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시간] Oogly_#1_낙원(paradise)

꿈 이야기
글 입력 2020.01.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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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년 2월 28일

장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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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ogly_#1_낙원(parad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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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꿈에서 그렇게 들떠 있더니 바다에 갔다. 눈부시게 쨍한 파란 하늘도 그리웠나보다, 지금은 보기 힘든 새파란 하늘이 내 위에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바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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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유 모를 철제 난간으로 막혀있는 바다,


우선 바다를 향해 걸어갔는데 멀리서라도 희미하게 보여야 할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다가갔다. 나는 바다를 봐야했다.


햇빛으로 달궈진 철제 난간 사이를 지나니 가파른 모래 언덕이 내 아래로 펼쳐졌다. 바다는 저 아래, 아득한 모래 언덕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곳에 걸려있었다. 이토록 바닥에 있으면서도 불안해 보이는 나의 낙원을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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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조금씩 벌리면서 바다를 향해 내려갔다. 모래알의 무리는 단단히 바다를 막아내고, 저 철제 난간도 거뜬히 들어내면서, 낙원을 향해 내려가는 나의 간절한 발이 닿는 곳에는 조금의 힘도 더해주지 않았다. 후두둑 미끄러지는 발에 나는 결국 두 손도 모래 위로 올렸다.


기울어진 네 발의 어떤 짐승이 되어 바다, 아니 낙원을 향해 기어갔다. 시선이 바다를 향할 수 없는 나의 몸의 방향이 야속했다. 빨리 가고 싶었다. 차라리 굴러 떨어질까 했지만, 그러면 내가 수많은 생채기들을 안아야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낙원에 눈이 먼 존재의 이기적인 마음은 서 있으려 발버둥치는 네 발걸음과 간절함이 뒤덮인 시선의 완벽한 어긋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손톱 사이에 모래알이 잔뜩 끼어 아리기 시작할 때면 그 모래 언덕에 그저 주저 앉아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낙원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꽤 멋진 일이었다. 나는 내 손톱에 들어차는 모래알의 어림 수를 시계 삼아 낙원을 조금씩이나마 바라보며 바다에 다가가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씩 모래 언덕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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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꿈이라서 그랬을까, 그렇게 아득해 보였는데도 도착은 순식간이었다) 바다에 다다랐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낙원에 발을 담갔다. 차가웠다. 울렁거리는 소금물은 아무도 만져보지 못한 나의 여린 발가락 사이의 속살을 아무렇지 않게 쓰다듬고는 사라졌다. 표면 위에 부서진 물거품은 내 발목을 간지럽히고 젖은 모래 사이로 도망갔다. 그들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들어차다 사라질 뿐이었다. 모래 속이든, 바닷속이든.


다만 조금 다른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올라가야 할 길에 어떤 것이 우뚝 서 있을 때다. 아니 그저 가만히 부유하고 있을 때, 파도는 아무렇지 않게 부서진다. 자신 앞에 들어찬 존재에 투명한 흔적을 흠뻑 남기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제 방식을 지킨다. 부서져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저만의 초침에 맞추어 내 발을 자신의 살점으로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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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겐 그런 것이 파도가 유일했다. 낙원은 부서져도 아름다울 수 있는 곳이었다. “(.....)” 그렇게 사라져야 할 독백의 순간은 아직도 내게 남아있던 것이다. 그 독백, 그 모습, 그 소원이 간절히 뒤섞여 지금 나만 아는 낙원을 실현했다. 낙원, 이 낙원을 위해 나의 작은 독백이 파도에 던져졌던 그 순간이 계속 내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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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래를 비춘 연갈색, 햇빛을 머금은 에메랄드빛, 낙원을 품은 새파란 빛, 그리고 그 위에 살점처럼 얹혀진 흰 거품이 낙원 위를 감싸 앉았다. 저만의 곡선을 지으며 부서지기를 소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동공에 그 파도가 들어차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눈에는 공허한 천장이 들어차고 몸에는 체온이 뒤덮힌 이불이 들썩일 뿐이었다. 눈을 뜨고 남은 건 내가 정말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단순하고 어쩌면 절박한 소원이었다. 그리고 아슬하게 아래에 걸려있던 그 바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왜 그런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꿈에선 왜 그 모습이 내게 너무 익숙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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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낙원은 이번에도 내게 잔상을 남기며

내 기억 어딘가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부서진 하얀 살점 아래 제 선명함을 가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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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2,29

 

“Oogly”라는 이름은 아마 우연히 떠올랐을 그 단어가 맞다. 그러니까 ugly라는 단어에서 이번 연작의 제목을 가져온 것이다. Ugly, 발음하면 ‘어글리,’ 쉬운 단어이기도 하고, 어감도 다소 앙증맞은 느낌이 들지만, 의미를 보면 복잡하고 거친 속내를 가진 단어다. 대강 못생긴, 추한, 추잡한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인상과 달리 어느 하나 유한 것이 없는 속마음을 가진 단어인 것이다.


내가 한창 다양한 ugly의 의미를 내 입으로 나에게 퍼붓고 있을 때, 노트북 속 파일들을 배회하다 우연히 예전에 남겼던 기록들을 다시 만나며 이 작품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상태와 우연히 마주한 상황이 맞물려있던 그 시간 동안 우연히 본 ugly라는 단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머릿속에 담아두다가 “Oogly”를 떠올린 것이다. 다른 제목을 붙일 수도 있는 이 연작의 이름을 우글리라고 한 과정은 평소보다 더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이 이름을 우글리라 읽기로 했다. “우”라고 묵직하게 아래로 뚝 떨어지는 어감이 좋았고, 나의 다른 작품들* 에서 자주 언급하는 “우글거리다”와도 단어가 절묘하게 겹치는 모습이 딱 완벽했다. 그리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Oo’라는, 왠지 풀이 죽은 듯한 모습이 달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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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랄까, 아니면 영혼이랄까, 어떤 말이든지 나의 내면을 이루는 어떤 덩어리를 표현할 때 우글거린다는 말을 덧붙인다. 나라는 사람은 하나지만, 그 ‘하나’를 표현하기엔 자주 하나같지 않은 나의 안 무엇인가를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은 수많은 결이 우글거리는 것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언제 이렇게 쌓였는지, 셀 수 없이 많은 결들이 우글거리는 표면으로 덮여있는 것이 나의 마음이고 영혼이고 내면에 있는 어떤 덩어리의 생김새다.



< Oogly >는 단순하게 보면 오예찬이라는 사람 속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살펴보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아름답기보다는 거북하고 못난 모습으로 우글거리는 나의 속내를 응시하며, 어디선가 제멋대로 표현된 것들을 하나씩 건져내보려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연작이다. 마치 수확이 아닌 고요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낚시를 선택한 낚시꾼의 태도와도 닮아있다. 결들로 넘실 거리는 호수 곁에 합판 아나 올려놓고 그 위에 앉아 낚싯줄을 내려 우연히 걸린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곤 그 결을 다시 호수에 던져 풀어주거나, 아니면 나를 비추는 거울로 손에 조금 더 놓아보는 것이다. < Oogly >는 후자의 행위를 이어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 Oogly >를 작업하는 동안 그 ‘결’이란 것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 무엇을 보고, 무슨 감정을 느끼고, 어떤 순간 혹은 우연이었는지 - 천천히 떠올리고 옮기는 방식을 중심에 두었다. 시간이 지난 후 떠올리는 기억은 기억을 낳은 그 순간과 온전히 동일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그 순간을 떠올리는 지금의 기억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작업 영역에서는 기억을 그대로 떠올리는 것보다, 그 기억을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 옮기는 과정 속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시각적인 영역에 담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어떤 장면과 감정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그 기억을 마주한 지금의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등,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보였던 것을 대화하는 과정이 그려진 화면이 바로 < Oogly >의 장면들인 것이다. '기억 속의 나’를 '다시 마주한 나’ 사이에서 오갔던 것들을 반죽한 결과며, 그렇게 나의 ‘안’과 나의 ‘현실’에서 경험한 것 사이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읽어보려는 노력이다. 과거에 이미 완성되어 영혼 속에서 우글거리던 하나의 “결”은 이러한 시간을 거처 < Oogly >라는 새로운 맥락에 놓여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시작을 알린 첫 번째< Oogly_#1_낙원(paradise) >는 작품 속 글에 쓰인 것처럼 내가 꾸었던 “꿈”에 대한 것이다. 꿈을 꾸었던 그날 기괴했으나 반가웠던 바다의 모습과 그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가파른 모래 길을 기어가던 나의 모습이 생경해서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에 허겁지겁 메모해 두었었다. 가끔 꿈을 꾸고나면 하루 종일 그 꿈이 계속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날이 있는데, 이 바다 꿈을 꾼 날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눈 뜨자마자 내용도, 글자도 조각조각 나버린 채 급하게 써 내려간 꿈의 기록을 조금씩 더 맞추어 컴퓨터에 파일 하나로 저장했었고, 시간이 지나 그렇게 잊었고, 지금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때의 나는 이 기록이 지금까지 이런 모습으로 이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Oogly >의 작업 방식이 된 디지털 콜라주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떠올리는 것을 그리고, 표현하려는 감각을 데려와 맞춰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었다. 시행착오가 너무 많았고, 그래서 콜라주라는 방식을 포기할까 생각도 정말 많이했지만 그런 중에도 콜라주라는 방식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꿈 속에서 '보는' 장면들은 찍힌 사진처럼, 한 편의 짧은 다큐멘터리처럼 흘러가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허공뿐일 구(球) 형태가 자는 동안 내가 느끼는 꿈이라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기억하는 그 꿈의 장면들은 그 구(球) 주변을 위성처럼 떠돌고 있는 여러 이미지가 만들어낸 장면이라 생각했다. 햇빛을 반사하며 쨍한 빛을 가졌던 바다, 기괴한 모래 언덕, 새하얗던 파도, 무턱대고 거길 내려가려 했던 나의 간절함, 발에 닿았던 차가운 온도와 거품의 간질거림 등등, 여러 이미지가 겹쳐지고 다시 사라지면서, 그리고 이미지들의 맞물리는 관계에서 나오는 감각들이 내게 기억되면서 이어지는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요소들을 화면 위에 하나씩 배치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을 찾아가며 작업하고 싶었고, 지금 내가 가진 기호들도 이 대화에 빼놓을 수 없었기에 이 의도를 실현하기에는 콜라주가 제일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거의 한 달이 지난 후에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까이 다가간 거리에서 6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첫 < Oogly >를 완성할 수 있었다.



2020.01.13

 

1.

매끄럽지 못하고, 잘게 부서진 꿈속 장면처럼 잠결에 써 내려가 잘게 부서진 글들. 꿈을 기록한 메모는 그래서 더 꿈답고 그 메모로 꿈을 기억하는 나는 그 장면을 여전히 ‘꿈’으로만 기억한다. 쪼개지고 가지런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나답고,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2.

꿈을 꾸었던 때와 그 이후의 시간을 다시 기억해보니 앞뒤가 어긋난 단상이다. 나도 전혀 몰랐던 곧 겪게 될 우울증을 앞두고(나는 그해 여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던 바다의 모습을 다시 엮어서 낙원이란 것으로 꿈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뒤틀린 부분은 또 있다. 여름에 아프기 시작했을 즈음에 바다 근처에서 잠시 지내야 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바다였는데, 정작 그때에는 아프기 시작한 나를 애써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바다 곁으로 끌고 가야 했다. 그 여름에 나는 ‘아름답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았는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나의 낙원이라 불렀던가,’ ‘간절함을 거둬내고 기쁨을 느꼈는가.’ 모든 것들이 상처가 난 채 조각을 맞추고 있으니, 곳곳에 생겨난 틈으로 결국 온전한 나를 마주하지 못한 것이 지난 나의 모습이었다. 바다라는 나의 낙원을 둘러싼 조각들은 이후 다가온 여름에 한 번 맞춰졌었는데 끝내 온전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제서야 그 꿈의 탈을 쓴 기억의 조각을 다시 기억하고 맞추려는 걸까. 이 메모를 읽는 분들은 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당연히 할 수 있어서 질문을 꺼낸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 사실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계속 뒤돌아서서 아팠던 나에게 계속 묻는다. 왜 갑자기 이 꿈을 데려오고 곧 나타날 다른 기록들도 데려와서 이 시각적인 무대 위로 올려야 했는지. 굳이 해보지 않아 너에겐 어색한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다루려고 하는지.


3.

작품을 끝내기로 정한 날 이틀 전에 겨우 엮어가던 꿈의 모습을 모두 해체시켜버렸다. 완전한 확신의 끄덕임이 아닌,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라는 물음표의 연속 앞에서는 더 이상 작업을 이어나갈 의미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했을 때 유일하게 돌아온 것은 막연하게 나는 나를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4.

그날 낙원이 나타난 꿈을 지금 데려오는 것은, ‘결국 그 낙원을 꿈에서라도 다시 불러야 했던 나’ 때문이었겠지. 나는 그래야 했던 나를 다시 바라보고 싶다. 그러면 채울 수 없었던 나의 어딘가를 채울 수 있는 것 같아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래야 한다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5.

모든 과거가 시간에 맞추어 쓸려 내려가는 데도 사람에게 삶이 있는 이유는 기억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있어야 한다. 삶은 ‘나’라서 존재가치가 있게 되고, ‘나’는 그 삶의 존재 자체의 이유가 된다. 결국 기억을 더듬는 것은 나의 삶을 불러와서 나의 존재 가치를 찾고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보려는 발버둥이다. 아마 이 < Oogly >도 그런 모습의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때에는 몰랐던 마음을 지금 추측해보는 것도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느 날 새벽에 꾸었던 꿈을 그저 신기하고 선명한 꿈이라고만 여기고, 글을 끄적이고 다시 흘려보냈었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저번 작품에도 언급한 것처럼 우울한 스물셋을 보냈기 때문에 < Oogly >가 탄생할 수 있었다. 아주 기쁜 스물셋이었으면 나는 이 작품을 하려는 생각도, 또 이 작품의 바탕이 된 나의 기록들을 굳이 찾아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놓친 것을 다시 절박하게 찾게 만든다. 이 작품도 그런 모습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7.

이미지로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명확하게 짚어가며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래야 꿈이 꿈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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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작가_레몬파운드_최종400.jpg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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