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과 편견은 자유가 아니다: 우리의 인지오류

글 입력 2020.02.2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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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오해는 자유가 아니다



“자 어깨를 너무 올리면 안됩니다.” 그는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너무 힘들어요”라고 앓는 소리를 내뱉으면 그가 도와줬다. 나의 목표를 달성한 날이면 같이 환하게 웃어줬다.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옆에서 지켜봤다. “어제 뭐 드셨어요?” 내 건강까지 물어보는 사려 깊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 사적인 부분까지 관심을 보였다. 그럴 때면 “그냥 뭐….”라며 나의 눈을 다른 곳을 돌리곤 입가에 터지는 미소를 숨겼다. 짧은 만남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는 “내일도 오셔야 해요” 눈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언제나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우리는 따스한 공기로 둘러싸였다. 나의 봄날은 코앞이었고, “그린라이트다!”라고 속으로 확신했다. 내가 연애 경험 한 두 번 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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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헬스장에서 개인 트레이닝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공적 관계를 사적 관계로 착각해 내 마음에 봄날이 찾아오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를 페이스북을 추적해 뒷조사를 시작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말이다. 미리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어야 본격적인 만남 후에 내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 찾은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마치 옛 연인이 새로운 사람 만난다는 소식을 접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여자와 찍은 셀카가 수십 장 올려져 있었고, 댓글은 하트로 도배돼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얼굴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헬스장은 분명히 봄기운으로 따뜻했는데, 실제는 우리의 헬스장이 아니라 나만의 헬스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착각은 수치스러웠다. 헬스 할 때 쓰는 여러 기구들을 다루는 방법을 몰라 사용법이나 자세를 알려주는 직업정신 투철한 트레이너를 완벽하게 오해했다.

 

그래도 착각과 오해는 인간관계에서 누구나 가끔은 할 수 있는 일상의 경험이다. 특히 누군가 좋아하게 되면, 상대방에 소소한 행동들에 다 의미부여하면서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은 인지심리학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 때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 (Confirmation bias)을 갖고 있다. 자신의 믿음에 불리한 증거들을 보면 머릿속에서 제거하려고 한다. 비슷한 인지 오류로 아포페니아(Apophenia)라는 개념이 있다. 서로 무관한 현상들 사이에 의미, 규칙, 연관성을 찾아내서 믿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별들을 임의로 이어 별자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창조하거나 멕시코의 빵인 또띠아의 불에 탄 얼룩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 등이다. 헬스장 트레이너가 무거운 헬스 기구를 들어주거나 다음 트레이닝 날짜를 잡기 위한 약속을 하는 행동들을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으로 연결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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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나 혹은 인간만 이런 착각하지 않는다. 동물들도 비슷하게 무언가를 판단할 때 깊은 고찰과 맥락적 사고는 하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동물 세계에서 나타나는 착각과 오해는 내 경우처럼 수치스러운 것을 넘어서 안타까울 지경이다. 두꺼비의 경우가 그러하다. 봄이 되면 두꺼비가 겨울잠에서 깨어 번식을 위해 모여든다. 번식장소에는 일반적으로 암컷보다 수컷의 마리수가 더 많아 수컷끼리의 경쟁이 심하다. 수컷은 강력한 앞다리 힘으로 암컷을 끌어안아야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수컷끼리 앞다퉈 끌어안다가 웃지 못 할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급한 마음인지 수컷 두꺼비는 때때로 종이 다른 황소개구리를 암컷 두꺼비로 착각하고 만다는 것이다. 황소개구리는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헤어나지 못하고 압사당하고 만다. 즉 헬스장에서 섣부른 판단 한 내가 바보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 같아 안도감을 느꼈다.


이처럼 사소한 착각이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헬스장에서 겪은 나의 오만함(‘내가 연애 경험 꽤나 있으니 딱 보면 다 알지’) 때문에 그의 투철한 직업 정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거의 망상을 한 셈이었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혼자 쪽팔리고 만 것이 아니라 착각이 오해를 거쳐 갈등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그 트레이너의 페이스북에서 현실을 알고 나서도 이를 부정하고 모욕당했다고 적반하장 태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인정하기 싫은 나는 트레이너에게 책임을 돌렸다. 난 곧바로 헬스장 매니저한테 환불을 요청했다. 트레이너가 없는 시간에 나는 헬스장에 찾아가서 “아니 이 트레이너 너무 예의 없어서…. 더 이상 피티 못 받겠어요”라고 분개했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들은 트레이너는 영문도 모른 채 “트레이너로서의 임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장문의 사과 문자를 남겼다. 난 답장을 안 보냈다. 부재중 전화까지 왔다. 난 받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국 착각과 오해에 따른 책임을 짓지 못해 상대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성장할수록 심해지는 편견



인간은 성장할수록 여러 가지 인지오류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편견이야 말로 어른이 될수록 커지게 되는 것 같다. 


‘어른들의 편견’이라고 하면 어렸을 적 프랑스 동화 《푸른 개》(나자 지음)가 떠오른다. 주인공 소녀 샤를로뜨는 어느 날 자신에게 다가온 푸른 색 털과 초록색 눈을 갖고 있는 커다란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샤를로뜨는 초코빵을 나눠주면서 다가섰고 푸른 개는 매일 저녁 소녀를 찾아왔다. 둘이 매우 친한 모습에 어느 날 샤를로뜨의 엄마가 “엄마는 네가 그 개와 노는 거 싫다. 누구네 집 개인지도 알 수 없고, 병에 걸렸을지도 몰라. 물리면 큰 일이야. 어쨌든 엄마는 그 개를 우리 집에 들여놓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둘의 우정을 크게 반대한다. 독자도 강렬한 푸른 색 털을 가진 커다란 개 삽화를 보게 되면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낯선 대상에 대해 실제보다 더 부정적이게 판단하기 마련이다. 동화 속 샤를로뜨 엄마의 염려가 흔히 볼 수 있는 어른들이 갖는 편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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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휴리스틱(heuristics)이라는 심리 오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휴리스틱이란 정보나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할 때, 인간이 빠르게 사용할 수 있는 어림짐작이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휴리스틱은 유용할 수 있지만 사람 관계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은 것 같다. 내 한 지인의 이야기다. 그는 다섯 살 연상의 여자 친구를 일 년째 만나고 있다. 그가 그의 어머니께 여자친구를 소개하고 싶어하지만 그의 어머니께서 만나지도 않은 채 마음에 안 드신다고 거절하셨다고 한다. 이유는? 뻔하다.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나이 하나로 사람 전체를 판단 내리신 예시다. 비논리적이고 말이 안 된다고 콧방귀를 뀔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도 이 비슷한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심지어 논리성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휴리스틱이 나타나는데 말이다. 상대 과학자가 졸업한 학교,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소속한 연구기관으로 서로를 판단한다. 심지어 박사 학위 취득한 곳이 유럽인지 미국인지도 중요한 요소다. 사실 과학자가 과학자를 평가할 때 그 과학자의 ‘연구’만이어야 한데 말이다.

 

우리가 갖는 편견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성의 동물: 파국적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인간의 심리》(더글라스 T. 켄릭, 블라다스 그리스케비시우스 지음)에서 저자는 동화 속의 어른들이 갖는 편견이라는 감정적 추론이 진화적 시각에서는 현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과 질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신은 낯선 외부인에게, 이상한 냄새에, 병자의 모습에 과민 반응을 보이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로 인해 간혹 편집증이나 건강 염려증이 생기지만, 그래도 순진하게 방심하고 있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낯선 사람의 재채기를 통해 치명적 바이러스를 한 바가지 얻어가는 사태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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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성급한 판단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논리적 추론이나 사실보다는 경험과 직관에 의존해 ‘생각의 지름길’을 따르는 경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억측이 맞아 떨어지면 “그럼 그렇지. 내가 나이가 몇인데, 척보면 척 알지”라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 경우 확증편향이 강해져 기존 생각과 신념이 확고해진다.

 

휴리스틱 혹은 편견은 진화 혹은 뇌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이전 경험과 직관을 최대한 제쳐 두고 편견 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안 그러면 나와 헬스장 트레이너, 샤를로뜨와 푸른개처럼 관계가 멀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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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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