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개껍데기는 어디에나 있다 :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 #3 [여행]

누군가가 그랬다. 삶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비와 함께 춤 추는 것이라고.
글 입력 2020.03.04 18: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일차 - 28.5km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Villadangos del Paramo ▶ 아스토르가 Astorga

 

 

 

비와 함께 춤을 추다



KakaoTalk_20200304_004517052.jpg

 

 

해가 떠오르자 알베르게의 사람들은 오늘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걸어 지친 순례자들은 새벽까지 깨어있지도, 잠을 설치지도 않고 깊은 수면을 한다. 추운 밤을 얇은 침낭으로 버텨낸 몸은 약간의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도 잠은 잘 잤는지 두 팔다리는 이토록 가벼울 수 없다.


창밖엔 서리가 내려있지만 햇빛이 따스해 보인다. 알베르게 할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마을 끝 한 나무에 앉아있던 큰유리새도 안녕, 종소리가 아름답던 교회도 안녕. 첫 마을이었기 때문인지 하룻밤새 정이 들어버린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맑고 시원한 공기와 흙을 밟는 내 발자국 소리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KakaoTalk_20200304_011519134.jpg

오스삐딸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 마을의 중세식 다리

 

 

매캐한 도로를 따라 걷는 게 신물이 날 때쯤, 더 좁은 길로 들어서라는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제법 순례길 다운 갈색 길이 나 있다. 조금씩 걸음을 내딛자 푸근한 길은 다리로 이어졌는데, 다리와 다리 너머로 보이는 마을은 중세시대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듯 했다. 아직 아침 열 시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으니 조금 일찍 쉬기로 하자. 따사로운 햇볕에 앉아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며 챙겨온 간식을 꺼냈다.


어디선가 딱! 딱!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나길래 쳐다보았더니 한 순례자가 지팡이를 힘차게 내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국인이시죠? 아스토르가로 가세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그가 먼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자기도 거기로 간다며 다시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간다. 난생 처음보는 사이의 대화라기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지만, 우리 모두 같은 길을 걷는 신세일테니, ‘거기서 보겠네요. 그때 봐요.’라는 뜻을 주고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KakaoTalk_20200304_004858925.jpg

 

 

점점 하늘이 새까매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 멈춰서 서둘러 판초를 꺼냈다. 가방을 포함한 온 몸을 뒤덮고도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판초가 참 든든하다. 꿉꿉한 몸이 싫어 비 오는 날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이따금 젖을 걸 각오하는 날에는 비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길 위의 나는 비에 지워질 메이크업도 하지 않았고, 비에 젖을 걸 걱정할 만한 예쁜 옷도 입지 않았다. 강한 비바람에 판초가 낙하산이 될 지경이었지만, 「쇼생크탈출」의 주인공처럼 단비를 맞듯 팔을 더 힘차게 내저으며 걸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삶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비와 함께 춤 추는 것이라고.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에 치일 땐 이 말이 고깝게만 느껴졌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서만큼은 더없는 진리처럼 들린다. 판초 본전을 뽑았다는 세속적인 마음은 조금 깊숙이 숨겨놓고, 역경의 모습으로 가장한 댄스 파트너와 함께 길을 걷는다.

 

  

KakaoTalk_20200304_011519985.jpg

 


아까 마을에서 보았던 순례자와의 재회는 더 빨리 이루어졌다. 비바람이 걷히고 마을로 들어섰는데, 바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그와 마주쳤다. 그렇게 직장을 때려치고 까미노에 오른 한국인, B와 동행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노란 화살표를 찾고, 잠시 쉬기도 했다. 걸으며 말을 하다보니 숨이 차기도 했는데, 숨이 차는 쪽은 거의 B였다. B는 말수가 많았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걸맞게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낯선 것 한가득인 공간에서, B는 익숙한 사람에게도 좀처럼 꺼내놓지 않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직장을 그만둔 이유,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 헤어진 이야기, 자기가 아팠던 때. 나는 B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순례길은 그런 곳인가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선뜻 동행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얕은 관계의 사람일지라도 가장 속 깊은 얘기를 늘어놓는다. 그런 그의 이야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길 위의 일이기 때문이겠지.

 

“그냥 걸어보고 싶어서요.”

 

어떻게 오게되었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답지 않게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B도 나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답답함에 이 행선지를 택한 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사람들의 길


 

KakaoTalk_20200304_011521118.jpg

 

 

순례길하면 길에서의 시간을 주로 떠올리지만, 사실 순례자들은 알베르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몸을 씻고, 옷가지를 빨고, 저녁을 먹고, 내일 떠날 채비를 하는 곳이 바로 알베르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조용하게 순례를 하고 싶다 한들, 알베르게 안의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오기 마련이다.

 

아스토르가는 꽤 큰 도시여서, 각기 다른 곳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이곳으로 몰렸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샤워를 하고 나오니 알베르게 안은 꽤 북적였다. 요리를 하고 있는 순례자, 빨래를 하고 있는 순례자,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순례자도 보였다. 큰 숙소에 세명 남짓 있던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풍경, 그 사이로 어느새 도착한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였다. 오늘도 대충 끼니를 때우려는 걸 눈치채고서 또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빈손으로 앉아있긴 싫어서 근처 마트에 들러 과일과 치즈를 넉넉히 사 가지고 왔다.

 

 

KakaoTalk_20200304_011521250.jpg

 

 

할머니 할아버지와 막 저녁을 먹으려던 찰나, 아까 벌건 대낮부터 와인을 마시던 순례자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턱수염이 잘 어울리는 남자로, 가늠하긴 어렵지만 나이는 서른 후반정도 되어 보인다.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데, 스페인 억양이 짙게 묻어난 영어였다.

 

그의 이름은 루벤. 마드리드에서 온 그는 이번이 열 번째 순례라고 한다. 열 번이라니. 그의 말씨에 자신감과 연륜이 가득 묻어있었기 때문에, 그가 득도한 신선, 혹은 게임 NPC 같다는 이상한 상상을 해 본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루벤은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한국인에게는 다른 동양인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며, 순례길에서 만난 한국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까미노를 걸을 때 만난 한국인은 루벤에게 자신을 한국에서 꽤 유명한 가수라고 소개했다고 하는데, 루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또 기억에 남는 한국인은 내 또래의 어린 여자였으며, 루벤은 그녀가 주는 에너지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NPC 루벤이 퀘스트를 하나 준 것 같달까, 괜스레 또래라고 하니 나도 그 분처럼 밝게 순례를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다.

 

루벤은 노부부와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해서 기꺼이 통역을 자처했다. 루벤의 영어는 유창하지만 쉽고 직관적이었고, 할아버지 역시 감탄과 우스갯소리 위주로 하셔서 나름대로 수월한 대화가 오고갔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여기 앉은 모두가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KakaoTalk_20200304_011520011.jpg

아스토르가의 Santa Maia 대성당

 

 

동네 구경만 잠시 하려고 밖에 나섰는데, B와 아까 숙소에서 보았던 또다른 한국인 사이먼이 내 뒤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우리에겐 ‘내일을 위해 잠을 잘 자야 한다’는 맥주를 마실 공통된 명분도 있었다.

 

 

KakaoTalk_20200304_011740750.jpg

B가 그려준 나

 

 

평화롭고 고요한 순례길을 상상하며 길에 올랐던 것 같은데, 오늘은 하루의 많은 부분을 재잘대며 보냈다. 내가 원한 순례가 어떤 것인지 아직도 막연하지만, 꼭 고독한 걷기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무료한 일상이 반복될 때, 어려움이 있어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얕을 때, 외로움은 더 커졌던걸까. 외로움을 다스리러 온 것인데, 길은 외로울 틈을 주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경험, 새로운 풍경 투성이다. 그러나 이 낯선 것들이 조금도 의심스럽지 않다. 이유없는 경계는 벌써 사라져버렸다. 길과 사람만 놓여있는 원시적 공간에서 사람들은 모두 다 조금씩 솔직해지나보다. 나도 순례를 마칠 때 즈음이면 나를 둘러싼 수많은 허상들을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내일은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다.



[최예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