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그들 - 체홉, 여자를 읽다 [공연]

글 입력 2020.01.29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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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벤치 하나가 놓여있다. 그곳은 기차역 안,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들은 한 명씩 나와 자신의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벤치로 다가가 앉는다. 힘 없는 어깨, 밖으로 새어나오는 한숨 그리고 허공을 향하는 눈.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사랑에 눈을 뜬 여자들의 '욕망'을 그려낸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는 러시아 대문호 작가 안톤체홉의 미단편 소설 중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나의 아내들>, <소피아(불행)>을 재창작하여 옴니버스극으로 풀어냈다. <약사의 아내>는 코미디로, <아가피아>는 목가극으로, <나의 아내들>은 그로테스크 코미디로 그리고 <소피아(불행)>는 드라마로 장르의 다양성을 주어 관객의 집중도를 높였다.

 

안톤체홉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의문을 던져 생각해볼 거리를 주는 그 만의 독창적인 창작 방식을 가지고 있다. 체홉의 작품을 보다보면 뚜렷한 선과 악의 인물이 등장하기보다는 평범한 인물들이 일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단편적으로 눈에 보이는 모습을 넘어 한 인물이 살아온 역사와 다른 인물과의 관계 등도 살펴보게 하면서 한 인물을 바라보더라도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연극은 나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남기게 했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현실을 도피하듯 떠나 또 다른 사랑을 하는 결혼한 여자의 '불륜' 소재와 아내를 살해할 수 밖에 없었던 남편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내고 있지만 단순히 웃고 넘길 간단한 연극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뒤로한 채 '불륜'을 저지른 여자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것은 여지없이 잘못되었다. 그저 나는 단순히 불륜을 저지른 여자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기 전에 여자의 행동의 원인이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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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그리고 <소피아(불행)>에서 등장하는 여자들은 처한 상황과 배경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결혼 생활을 만족하지 못한 여자들의 모습과 자신의 욕망을 찾아떠나려는 상황을 보여준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사회로 변화되고 있지만 체홉이 살았던 시대만 해도 남성주의적 사회였다. 연극에서 나오는 여자들도 그러했듯이 남성주의적 사회에서 으레 보여지는 여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소피아(불행)에서 남자(남편)은 여자(아내)에게 자신이 손님을 데려왔으니 아내의 역할에 맞게 남편의 손님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라고 말하는 장면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사회는 여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사라지게 할 뿐 만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기회 또한 저버리게 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억압되고 한정된 삶 속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찾고 싶었고 자신의 본능과 욕망에 따라 살고 싶었을 것이다. '불륜'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소피아(불행)>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아내들은 모두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피해 자신의 행복을 찾고자 떠났지만 그 곳에서 마주한 현실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잠시 암전이 되었다가 조명이 켜지는 순간 마이크 앞에서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여자들의 감정 상태를 표현해주는데 노래 가사와 여자들이 처한 상황이 절묘하게 들어맞아 씁쓸한 웃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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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쾌락, 즐거움, 즉흥성 따위로 아내들을 독살하지 않았습니다. 그 작고 허약한 존재들에게 모르핀과 인이 발린 성냥을 권한다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옴니버스극 3번째에 등장하는 라울의 일부 대사이다. 그동안의 옴니버스극이 여자의 시각에서 여자들의 삶을 바라봤다면 <나의 아내들>은 남자의 시각으로 여자를 바라본 유일한 극이었다. 라울이라는 남성을 통해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보는 시각을 보여주며, 이 또한 러시아의 남성주의적 사회를 보여주었다.

 

<나의 아내들>에서는 라울이 자신과 살았던 7명의 아내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어낸다. 그리고 이유들은 다양하다. 파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게 귀찮아서, 감정기복이 너무 심해서, 시끄럽게 노래를 불러서, 너무 지식이 넘쳐나 비교되고 자신이 초라해지는 게 싫어서, 시인과 불륜관계를 맺어서, 파티를 너무 좋아하는게 맞지 않아서, 장모를 죽이려던 것을 실수로.

 

사실 극은 재밌게 풀어냈다.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가지고도 말이다. 하지만, 라울이 살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어내는 장면은 코믹하면서도 불편했다. 자신이 살인했다는 것을 아내의 성격과 행동 때문이라고 말하며 변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죄를 자신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점은 비겁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의 자유를 찾고자 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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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차역이 등장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듯 서로를 눈치보거나 수심깊은 표정에서 벗어나 함께 웃으며 얘기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자유롭게 보인다. 어쩌면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타인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동질감 아닐까. 각자의 상황은 달랐지만 결국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도 다른 남자와의 사랑도 아닌 오로지 홀로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라울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자신의 자유를 찾아 떠난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종착역은 어디인지 모르지만. 연극<체홉, 여자를 읽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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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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