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이 즐비한 거리, 물랭 루즈로 초대합니다 - 툴루즈 로트렉 展

글 입력 2020.01.24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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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있는 커튼을 젖히면 경쾌한 무곡이 흘러나오고 스크린 속 캉캉 댄서들의 화려한 발재간이 반기는 무도회장이 펼쳐진다. 작은 공간이지만 꼭 과거의 누군가에게 초대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상한 설렘과 흥분이 감돈다.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은 공간의 출구로 나가면 19세기 가장 화려했던 거리의 밤이 재현되어 있다. 초대된 곳은 아주 멀고 다른 곳이었으나 낯선 감정 위에 포개진 호기심은 발걸음을 들뜨게 할 뿐이다. 격변을 앞둔 시대의 꺼지지 않은 불빛이 온밤을 밝히는 공간, 여기는 물랭 루즈다.


전시는 19세기 후반의 몽마르트와 물랭 루즈에 관객을 초대하면서 시작된다. 총 일곱 가지의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는 쉽게 규정할 수 없는 화가, 툴루즈 로트렉의 생애와 예술을 방대한 작품들과 함께 선보인다.


포스터를 근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전환시켰던 업적은 그에게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였지만, 전시는 포스터뿐 아니라 재기 넘치는 드로잉부터 수채화, 석판화와 일러스트 등 매체와 방식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보는 시선을 호기롭게 투영한 그의 화폭을 다각도로 선보인다. 19세기의 물랭 루즈라는 특정한 시대와 공간의 산책자이자 기록자로서 예술세계를 구축한 화가였으나, 전시를 다 보고 나오면 어느 한 시대와 공간에 붙박아놓을 수 없는 그의 드넓은 예술세계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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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섹션에서는 그에게 자유를 선사한 연필 드로잉 작품을 선보인다. 경쾌한 무도회와 길거리를 지나면 춤추듯이 생동감 있게 그려진 드로잉이 펼쳐진다. 마치 신문에 있는 만평처럼 유쾌하고 재치 있게 한 명 한 명의 인물을 담아낸 그의 필체에는 과연 연필을 친구처럼 여겼다는 그의 정다움이 묻어났다. ‘아버지’라는 별칭이 짐짓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숙함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일상의 정감과 친근함이 전달된다.


다양한 인물을 담으며 또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포착했던 그의 예리하며 다채로운 시선은 세상의 모순을 포착하는 영민한 감각으로 이어졌다. 이어지는 두 번째 섹션은 특유의 감각으로 상류사회를 조롱하고 비웃었던 로트렉의 시선이 담긴 그림들로 이뤄진다. 그의 조소는 꽤 낙천적인 방식으로 터트려진다. 희극과 비극을 연기하고 관객에게 즐거움과 슬픔을 전달하는 몽마르트의 뮤즈들을 묘사함으로써, 현실에서 연극보다도 더한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류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가 담아낸 뮤즈들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원색과 튀어나올 것 같은 글자들로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현실과 연극의 분기점을 알고 그사이를 그들이 표현된 색채처럼 선명하게 넘나드는 그들은 생생히 살아 있는 모습으로 캔버스에 담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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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아브릴」


 

로트렉은 몽마르트에서 벌어지는 엔터테인먼트의 소비자이자 생산자였다. 그는 몽마르트 카페에 자리를 정해두고 매일 밤 찾아와 몽마르트의 예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머금어 자신의 화폭에 옮겨 넣었다. 흑백임에도 컬러보다도 시각적인 생기를 띠는 석판화는 과연 그의 전공 분야답다. 몽마르트의 풍경을 그린 세 번째 섹션을 빠르게 훑어보면 마치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하다.


일상의 여성들을 그린 네 번째 섹션, 말을 그린 여섯 번째 섹션의 그림들에서도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관습적으로 잘 그리지 않는 생소한 동작과 표정을 잡아내는 화가의 세밀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림을 위해 멈춰 서 있는 인물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춤과 연기 더 나아가 삶을 위해 스스로 움직이고 살아있는 이들을 그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어지는 다섯 번째 섹션에서는 로트렉의 또 하나의 전문 분야인 풍자화를 전시한다.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던 19세기 말, 잡지 출판이 활발했던 파리에서 특히 그는 풍자화를 기고하는 단골 작가로 활동한다.


풍자화와 더불어 풍자화가 실린 잡지의 실물들을 전시해놓은 섹션에서는 엔터테인먼트나 일상적인 풍경뿐 아니라 정치·사회적 이슈 역시 거리낌 없이 직시하고 자신의 언어로 풀어놓은 작가의 자취를 살핀다. 당시 잡지에는 검열로 인해 게재되지 못했던 네 장의 그림을 함께 선보이는 이 섹션에서는 재치 있는 캡션과 감각적인 색채 등 본인의 예술적 개성을 풍자화에도 녹여낸 그의 능력에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마지막 섹션에서는 포스터라는 장르에 현대화의 물결을 가져온 로트렉의 업적을 기린다. 원색이 난무하는 색감과 인물이 앞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대담한 구도는 장르적 특성상 대단히 선전적이면서도, 순간의 포착과 인물이 정면을 빗나간 구도에서 잘려 나가는 것은 미술의 인상주의적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에 없던 독창적 이미지가 더욱이 눈에 띈다.


정치적이고 무거운 포스터가 아닌 만화적이고 발랄한 색감의 포스터는 후에 등장할 팝아트의 예언 같기도 하며, 「물랑 루즈 라 굴뤼」에서 텍스트를 반복 제시하여 회화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후면의 인물들을 실루엣으로 처리하여 앞의 인물을 캐릭터처럼 부각시킨 것처럼 기존에 없던 혁신적 요소가 엿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잡지 표지에서 많이 쓰이는 텍스트를 얼굴로 가리는 기법은 로트렉의 「앙바사되르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라고 한다. 과연 현대적 포스터의 개척자라고 불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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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앙바사되르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 「물랑 루즈 라 굴뤼」

 

 

전시는 그의 생애를 요약한 영상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작은 키와 쓸쓸한 생애 그리고 그 난관을 극복하고 개진한 멋진 예술 세계로 그를 조명하지만, 사실 굴곡진 서사 없이도 실컷 밝고 경쾌한 축제와도 같은 그의 그림들은 나름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의 그림에는 친애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물랭 루즈의 밤을 어느 낮보다도 눈부신 색채로 밝힐 때, 자신의 주변을 흘러가는 인물들의 사소한 일상을 기록할 때,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댄서를 다른 댄서들과 미세하게 다른 동작으로 그릴 때 그의 내밀한 애정이 담뿍 묻어나온다. 심지어 기득권을 풍자할 때도 그렇지 않은 이들을 찬미하는 방식을 택한다. 시종 사랑이 즐비하다.


격변의 시대를 앞두고 여기저기가 소란할 때, 로트렉은 과감히 그 소란을 무도회의 그것으로 치환했다. 잠시지만 밝지만은 않은 현실과 유리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철없는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물랭 루즈를 화폭에 가득 채워 넣었다. 싸우고 따돌리는 시대에 모든 이들의 작은 삶을 존중하고 보듬었다. 그럼에도 잃지 않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을 아프게 하는 이들을 성실히 비웃었다.


물랭 루즈를 사랑했던 그는 그가 사랑했던 무엇들을 그렇게 기억했다. 그도 그렇게 기억되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1세기의 한국을 19세기의 파리라는 먼 곳으로까지 초대한 것이리라. 잠시나마 자신이 사랑했던 곳에 들러 철없이 즐겁고 행복하라고, 그는 아니더라도 그가 남긴 그림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말 그런 의도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초대였다고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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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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