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과 죽음은 함께 묶여 있다 - '뉴필로소퍼 vol.9'

충분히 사랑해야 애도할 수 있다.
글 입력 2020.02.1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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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어떨지, 내 장례식장의 풍경은 어떨지 등 나의 죽음에 대해 자주 떠올리곤 한다. 어릴 적부터 잊을 만하면 가족 중 누군가가 죽는 꿈을 꿨다. 꿈이 너무 생생해 잠에서 깬 후에도 며칠 내내 여운이 남곤 했다. 자연스레 가족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죽음을 자주 상상하다 보니,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할수록 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뉴필로소퍼> 9호는 이런 나에게 죽음에 대한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같았다. 죽음에 대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여러 방식에 대해, 그동안 해왔던 생각을 명확하게 해주는 동시에 생각해보지 못한 논점들을 던져주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



<뉴필로소퍼> 9호의 모든 글은 한 가지의 주제, 곧 부제이기도 한 ‘삶을 죽음에게 묻다’로 수렴되는 듯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직시하면서 일상적으로 이야기할 것, 그리고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올바른 삶과 ‘좋은 죽음’을 준비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면 삶의 공포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 <죽음이라는 위대한 스승> 중 (p.23)



나는 나의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주장처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은 부질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죽음은 극한의 자유에 이르는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내 앞으로 다가오면 이솝우화 <노인과 죽음>(p.137)처럼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만약 내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이 두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단 삶에 대한 후회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에서 저자는 임종 자리에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충만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회할 것 같은 일을 ‘지금 당장’ 하라고 권한다.

 

생각해보니 나는 죽음의 순간 느낄 삶에 대한 후회를 두려워하면서, 무엇을 후회할 것 같은지는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나의 삶을 후회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의 명확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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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기르던 반려견이 갑작스럽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많이 아끼고 좋아했지만, 집 안에서 키우지 않았던 터라 그렇게 많은 정이 든 줄 몰랐다. 그 당시 나는 반려견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졌었고, 함께 할 날이 많이 남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아주 평범했던 어느 날, 집에서 쉬고 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면 지금 바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정말 들리는 듯했다. 반사적으로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머리로는 어떠한 이성적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달렸다. 그런데 기껏 뛰어가 놓고는, 차마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잠시 바라보다 도망치듯 도로 집으로 뛰어왔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누워있는 반려견과 내리쬐던 햇빛, 주위 풍경까지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지금까지도 그때 도망쳤던 것을 후회한다. 잘해주지 못한 기억들만 생생히 살아나 괴롭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왜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는지 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고민한다.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의 상황과 감정이 떠오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 후 겪는 두려움과 슬픔 등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문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과거에는 대부분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남은 이들은 죽음의 절차를 모두 지켜보며 애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 죽음과 죽은 이들의 처리 과정은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진행된다. 사실 아주 일상적이고 필연적인 일의 비가시화를 지금껏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비정상적인 일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스 보의 ‘Dead and Alive Project’에서 죽음을 아주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사진들이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죽음을 외면하는 데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반려견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던 그때의 나도 그전까지 죽음의 이미지는 그려볼 기회조차 없었다. 단 한 번 상상해본 적도 없는 그 장면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인생은 너무 짧다>에서 저자는 삶의 유한함을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한다. 삶의 유한함을 직시하는 것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반려견이 내 옆에 항상 있을 것이라 아주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삶도, 고통도, 사랑하는 대상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도 영원하지 않다. 그 유한함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유한함의 끝을 계속해서 상상해야 한다. 조금이나마 익숙해져 도망치지 않고, 죽음을 직접 마주하며 애도하기 위하여. 나는 죽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애도의 방향이 자꾸만 과거로 향한다. 어쩌면 아직도 죽음을 부정하면서 과거를 곱씹어 잘해주지 못했던 순간들을 후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애도는 아마 영원히 완성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과 죽음은 함께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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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 사랑과 죽음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은 죽음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어디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도록 의무화하지 않는다. 사랑은 배우고, 실천하여, 전해지는 것이다.”


- <잘 죽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철학보다 상상력이다> 중 (p.57)



“죽음은 위대한 스승이다. 사랑한 만큼 애도하게 된다는 것. 죽음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 <죽음이라는 위대한 스승> 중 (p.24)



나의 삶도, 사랑하는 이의 삶도 유한하다. 그 유한한 시간 속에서 후회 없으려면 한없이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한 후에 죽는다면 조금 더 ‘잘’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지나치게 탐구하는 것보단 사랑을 배우는 데에 힘써야 한다. 죽음을 직시하면서 사랑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충분히 사랑해야 애도할 수 있다. 또 삶에 대한 후회 없이 자유를 향하여 죽을 수 있다. 나도 이제는 반려견에 대한 애도를 조금이나마 완성해 나가기 위해, 사랑했던 순간들을 더 떠올리려 한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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