 인물의 묘사가 아쉬운 이유 [공연예술]

글 입력 2020.03.0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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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강의 과제로 뮤지컬 작품 속의 여성 캐릭터에 대한 소논문을 쓴 적이 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와 루시를 통해 이분법적이고 왜곡된 여성상을, <프랑켄슈타인>의 줄리아와 까뜨린느를 통해 여성 캐릭터의 도구화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당시 내가 관람했던 많은 뮤지컬의 여성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분석 대상으로 어떤 캐릭터를 선택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레베카>의 주인공 ‘나(I)’라는 캐릭터에 대해 ‘그 정도면 양호한 여성 캐릭터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I)’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이고, 적어도, 어떤 여성 캐릭터들처럼 성적으로 도구화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극 중 ‘나(I)’의 감정선은 대부분 남편인 막심에 의해 좌우되고, 그녀의 성장은 사실상 막심의 아픔을 사랑으로 보듬어주기 위한 성장인 것처럼 그려진다.
 
어제 나는 여섯 번째 <레베카> 관람을 하며 생각했다. 이 정도 서사면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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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의 ‘나(I)’는 불의의 사고로 아내 레베카를 잃은 막심 드 윈터와 사랑에 빠져 그의 저택인 맨덜리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나(I)’는 교양 있고 아름다웠던 레베카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면서도 안주인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맨덜리의 모든 것은 여전히 레베카에게 깊게 물들어 있었고, 남편인 막심마저 레베카와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이성을 잃고 ‘나(I)’에게 화를 낸다.
 
‘나(I)’는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자신에게 화를 내는 막심을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걱정하고 사랑하며, 레베카를 잃은 슬픔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대신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I)’가 슬픔에 빠져 막심의 친구 프랭크에게 찾아가자 프랭크는 그녀를 위로한다. “겉모습만 예쁜 여자는 어릴 때야 좋지만, 남자들이 원하는 건 당신과 같은 여자.” 라고. 친절함과 다정함을 가지고 끝없는 사랑을 주는, 당신과 같은 여자.
 
이는 ‘나(I)’가 맨덜리 저택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으려는 욕구를 가진 캐릭터라기보다는 그저 막심의 사랑을 갈구하는 납작한 캐릭터인 것처럼 그려낸 가사라고 생각한다. 너무 아쉬운 점이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나(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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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I)’는 막심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도록 보듬어준다. 막심의 누나 베아트리체와의 듀엣 넘버 가사처럼, 그가 우울할 땐 위로하고 흥분할 땐 진정을 시켜주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사랑에 헌신하는 남성 캐릭터가 있듯 사랑에 헌신하는 여성 캐릭터도 있는 것 아니냐고. 왜 굳이 꼬아서 생각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수많은 캐릭터 중 사랑에 헌신하는 캐릭터가 존재하기도 하는 것과, 사랑에 헌신하는 것이 어떤 '이상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게 다르지 않은가.
 
나는 되묻고 싶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위협적으로 화를 내는 아내를 무서워하면서도, 그저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슬픔을 잊을 수 있도록 훌륭한 남편 역할을 해내려는 모습으로 그려진 남성 캐릭터를 본 적이 있는지.
 

 

여자는 사랑의 힘으로 강해지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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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I)’와 베아트리체는 노래한다. 여자는 사랑을 위해 싸울 때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의 힘을 가진 여자들이라고.
 
언뜻 들으면 여성이 강한 존재임을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그녀들의 강인함을 오직 사랑을 위한 것처럼 그려낸 가사가 불편하다. 모성애에 대한 과도한 숭배적 인식이 불편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누군가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라는 문장을 사용하면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우습게도 반대 성별에 대해서는 몹시 익숙한, 명언처럼 쓰이기도 하는 문장이다.
 
여자는 어머니가 아니어도, 그리고 사랑 없이도 그 자체로 강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남자와 같이,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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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헌신하는 ‘나(I)’의 모습을 특정 여성 캐릭터의 특성으로만 여기기엔, 그것은 아직 뮤지컬 장르에서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존재한다. 성장하고 변화하는 여성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에도 뮤지컬 <레베카>에서 ‘나(I)’를 그려낸 방식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작품 속에서 그녀가 사랑만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처럼 나타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뮤지컬 장르 전체에서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히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여성 캐릭터도 다수 존재하며, 최근 다양한 여성 서사에 대한 논의도 꽤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충분하다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캐릭터의 성별에 따른 불균형이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을 품은 여성 캐릭터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더 다양한 여성 서사의 발전, 그로 인한 뮤지컬 장르의 변화를 기다리고, 기대해본다.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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