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에로티시즘의 재현, "야한 영화의 정치학"

글 입력 2020.01.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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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출간된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현대영화사에서 성의 재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소개한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100여년 간 영화는 에로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벗은 몸과 성행위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예술적인 은유와 암시로 가득하다. 인디애나 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영화/커뮤니케이션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자 김효정은 이런 성적 이미지들의 사회적 배경과 정치적 의의에 대해 설명한다. 해외 고전 명작부터 한국 영화, B급 영화까지 다양하게 아우른다.


 

(이 책은) 영화역사에서 시대별로 에로티시즘이 재현되고 억압되는 양상과 기제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히 혁명가적인 정신으로 통제의 역사를 영화의 관점에서 피룍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을 서술한 연구서와 인문서는 충분히 많이 나와있다. 개인적으로 더 조명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통제가 생산의 기제로 작동하는가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 편의 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재현되었는지 분석하는게 아니라, 야한 것들에 대한 금기가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성적 재현 역시 다양한 변주를 이루는 모습을 조명한다. 성을 통제했던 사회적 분위기가 영화 예술이 에로스에 탐닉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는 저자의 말이 흥미롭다. <오마이뉴스>와 <문화일보>에 연재했던 기사글과 잡지 기고글을 다듬은 이 책은 단정한 칼럼식 구성이 한 주제에 맞춰 엮여 있어 읽기 깔끔하다. 저자는 단순히 성적 묘사가 많은 영화를 고르지 않는다. '야한 영화' 속에 사회, 역사적 의의가 담겨 있는 작품 위주로 소개하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도 많다. 이런 45편의 다양한 영화들을 보며 몰랐던 영화를 새로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이 에로티시즘과 함께 깊이 파고드는 주제는 영화 속 성(Sexual)의 표현에 여성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이다. 유구한 여성 억압의 역사 속에서 영화 속 성의 표현이란 여성의 몸이 스크린에 투사되는 방식이다. 영화 속 여성은 인간,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보다 환상, 욕망, 예술적 의의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관객-남성의 시선에 놓인 여성 인물들은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고 욕망하길 '기대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별 에로시티즘의 차이는 결국 감독들이 여성의 몸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를 말할 뿐이다.

 

책 속 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대개 능동적이고, 동물적 욕망에 몸이 달아있다. 과연 야한 영화란 무엇인지 감이 잡힐 듯 하다. 통제가 생산의 기제가 되듯, (성적) 금기를 어기는 여성은 야하다. 남성이 욕망에 달아 있는 모습은 진부하기 때문에 관객들을 흥분시킬 수 없다. 야한 영화란 야한 여자가 등장해야 한다. 이런 과도한 성적 욕망은, 성을 포함해 삶의 많은 부분에서 비가시화된 여성이 포르노적 자극성에 의지해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 있는 용이한 소재였다.


그래서인지, 저자가 소개하는 첫번째 영화 1916년의 <내 아이들은 어디 있는가?>가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혼자서는 음란할 수가 없다. '야한' 행위는 항상 타자를 필요로 한다. 섹슈얼함이란 타인의 시선 없이는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금기는 욕망하게 만들고, 욕망을 실현하는 건 다양한 사회적 금기에 반항하는 행위가 된다. 그래서인지 작품성 있는 에로틱 영화의 경우 성행위에 복합적 의미를 담는다. 자유, 혁명, 저항, 삶의 활기 등 영화 속 섹스는 가볍지 않다. 특히 국내 영화들에 대한 저자의 꼼꼼한 설명을 읽다보면 그 시대 현대사가 눈에 보이는 듯 하다. 호스티스 영화가 주도적인 한국 에로 영화는 해외 명작들처럼 줄거리가 치밀하지는 않다.


여성의 능동성을 그리기 보다는, 처녀귀신 등 여성을 향한 징벌적 서사와 폭력적 묘사가 많은 점 역시 아쉽다. 하지만 영화 검열이 심했던 시대, 예술을 하기 위한 감독들의 노력을 오목조목 설명하는 저자의 능력 덕에 재밌게 읽을 수 있다. <하녀>, <영자의 전성시대>, <애마부인> 등 오래전 비디오 가게에서나 들어봤을 제목들의 의의를 발견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다.

 

저자의 줄거리 설명 덕에 나는 본 영화가 거의 없어도 책에 푹 빠져 읽었다. 줄거리만으로 나를 사로잡은 영화는 <피아노>(1993)다. 뉴질랜드 숲 속에서 피아노를 사이에 둔 남녀가 주제인 영화에서, 에로티시즘과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 싶었다. 그 외에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와 임상수 연출의 <하녀> 영화의 차이를 알고, 포르노 배우 등 헐리우드의 B급 시대상을 아는 재미도 있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나체'의 미덕 중 하나는 그것이 서로를 공유하기 위한 연인들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과 여성의 몸이 우리가 원하는 그 황홀한 순간에 별다른 미스터리로 과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공유, 혹은 '인간적임'은 감독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모두가 파트너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영화 속 스펙터클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 몰리 하스켈Molly Haskell, "고혹적인 누드Nude with Attitude"

 

 

에필로그에 삽입된 이 문장은 영화 속 에로시티즘의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에로티시즘은 미스터리와 환상적 순간을 필요로 한다. 비밀과 침묵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환상에 에로틱 영화는 의지한다. 이 환상이 없다면 에로티시즘은 빛을 잃을 것이다. 현실성, 인간다움은 야한 영화에서 가려진다. (어째서인지 한국 에로 영화는 과도한 현실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비밀과 무지를 통해 작동하는 이 환상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야 한다.


육체의 동물적 교감을 추구하는 에로틱 영화들은 대화라는 민주주의와 인간성의 필수 도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말 많은 여자는 그닥 야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동등한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허술하게 다루는 에로틱 영화들은 위험하다. 인간의 다방면적 면모가 아닌 섹슈얼함만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배우고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아이들을 위해, 더 다양한 '에로틱'이 필요하다.

 

그건 문명-야만, 남성-여성, 지성-육체 등 이분법에 기초한 욕망의 메타포가 아니어야 한다. 여성(타자)를 탐닉하는 건 추상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이 아닌, 상대를 더 알고자 하는 인간적 욕망의 발로여야 한다. 1910년부터 2010년까지 100년 간 성을 둘러싼 재현의 이미지는 거듭 변화했다. 이제 2020년에 진입하는 지금,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윤리적 상상력은 여전히 필요하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
영화사에서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가?


지은이
김효정

출판사 : 카모마일북스

분야
페미니즘
영화평론

규격
152mm * 225mm

쪽 수 : 248쪽

발행일
2019년 12월 18일

정가 : 22,000원

ISBN
978-89-98204-70-9 (93680)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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