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비밀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2016년作)
글 입력 2020.02.20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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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 “네?”

“아, 되게 미인이시네요.” / “고맙습니다.”

“혹시, 전화번호.......” / “네?”

“저, 전화번호.......” / “크게 말씀하세요.”

“전화기 좀 쓸 수 있을까요?”

- 이승기’s <연애시대>(feat.Ra.D) 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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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을 하는 ‘여자’가 하루 동안 거짓말을 하는 ‘남자’들을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인 걸까. 늦여름 서촌의 어느 날, 배우지망생인 ‘은희’는 하루 동안 일본에서 온 소설가 ‘료헤이’, 현 남자친구 ‘현오’, 전에 만났던 ‘운철’을 모두 만난다. 얽히고 설켜 꼬일 때로 꼬인 관계 속에서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걸까? 혹은 삶에 관한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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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게 흔들리던 화면을 기억한다. 남자는 열심히 카메라의 작동법을 가르쳐주지만 여자에겐 내용이 쉽사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카메라를 만지는 남자의 손보다는 그의 얼굴을 향해서 그녀의 시선은 움직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여자는 짧은 시간 동안 온 마음으로 떨고 있었다. 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이야기이다.

 

김종관 감독은 전작인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디테일한 마음의 기척들을 <최악의 하루>에서도 고스란히 가져와 애정 어린 손길로 다룬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동감 넘치는 감정들을 카메라는 매순간순간 아름답게 담는다. 서로의 순간을 요약해주듯 포개어지고 또 따로 이어지는 두 인물의 에피소드는 사랑과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응시하고 끌어안으려는 감독의 시선처럼 따스하고 동시에 신선하다.

 

한예리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로 스크린을 넘어 우리에게 온다. 새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칠하듯 그녀는 영화에 특유의 분위기를 채워 넣는다. ‘료헤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산뜻한 매력으로 시종 들떠있다. ‘현오’를 만났을 때에는 발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독설을 쏘아붙일 줄 안다. ‘운철’에게 그녀는 가라앉아있고 심지어 가련해보인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물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헤어스타일을 묶거나 푸는 방식으로 바꾸며 사용하는 언어 또한 다르다(료헤이와는 영어를, 현오에겐 반말을, 운철에겐 존댓말을 사용한다). 권율과 이희준은 서로 정반대의 지점에서 우리 주변의 흔하디흔한 지질한 남자의 모습으로 분하여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와세 료’는 대책 없고 무모한 이 영화에 든든한 중심과 포근한 외투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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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하루>를 보고나면 그리스 로마 신화의 ‘프시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프로디테의 질투를 사는 바람에 그녀는 아무도 청혼하지 않는 저주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한순간의 실수로 프시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에로스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조건으로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프시케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사랑은 무너진다. 진실에 대한 집착이 한 사랑을 망가뜨린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 안에서도 거짓말은 (심지어 더)난무한다. ‘은희’는 만나는 남자들에게 맞춰 자신을 연기한다. ‘현오’는 너를 위한다면서 사실은 자기밖에 모른다. ‘운철’은 이혼이 아닌 불륜이었다는 사실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긴다. ‘료헤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편집자의 거짓말로 약속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출판기념회에 온 두 사람은 그의 팬을 가장한 나들이객이다. 하물며 그의 직업조차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소설가’이다. 하지만 그 모든 하루가 ‘거짓말’이었다고 해서 그 거짓말이 가져오는 설렘도 거짓이 되는 것일까. 영화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걸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닐 거예요. 진짜가 무엇일까요.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저 앞에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있다. 가능하면 그/녀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싶다. 내 취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나는 ‘나’를 숨기고 그/녀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낸다. 설령 연애가 아니더라도 좋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니까. 그래서 거짓말의 원인은 거짓된 마음이 아니다. 어떤 거짓말은 솔직함의 간절함이 빚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연애란 결국 거짓말 놀이이다. 거짓말은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연인들은 그 판타지를 소비한다. 다시 말해 연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다. 의미보다 맥락이 연인에게는 더 중요하다. 때문에 서로에게 건넸던 말의 의미와 진실을 파헤치는 순간 사랑은 병들기 시작한다(그래서 ‘운철’은 영화 내내 진실보다 진심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굶주려 죽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소화불량으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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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영화는 훌쩍 비상한다. 서로의 맴돌던 감정과 겹을 이루던 긴장은 몽롱해지고 꿈결처럼 남는다. 여자는 엉켜버린 관계에 망연자실하고, 남자는 불현 듯 마주한 자기모순에게 말을 잃는다. 쓸쓸한 밤은 길었던 낮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동시에 낮 또한 밤의 결과물이다. 12시가 지나면 타이머와 함께 모든 건 ‘0’으로 리셋 된다. 이젠 내일의 밤이다. 어제는 중요하지 않다. 어제의 밤은 내일의 낮을 만들지 못한다. 내일의 밤이 내일의 낮을 만든다. 약속은 끝났어요. 은희는 그렇게 자기만의 12시를 만들었고, 주문처럼 해피엔딩을 다짐한다.

 

아마도 밤길을 걷는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애에는 의미보다 맥락이 더 중요하다. 서로가 내뱉은 말의 의미가 무엇을 향하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의 말이 섞여 들어가는 그 풍경이 더 중요하다. 거짓말로 시작한 연애는 그 거짓말이 들키면 끝이 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끝낸 그 거짓말로 다시 사랑을 시작한다. 그 거짓말이 다시 이별이 불러올지는 몰라도, 어쩌겠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게 바로 연애의 비밀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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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또 무슨 할 말 있어요?" / "예, 제가 진짜 할 말이 있는 데요......."

"뭔데요?" / "아, 저기......."

"우리 사, 사... 아니 우리 연애, 연........ "

"우리 연애하자구요?"

- 이승기’s <연애시대>(feat.Ra.D) 가사 中 -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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