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칼더로 가득한 곳에서 느낄 수 없던 칼더, 알렉산더 칼더전

글 입력 2020.02.14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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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 때는 전시 기획자를 꿈 꾼 적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전시들을 보면 볼수록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내가 전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우라를 가진 수많은 개별 작품들이 모여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전시 그 자체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좋은 작품들을 잘 데려온 전시들과 구성이 좋은 전시 중에서 나는 어떤 전시를 선호하나. 알렉산더 칼더전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구성이 좋은 전시를 더 선호한다. 개별 작품들이 주는 영감은 너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가 좋은 전시라고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좋아한 공학 예술가, 알렉산더 칼더



칼더는 ‘예술사를 바꾼 공학도’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공학도인데다가 제도공, 엔지니어, 도색동 등의 직업을 거치면서 본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여기서 칼더가 가장 집중한 것은 ‘움직임’이다. 아무래도 공학도로서 물체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공부했던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그림에서도 움직임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된 듯하다. 그리고 그림에서 이 움직임을 포착해내기에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드로잉이다. 움직이는 물체에서 그 순간을 잡아내어 종이에 붙잡아 두는 것. 그렇기에 자연스레 칼더의 초반 작품은 드로잉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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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에 대한 칼더의 관심은 ‘칼더의 서커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칼더의 서커스는 정말 공학도이자 예술가인 칼더였기에 가능했던 작품이다. 철사, 가죽 천 등 다양한 재료들로 서커스 단원들의 움직임을 재현해낸 칼더의 능력은 정말 혀를 내두를만 하다. 전시 공간은 칼더의 서커스 영상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인형들을 만들고 또 그 움직임을 계산해서 조작하는 칼더의 모습에서 후에 칼더가 모빌을 만들 때 그 구조를 어떻게 고안했을 지를 엿볼 수 있었다. 칼더의 서커스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움직임에 집중했던 예술가였기 때문일까. 몬드리안의 작업실에서 칼더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당시 몬드리안은 예술적인 실험을 위해 직사각형 색깔의 종이들을 작업실에 계속하여 배치했는데, 이것이 칼더에게 엄청난 감명을 준 것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공간이었다.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빛이 들어왔고 창문 사이에 위치한 벽에는 실험적인 스턴트와 직사각형 모양의 색칠된 판지가 달려 있었다. 나는 몬드리안에게 이 직사가형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게 하면 재밌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내 그림들은 이미 아주 빠르거든.’ 이 한 번의 방문으로 나는 매우 놀랐고 뭔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추상’을 그려보려고 노력했다."

 

실질적인 움직임에 집중했던 칼더에게 그 자리에 멈춰있지만 ‘이미 아주 빠른’ 추상미술은 충격적이었고, 또 새로웠을 것이다. 이 경험으로 칼더는 추상미술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이후 호안 미로나, 뒤샹 등의 미술가들과 교류하며 칼더는 점점 더 추상, 그리고 추상에서 나아가 초현실주의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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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칼더의 초반 추상미술에선 호안미로의 그림과 유사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칼더는 추상미술 속에서도 움직임을 그려내려 노력했다는 것일까. 칼더의 초반 작품에는 유독 원의 이미지가 자주 보인다. 중첩된 원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처럼, 즉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과슈’, 즉 유화보다는 빠르게 마르지만 강렬한 발색을 내는 안료를 사용한 그림을 그리면서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칼더는 자신의 인상,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모티프를 캐치해 빠르게 표현해냈다. 그래서인지 몇몇 칼더의 과슈화는 ‘원’이 없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칼더의 빠른 붓질이나 물의 흐름 등이 그림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추상미술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칼더의 본질은 ‘움직임’으로 이 ‘움직임’에 대한 칼더의 집착은 후에 그가 움직이는 그림, 즉 모빌을 만들게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전시에서 이해한 칼더다. 문제는 그 수많은 작품을 보고 오디오가이드까지도 다 들었음에도 내게 남은 인상은 칼더의 세계관이나 그의 인생보단 단순히 '움직임에 집중한 예술가', '몬드리안과 호안 미로에 영향 받은 예술가'라는 감상에 그친다는 점인다.

 


 

여전히 관람객은 거장의 세계를 원한다



칼더전 기획의도의 필자는 “해외 유명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가까운 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이유로, 또는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적 거장이란 표현으로 포장하며 많은 관람객을 모집해왔다.” 며 “어찌 보면 이들 전시와의 차별성이 K현대미술관 칼더 展의 성공을 가르는 것이 될 것”이라 서술했다.


“더 이상 해외 유명 작가이기 때문에, 또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른바 '대가'라서, 유명 작품이라서 무조건 전시를 보러 가는 시대는 지났”으며 그렇기에 관람객들이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시장 전체를 경험한 후 자신만의 언어로 소화하여 소비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때문에 “오늘날 많은 미술 전시에서 설치 구조와 연출에 더 많은 공을 들이고 있으며 K현대미술관의 전시 프로그램과 구성 역시 이 부분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관람객들이 실제로 보고 만지고 느끼며 칼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다른 전시와의 차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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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테이트 리버풀 Mondrian and his studio에서 전시됐던 몬드리안 작업실의 복원 (우) 알렉산더 칼더전의 몬드리안의 작업실 (아래) 실제 몬드리안의 작업실 사진

좌측 상단처럼 실제 몬드리안의 작업실을 보여줘 칼더가 느꼈을 감명을 관객들이게 느끼게 하기보단 SNS에 취중돼 보인다.

 


그리고 전시를 다 보고 난 지금. 나는 전반적인 이 기획의도에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로 글은 여타 거장의 이름만으로 관람객을 유혹하는 전시들과 칼더전은 다르다고 선을 그으며, 그 근거로 구성을 들었다. 단순히 거장의 이름을 강조하기보단 거장의 숨결 낱낱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차별성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성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몬드리안의 작업실을 빼고선 유의미한 체험존이 없었으며(모빌을 상상하다, 공간은 전시와의 연관성보단 명백하게 SNS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몬드리안의 작업실마저도 칼더에 대한 이해보단 SNS를 노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곳곳에 배치된 거울은 이 의심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 체험존을 제외하고서는 설치 구조 및 연출에 공을 들인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커스 섹션에 서커스장 모형을 확대해서 배치해 놓은 것이나, 초현실주의자들의 영상을 틀어놓은 공간 등은 있었지만 과연 이러한 것들이 단순히 ‘예쁜 사진’을 넘어서 칼더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을지는 큰 의문이 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을 다룬 공간에서는 ‘칼더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도를 제외하고서는 설명이나 그들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작업이 부족했다.


 

Installation View, ⓒ K Museum of Contemporary Art, 2020.jpg

 


결국 거창하게 말했지만 전시에서 말하고자하는 ‘다른 전시와의 차별성’이 거장에 대한 이해보다 SNS에 올리기 용이한 공간구성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의혹과 동시에 과연 이 전시가 그렇다고 해서 SNS에 특화돼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물론 거장의 이름을 건 전시치고 사진을 찍을만한 공간이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넘쳐나는 SNS용 전시에 비해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대로 SNS만을 위해 나아가기엔 ‘거장전’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럴 수 없고, 하지만 SNS를 잡으려 노력했기에 ‘거장전’에서 필수적으로 가지고 가야하는 깊이감, 거장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놓쳤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한 전시 구성적으로도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전시는 드로잉 - 서커스로 칼더의 움직임에 대한 흥미와, 몬드리안 - 호안 미로로 이어지는 추상미술 - 초현실주의의 영향까지의 작품세계 변화과정을 보여준 후 칼더의 작품을 나열하기만 한다. 문제는 심지어 이 작품세계의 변화과정이 전시의 1/3 지점인 3층의 중반부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전시의 절반 이상이 단순히 칼더 작품들의 나열이기 때문이었을까. 개별의 작품들이 강렬하고 인상 깊었던 것과 별개로 전시 후반부는 전반적으로 루즈한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보통의 전시들이 작가의 인생이나, 혹은 해당 사조의 발전 과정 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어가며 보여줘 전시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라면 칼더전의 경우는 이야기가 중간에서 끊겨버린 느낌이 들었다. 칼더의 작품이 추상미술이기에 더더욱 이해가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초현실주의 작가였던 호안미로 전에서도 호안 미로의 세계에 대해서 엿 볼 수 있던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작품의 난이도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이렇게 전시가 작가의 이야기조차 완성하지 못하고, 작가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상황에서 SNS에서 치중한 모습을 보이니 더더욱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칼더전은, 적어도 나라는 관객에게는 그의 세계를 깊게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 좋은 전시를 보고나서는 개별의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이해하고 또 작가의 인생을 통해서 개별 작품을 이해하게 됐는데 칼더전을 통해서는 그 이해가 불가능했다. 어쩌면 내가 워낙의 이야기 덕후라서 전시에서마저도 이야기를 추구하고, 그를 통해 작가를 이해하는 데 주력하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그 어느때보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전시 전체를 끌고가는 스토리텔링을 놓쳤고 그래서 관객이 해당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면 그건 전시의 구성을 한번 돌아봐야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시 기획의도에서 말했듯이 더 이상 관람객들은 '거장의 이름'만으로 전시를 보러 가지 않는다. 전시들은 거장의 이름을 팔기보다 그 이상의 것을 고안해내야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거장의 이름, 그리고 그 세계관을 이해시킨다는 전시의 기본에 충실함을 기반으로 해야한다. 그 이름 값은 옅어질지 몰라도, 관람객들은 여전히 거장의 세계를 맛보길 원하기 때문이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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