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돌을 던지는 자가 가장 죄있을지니, 연극 마터

글 입력 2020.02.0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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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율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 53 ~ 8: 11



“순결한 자, 돌을 던져라!”라는 마터의 부제목은 위의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하느님의 법, 즉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한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시험하기위해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온다. 만약 예수가 율법대로 여인을 처리하라하면 평소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해왔던 예수의 신념과 위배되는 것이고, 만약 율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예수의 답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였다. 그리고 당연히 불순한 ‘생각’조차 죄인 율법 내에서 죄가 없는 자는 없기에 아무도 여인을 돌로 내려치지 못한다. 예수는 단죄를 외치는 이들에게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끝내 죄 지은 자들을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대신 사해주려고 한다. 이로써 율법의 시대는 끝을 맞이하고 예수의 길을 따르며 구원을 좇는 시대가 열린다.


위 구절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연극 마터를 보는 내내 미묘한 기시감과 위화감이 들었다. 마터 속의 상황은 위 성경구절의 이야기를 아주 정확히 따라가면서도 모든 것이 뒤틀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다지도 쉬운 혐오의 시작


 

극 중 벤야민이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계기는 수영수업이다. 첫 장면에서 벤야민은 수영수업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를 어머니께 추궁당하고, 끝내 말을 피하던 벤야민은 ‘종교적 신념’이라고 말해달라며 대화를 끝맺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벤야민의 대답은 계획됐다기보다,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대처한 것에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후에 벤야민이 이유랍시고 댄 이유를 보면 진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멜라니의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라던가, 다른 여자친구의 벌려진 허벅지 등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물 아래서 헐벗은 이성이 뒤섞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아마 벤야민의 어머니가 초반 예상했듯 벤야민은 사춘기라면 누구나 겪는 신체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수영장에 비키니를 입은 여학우들에게 눈길이 간다거나, 어떤 경우 발기까지 됐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성적 변화들에 있어 친구들과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듯 보이는 벤야민의 경우 성적인 교류가 타 학생에 비해 적었을 수 있고, 여기서 근거한 열등감도 존재했을 수 있다. 후에 한 여학생과의 스킨십을 선뜻 거부하지 못한 그의 모습에서 이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벤야민이 정말 성적인 모든 것을 싫어하고 거부한다기보다 외려 갈망하는 데 얻지 못하기에 반감을 갖기 시작하고, 혐오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비극은 벤야민이 그에 대한 근거로 들려고 뱉었던 ‘종교적 신념’, 그 근거로 읽기 시작한 성경에 그런 벤야민의 주장을 뒷받침 해줄 만한 문장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성은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조신해야한다거나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 자체가 잘못됐다는 문장 등. 특히나 벤야민은 구약성서의 구절을 많이 가져오는데, 십자가를 들면서도 예수의 논리보다 예수 이전의 논리를 더욱 앞세우는 우를 범한다. 어째서 성경에서 전혀 결이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기에 그저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할 따름이다. 이렇게 강력한 근거를 얻은 벤야민은 성경이, 혹은 자신이 규정한 ‘타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두 번째 비극은 어른들이 그런 벤야민의 잘못된 신념을, 혹은 신념으로 분한 혐오를 제대로 정정해주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남자교사는 벤야민을 탈선했다고 치부하고 그저 무시하고 짓밟으려 든다. 벤야민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그의 행동은 벤야민에게 반감만을 심어줄 뿐이다.


벤야민의 어머니는 벤야민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선생님이나 목사에게 양육의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우리 대화한 적 없어’라는 벤야민의 대사는 그간 어머니와 벤야민과의 관계를 은유한다. ‘누군가’가 와서 벤야민의 문제를 자신에게 일러주고 그를 교정해주기를 바랄 뿐, 자신이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결국 어머니는 벤야민의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벤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교장은 어쨌든 문제가 없으면 그만 아니냐는 태도로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인 양비론을 펼친다. 거기에 더해 벤야민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자신도 가지고 있는 혐오를 투영해 ‘그럴 만 하다’며 받아들이고 벤야민에 맞춰 학교의 시스템을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바꾸려한다. 그런 교장의 행동은 벤야민에게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이런 어른들 속에서 유일하게 벤야민을 이해하고, 바꿔보려는 ‘유일한 어른’ 로트의 시도는 무력할 뿐이다. 이 두 가지 비극 속에서 벤야민은 성경 속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근거들만을 찾아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며 점점 괴물로 분해간다. 극 초반 어머니와의 대화나, 여학생과의 대화, 혹은 게오르그와의 대화에서 조금쯤은 소년적인 면모를 보이던 벤야민이 서서히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피어오르는 혐오를 보여주는 듯 해 소름이 돋았다.


처음엔 가벼운 계기로 시작해 자신에게 맞는 정보들만 섭취하는 확증편향을 지닌 채로 점점 한쪽에 골몰하며 자신과 다른 것들은 타자로 밀어내고 혐오하고 열등한 취급을 하기 급급한 모습이, 또 그렇게 혐오가 시작됐을 때 그를 교정하기보단 무시하거나 혹은 양비론을 펼치며 덮어주기에 급급해 혐오를 키워나가는 그 모습이 아주 정확히 우리 사회에서 혐오가 퍼져나가는 방식이었다. 요즘 시대 가장 큰 이슈인 여성혐오에 관한 이슈뿐 아니라, 바로 최근 신종 코로나 이후 사회 기저에 깔려있던 중국인에 대한 경멸이 어떤 방식으로 혐오로 분해 들불같이 번져나갔는지를 목격한 이후라 더욱 크게 와 닿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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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 세상에선 두눈박이가 비정상이다


 

벤야민은 성경을 근거로 여성혐오, 동성애 혐오를 이어간다. 벤야민이 내뱉는 말들을 보면 이것들이 성경에서 나온 말일지 의심이 갈 정도로 혐오에 가득 찬 말들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과연 이게 정말 성경에 나온 말들일지 의구심을 가지고 봤었는데, 본 후 찾아보니 정말 성경에 다 있는 말들이었다. 연극에서 벤야민이 읊었던 성격 몇 구절을 가져와 보자면 이와 같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동성애) 이와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6-27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 2:12~15



이에 로트는 그건 2000년전 이야기고, 하지만 우리는 지금을 살고 있기에 다른 법칙 아래에서 살고 있다고 역설한다. 벤야민은 ‘그럼 성경이 틀렸다는 거냐며’ 로트에 반발한다. 사실 벤야민을 이상한 아이 취급해온 어른들은 많았다. 하지만 벤야민이 가장 심하게 반목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하게 벤야민을 이해해보려고 했던 로트다. 다른 이들의 경우 벤야민의 논리를 들어보지도 않고 헛소리로 치부하기에 벤야민 또한 그들을 무지몽매하다 생각하고 치워버릴 수 있다.


하지만 로트의 경우 벤야민의 게임방식에 들어가서 벤야민을 이해하고 교화시켜보려 노력하기에 로트는 벤야민의 견고한 신념의 세계를 깨부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벤야민에겐 자신을 그저 찍어 누르려는 남자교사보다 로트가 더욱 위협적이다. 물론 여기에 여성혐오나, 자신이 힘으로 당해낼 수 없는 남자교사나 교장보다 여성인 로트가 훨씬 더 상대하기 쉬운 존재라는 얄팍한 계산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벤야민과 로트의 대립은 점점 심화돼 간다. 교장에겐 학생과 분란을 일으키기에, 애인에겐 성경에 골몰하기에, 벤야민의 어머니에겐 자신의 아들을 이상한 아이 취급하기에 로트는 벤야민 뿐 아니라 주변 세상과도 대립하고 고립되기 시작한다. 가장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지려는 어른이 외려 그렇기에 ‘비정상’취급을 받으며 혐오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모두가 부도덕하고 비이성적인 세상에서 도덕과 이성은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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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있는 자가 던지는 돌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각각의 인물들의 위치가 전복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자신은 하느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며 자신의 신앙심을 강조하고, 기꺼이 순교하겠다는 의사까지 비친다. 순교자의 가장 대표 격으로 떠오르는 인물은 예수다. 모든 이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심지어 후에 벤야민은 스스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게오르그를 ‘제자’라고 칭하는 등 마치 스스로가 예수라도 된 양 행동한다. 실제로도 벤야민과 로트의 대립이 가장 심화됐을 때 벤야민이 들고 나온 것은 십자가였다. 벤야민의 세상에서 벤야민은 순교자다.


벤야민의 친구 게오르그는 벤야민을 추종한다. 벤야민이 자신의 다리를 자라게 해준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거나, 벤야민의 말도 안되는 논리와 행동들에 아무런 비난도 가하지 않고 그저 우러러 볼 뿐이다. 벤야민의 세상에서 게오르그는 신도이자, 제자이다. 실제로도 벤야민은 게오르그를 제자라고 부르고, 후에 게오르그가 자신을 따른 것이 신앙심이 아니라 정욕이었음을 깨달은 이후에는 게오르그를 ‘유다’라고 부른다. 예수의 12제자 중 예수를 배신한 사람과 게오르그를 동일시하는 모습은 벤야민의 세상에서 자신과 게오르그의 위치가 어떤 것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트는 신앙을 부정하고 벤야민과 반목한다. 벤야민은 그런 로트를 ‘유대인의 이름을 가졌다’며, 유대인이라고 혐오하고 비난한다. 벤야민의 세상에서 로트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고, 그렇기에 신앙을 위해 처단해야할 사람이다. 예수 또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벤야민에게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과 신앙에 반목하는 이들은 모두 ‘유대인’이라는 특성으로 치부되어 혐오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벤야민의 이러한 구분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신앙을 믿고 기꺼히 순교하려는 자, 추종자였으나 배신한 자, 신앙에 반목하는 자. 하지만 시각을 약간만 비틀어보면 모든 것이 뒤틀려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의 맨 처음 상술했던 성경의 일화로 돌아가 보자면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한다. 이 말의 죄 없는 자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욕을 품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이다. 여학생과의 관계를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던 벤야민 또한 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벤야민은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벤야민은 망설임 없이 돌을 들어 자신을 배신한 게오르그를 내려친다.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고 말한 예수와, 스스로를 확신하기에 망설임 없이 돌을 들어 내려친 벤야민. 여기서의 벤야민의 모습은 예수보다는 간음한 연인을 단죄하기 위해 끌고 온 유대인들의 모습에 가깝다.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히9: 22



게다가 벤야민은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하고, 마침내는 위 성경 구절을 로트와 게오르그를 해칠 근거로 든다. 율법은 예수 등장 이전에 모세가 전해준 하느님의 법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를 부정하고 구약성경을, 즉 율법을 따르는 것이 벤야민이 그렇게나 혐오하는 ‘유대인’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피를 흘림으로써 모든 죄를 사하였기에 예수를 긍정하는 기독교에서는 예수부활 이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된다. ‘사랑’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예수가 되고자 한다면서 정작 성경에서 취하는 것들은 자신에 입맛에 맞는 혐오적인 구절들이나, 자신이 그렇게나 부정하는 ‘유대인’의 법인 율법들이다. 결국 벤야민조차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벤야민의 행동은 순교자인 예수라기보다 자신이 그렇게나 혐오하던, 예수를 처형장으로 보낸 이들에 가깝다.


게오르그는 벤야민에게서 돌로 맞았다는 점으로 보아 위 구절에서의 ‘간음한 여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나 죄를 범한,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느님을 따르던 이들에 의해 단죄당할 운명에 처한 여인 말이다. 그리고 벤야민은 게오르그를 처형함으로써 벤야민의 상상 속이 아닌, 실질적인 벤야민의 위치를 공고히한다.


로트가 처음 벤야민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던 동기는 단순했다. 벤야민은 학생이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트는 게오르그에게도 헬멧을 주는 등 모든 학생들에게 온정을 보인다. 그런 로트가 점점 광기에 물들어가는 이유는 ‘비정상’취급 당했기 때문이다. 누가봐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결정들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자신은 이단아 취급을 당하기에 로트는 점점 미쳐간다. 그런 로트가 마지막으로 택한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 발에 못을 박는 행위다. 그리고 그렇게 못을 박는 행위의 동기 또한 ‘이 학교엔, 여기 아이들에겐 내가 남아야해’라는 이유다. 유일하게 아이들을 사랑했던 어른이기에 마지막에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에 못을 박는 행위까지 불사했다.


발에 못을 박는 행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또 그 동기가 결국은 ‘사랑’이었음은 비록 로트가 신앙을 믿지 않더라도 벤야민이 그렇게나 울부짖는 ‘성경’의 말씀을 가장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차라리 로트가 예수에 가까운 것이다.


신앙을 믿지 않는 자가 예수가 되고, 가장 신앙심이 깊은 자가 이단이 되는 이 아이러니 속에 신앙의 경계는 흐려지고, ‘혐오의 이유’조차 흐려진다. 모든 경계가 흐려졌고 더 이상은 서로를 혐오 할 필요가 없음에도 혐오는 그곳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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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두텁기에 얄팍하기 짝이 없는 그 믿음


 

극 속 그 위치의 전복을 보며 왜 내가 ‘의심없이 믿으라’고 역설하는 수많은 종교들에 그렇게나 반감을 가졌는지 이해했다. 의심 없는 믿음. 나는 이 말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믿음은 끝없는 의심으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비단 종교뿐 아니라 수많은 이념, 사회적인 통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것을 강하게 믿는 만큼, 더욱 강하게 스스로 반문을 제기해 봐야하며 그에 대한 대답을 찾고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해 나가야한다. 자신의 믿음에 반목하는 이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 안에서 타당한 것들을 찾고, 자신 스스로 그 ‘타당한 논리’에 반박할 근거들을 찾아나가는 것이 믿음의 과정이다. 즉 믿음엔 끝없는 의심이 반드시 동반돼야만 한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의심하는 과정은 괴롭기 짝이 없겠지만, 그 괴로운 고뇌의 과정을 거쳤기에 비로소 감히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얄팍하기 짝이 없다. 자신은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을 정도로 두텁게 믿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취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세상 그 누구라도 가능하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들엔 귀를 닫고, 듣지 않고, 틀렸다고 비난하고, 그 모든 것들에 자신의 믿음이 무기며 방패가 된다면 그보다 편리한 것이 어디 있을까. 단 한번도 반론을 제기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믿음은 두텁지만 칼질 한번에 쉽게 잘려나갈 만큼 얄팍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보호하기 위해 귀를 닫고, ‘의심 없는’ 믿음을 지속할 뿐이다.


이런 믿음은 아주 쉽게 혐오를 양산한다. 상대의 논리가 옳든 옳지 않든 ‘나’를 공격하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틀렸다 생각하면 상대는 아주 쉽게 섬멸해야할 대상이 된다. 자신을 가장 이해해야할 위치에 있음에도 그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어머니나 그저 억압하려하는 남자교사보다 로트에 심하게 반목하는 벤야민의 모습은 자신의 ‘믿음’이 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에 대한 방어기제는 더욱 큰 혐오를 양산해낸다. 로트를 제외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돌아봤다면 이런 파국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그 모든 혐오들은 모두 다 ‘의심 없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나는 내가 믿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자 한다. 지금의 나는 종교가 없지만, ‘종교를 믿지 않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있다. 어쩌면 어느날 내가 종교를 가지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종교를 가지게 된다고 할지라도 내 믿음은 다른 이들의 믿음보다는 한없이 얇을 듯하다. 수없이 많은 의심을 거치고 결론을 내린 답안들로만 한 장 한 장 채워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얇지만 단단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얇기에 언제라도 새로운 책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삶이 조금은 더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보다 올바르게, 누군가를 혐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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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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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셜스튜핏
    • 우와 멋진 리뷰입니다 ㅎㅎ 공감하는 부분도 많고,새로 맛본 부분도 있네요. 특히 상세하게 써주신 죄있는 자가 던지는 돌이란 표현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강요하는 믿음의 기저에는 고뇌가 아닌 다른 것들이 깔려있기도 하죠... 그래서는 안되는데 삶이 복잡해지면서 무뎌지기 쉬운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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