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글 입력 2020.0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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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말년과 주호민이 영화를 만들었다. 원작은 이말년 시리즈의 ‘잠은행’이다. 잠은행은 산더미 같은 업무 때문에 수면에 소홀했던 금봉수의 이야기다. 수면이 부족했던 금봉수는 잠은행에서 잠을 대출받는다. 그렇게 얻은 시간으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간다. 성과를 맛 본 금봉수는 성공을 위해 사채까지 써가며 잠을 대출 받는다. 복리는 대단했고 빚은 갚을 수 없을 지경까지 불어났다. 금봉수는 그때서야 잠이 든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잠은행에선 돈이 아닌 수면 시간을 빌려 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수면이 아니라 ‘시간’ 이다. 잠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그 시간만큼 더 깨어있을 수 있다. ‘아, 시간이 부족한데 잠을 좀 줄여야 하나’라는 절실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가치를 알 것이다. 금봉수는 그 소중한 것을 성공을 위해 쓴다. 금봉수에게 잠은행은 성공을 위한 어떤 것을 빌려 준다는 점에서 현실의 은행과도 같다. 다만 물질적이지 않고 목적 지향적이며 과정에서 조금의 자기계발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잠은행의 그것이 순수한 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잠은행의 영어 이름을 뱅크 오브 슬립이 아니라 ‘뱅크 오브 서울’이라고 지은 건 꽤나 감탄스럽다. 서울의 이미지는 역시 야근과 성공이다. 한국 근로자의 근무시간은 OECD 국가 중 2번째로 높다. 물론 이 기록 달성을 위해 서울의 근로자만 땀 흘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구와 사무실은 서울에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 취준생들이 서울에 밀집된 사무실 중 하나에 출근하고 싶어한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고는 하나 각종 편법과 어둠 속에서 야근 중인 이들이 있다. 각자의 목표와 성공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실히 피로와 야근, 이런 단어들은 잠보다 서울에 잘 어울린다.


그래서 박희순이 주인공을 맡은 것도 좋았다. 박희순은 앞선 의미의 서울에 가장 어울리는 마스크를 가진 배우다. 피로에 패인 피부와 적당한 다크써클이 빚어내는 억울함. 그리고 그 사이로 자꾸 새어나오는 짜증과 떨리는 음성. 정재영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짜증이 조금 덜하다. 박희순의 얼굴을 잔뜩 당겨서 찍은 포스터에서부터 ‘서울’의 느낌이 물씬이다. 믿고 싶지 않은 작화에 가려진 원작의 메시지도 박희순의 얼굴을 빌리면 선명하게 떠오를 것만 같다. 과장 조금 많이 보태서 잠은행이 뱅크 오브 서울이 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박희순의 몫이다.


잠은행 원작의 끝은 이렇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파홈에게 결국 필요한 건 그가 묻힐 6피트의 땅이었다. 적게 자기를 강요하는 이 시대에서 과연 사람은 얼마만큼의 잠이 필요할까.] 이 영화 역시도 6피트의 땅, 아니면 66평 짜리 자가 혹은 더 많은 성공과 재산을 바라보며 서울의 창작 노동자들이 그들의 밤을 쏟아 부은 결과물일 것이다. 조금은 그들의 노고를 기리면서 좀 이따 잠은행 봐야지.

 


[전재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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