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마, 너에게 아직 살아있는 역사를 들려줄게 - 영화 "사마에게"

글 입력 2020.01.1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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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된 ‘와드’ 감독이 스마트폰으로 알레포의 현실을 촬영하기 시작하며 영화는 출발한다. 와드는 친구이자 동료 의사인 ‘함자’와 부부가 되어 딸 ‘사마’를 낳는다. 세상에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한 촬영물은 어느새 딸 ‘사마’를 향한 편지가 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를 용서해줄래?”

 

 

현실


 

내게 다큐멘터리는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장르다. 실제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극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게다가 그것을 실존 인물의 모습을 통해 (최대한) 연출 없이 담았다니. 첫 장면부터초점도 맞지 않은 채 마구 흔들리는 화면을 보며 다큐멘터리만이 줄 수 있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정하다. 이는 대부분의 장면이 감독이자 주인공인 와드가 현장에서 한 손에 든 카메라로 촬영된 것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 카메라에 담긴 시리아의 사회가 처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리아 내전은 2011년 3월, 남부의 작은 도시 다라의 한 학교 담장에 혁명 구호를 적은 10대들이 체포돼 고문을 당하면서 발생했다.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정부는 과잉 대응으로 일관했고, 시위는 곧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 2012년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와드는 본격적으로 민주화 시위에 뛰어들며 영상으로 시리아의 참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시리아 내전은 내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여러 나라가 개입하면서 몹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2014년 9월 미국이 시리아를 공습하면서 개입했고, 2015년에는 러시아도 개입하면서 사태는 반군을 지원하는 미국과 정부군을 지원하는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으로 확산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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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전쟁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극영화는 정해진 시나리오와 감독의 연출에 따라 인위적으로 주인공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사방에서 들려오는 총성도, 강한 충격을 안겨주는 폭격도 제작진들의 노고로 만들어진 특수효과일 뿐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동안엔 인물에게 완전히 이입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지만, 비극적인 결말과 마주하더라도 실제 인물의 죽음을 목도했다는 무력감을 느낄 일은 없다.

 

평소 나는 영화라는 매개체만 통하면 어떤 끔찍한 장면이 나와도 어느 정도의 감정 소모만 있을 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그건 해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삶은 평탄하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에게>에선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사마에게>에선 모든 게 진짜였다. 부서지는 건물도, 폭격이 주는 굉음도, 피 흘리는 사람들도, 싸늘한 주검도 모두 꾸며내지 않은 진짜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했다. 행복한 장면이 나오는데도 그랬다. 함자와 와드의 결혼식이 이루어져도, 와드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고 기뻐할 때도, 사마가 태어나는 순간에도 나는 스크린 속 그들처럼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있는 곳이 알레포이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알레포는 시리아 내전의 최전선인 시리아 최대의 도시이다. 또한, 2012년 7월 19일부터 2016년 12월 22일까지 친 시리아 연합군과 시리아 반군이 대립한 알레포 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시리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라고 불릴 정도로 오랜 기간 격렬한 전투가 이뤄졌던,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죽음의 땅 알레포. 그곳에서 살아남기엔 사마는 너무 사랑스러웠고 너무 나약했다. 사마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볼 때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엄마를 용서해줄래?”라는 와드의 절절한 한마디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 잘못 없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곁에 둬야 했던 사마를 보는 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사마가 있었기에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피로 가득한 알레포에서 사마의 미소만이 환하게 빛났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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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써 시민을 탄압하는 시리아 정부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독재와 민주화운동으로 점철됐던 한국의 현대사가 떠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건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였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에서 2010년대의 서울까지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부터 영향받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시리아의 알레포처럼 그 당시 한국의 광주도 지옥, 그 자체였다. 국가 권력 앞에 사람의 목숨은 흩날리는 낙엽보다도 못했다.

 

시민들을 상대로 숱하게 이뤄진 고문, 폭행, 살인은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함을 그대로 드러내 항상 나를 충격에 빠트리곤 했다. 충격에 젖은 나는 나 자신에게 의미 없는 질문만 던질 뿐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모든 게 진짜였을까.

 

나는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로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났고, 내가 지금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독재는 구시대의 산물이고, 민주주의는 현대의 산물이었다. 나는 이 단순한 공식이 모든 국가에 해당한다고 믿었다.

 

영화를 보면서 짧게나마 한국의 현대사를 회상했던 나는 몇 개월 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내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떠올렸다.

 

 

책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차라리 허구라고 믿고 싶지만, 그 아래 적힌 인터뷰이의 이름이 내가 읽은 게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기에 나는 이렇게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그들은 이렇게 비참해야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아주 뻔한 답이지만 태어난 시대의 차이겠죠. 지금 제가 사는 세상은 국가의 이익보다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한 세상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제도적으로는 그러합니다. 저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희생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 그 어떤 것도 살인을 정당화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 아트인사이트 오피니언 <전쟁에는 싱클레어와 여자도 있습니다> 중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당 부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글을 썼던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 상영 시간 내내 나를 옥죄었다.

 

나는 감히 전쟁은 끝났다고 말했다. 감히 야만의 정점인 전쟁은 21세기 문명사회에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가에 의해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뒤로 한 채 말이다.

 

나를 부끄럽게 한 건 무지가 아니라 망각이었다. 영화 초반에는 2010년대에 아직도 저런 일이 자행된다는 게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는 여자라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아직도 누군가는 히잡을 거부한 죄로 투옥된다는 것을, 아직도 누군가는 독재 사회에 저항한다는 것을. 숱한 뉴스와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몰랐던 게 아니라 우리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했다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인류의 역사가 무조건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님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느 시대나 권력욕에 눈먼 통치자는 늘 존재해왔다. 그 욕심은 곧 인간의 상식 수준을 벗어난 절대 악의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이제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줬던 새장 밖으로 나와야 한다. 새장 밖으로 나와 곳곳에 존재하는 말도 안 되는 폭력의 희생양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마에게>가 굳게 닫힌 나의 새장 문을 강하게 열어주었다.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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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에게>는 분명 좋은 영화지만, 지인들에게 선뜻 추천해주긴 어려웠다. 피와 주검들이 적나라하게 나오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상적인 장면이 펼쳐질 때도 폭격의 굉음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그들의 목숨이 불안했다. 나에게 있어 <사마에게>는 최근에 본 어떤 영화들보다 죽음과 가까웠다.

 

그런데 그 수많은 죽음 속에서 내게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건 ‘생명’이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폭격을 맞아 와드와 함자가 일하는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 그녀에게서 핏기없는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아무리 엉덩이를 쳐도 아기가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때 나는 이미 절망한 상태였다.

 

그런데 내 눈 앞에 펼쳐진 건 아기가 가까스로 눈을 뜨는 모습이었다. 아기가 눈을 뜨자 적막뿐이었던 상영관이 안도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는 곧바로 산모도 무사히 살았다는 와드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여태 내 인생에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순간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기적을 느꼈다.

 

비슷한 경험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와드와 함자는 결국 정부와 타협하고 폐허가 된 알레포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와드와 달리 함자는 해외 미디어와의 인터뷰로 인해 얼굴이 알려진 상태였다. 무사히 알레포를 탈출하기 몹시 어려운 조건이었다.

 

와드와 함자의 얼굴엔 함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관문을 통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암흑에서 함자를 부르는 와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울러 펴졌다. 그때 나는 또다시 절망했다. 그러나 곧바로 화면은 활짝 웃고 있는 함자를 비추었다. 와드의 울먹임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서 나온 것이었다. 살아있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 이 당연한 것이 경이롭고 숭고하게 느껴졌다.

 

요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여기서 ‘숨그네’라는 단어는 원래 있는 말이 아니다. 숨을 한번 내쉴 때마다 목숨이 죽음과 삶 사이에서 그네처럼 흔들리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작가 헤르타 뮐러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영화를 보던 당시엔 막 읽기 시작했던 때라 내용에 관해선 떠오르는 게 없었지만, 진심으로 기뻐하는 함자와 와드를 본 순간 ‘숨그네’라는 단어는 내 머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시리아 내전이 일어난 2011년부터 2018년 9월까지 총 36만 4,792명이 목숨을 잃었다. 죽음이 곧 일상인 이 영화에서는 죽음만큼 생명도 가까이 있었다.

 

와드와 함자가 일하는 곳은 병원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병원으로 실려 오는 환자들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그 많은 병원 장면 중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를 향해 누군가가 ‘아직 살아있어’라고 말하는 장면만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살아있다. 사람의 생명도, 이 현실도, 비극적인 역사도. 모두 아직 살아있다. 와드의 긴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 영화가 딸 사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사실이 새삼 감동적이었다. 와드가 사마에게 준 건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있는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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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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