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럼에도 내가 긍정의 힘을 믿는 이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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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격을 스펙으로 만들어주는 것
‘긍정적인 사고’에 대해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빠의 한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대외활동에 지원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열심히 만들던 때였다. 그때의 나는 인디자인 자격증을 딴 지 얼마 안 된 실력으로 서툴게 자기소개서를 만들었다. 그 자기소개서는 그때의 내가 가장 하고 싶었고 인원도 적게 뽑는 대외활동에 낼 것이었다. 문제는 그때의 나는 이미 몇 차례 대외활동에 떨어져 자신감이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대외활동 지원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는 아빠의 물음에 나는 열심히는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아빠께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낸 대외활동은 다 떨어졌어요…….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떡하죠?”
아빠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으시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뭐든지 많이 떨어져 봐야 스펙이 되지!”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불안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어떤 용기가 생겼다. 집을 나서고 학교에 가는 내내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빠의 대답에는 ‘불합격’이라는 명백한 실패를 ‘스펙’으로 봐주는 어떤 마법 같은 관점이 들어있었다. 바로 긍정적인 관점.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동안 내가 친구들로부터 ‘너는 참 긍정적이다.’소리를 자주 들어왔다는 게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어떤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여러 일을 해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 누군가는 너무 진부하다고 뭐라 할 수 있겠으나, 긍정적인 사고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기형도 시인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를 썼는데, 만약 그 시의 작가가 나였다면 그 시의 제목은 이렇게 바뀌었을 것이다. <긍정은 나의 힘>이라고.
긍정의 힘을 믿는 이유 첫째, 타인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최근에 SNS에서 우연히 ‘연말에 정리해야 하는 인간관계’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남을 쉽게 헐뜯는 친구, 질투가 심한 친구 등등 여러 사람이 나왔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김 빼는 사람’이었다. 그 문구를 보니 생각나는 친구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절친했던 그 친구를 차차 멀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저것이었다. 그 친구는 나와는 성향이 반대여서 걱정이 많고 부정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는 친구였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친구와 만나는 게 즐겁다기보다는, 눈치를 살피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친구는 내가 어떤 일을 시작해보려고 하면 응원보다는 걱정부터 늘어놓았다. 이렇게 해서 안 될 거면 어떡하냐, 저렇게 하면 안 좋다던데.
대외활동에 계속 떨어져 초조해하던 나에게 아빠께서 ‘그러게 미리미리 스펙 좀 쌓아놓지 그랬냐.’ ‘네가 부족해서 그런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쩔 거냐.’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난 분명 그날 우울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동안 몇십 명 뽑는 대외활동도 떨어졌는데. 인원도 적게 뽑는 이 활동에 붙겠어?’ 생각에 의욕이 꺾여 제출을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빠는 그 긍정적인 말 한마디로, 떨어져도 그건 최악이 아니라 나의 또 다른 스펙(경험)이 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자기소개서를 만들면서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데 힘을 쏟지 않아도 되었다.
그 말은 그날 하루만 나에게 힘을 준 것이 아니라, 자기소개서를 만드는 내내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기소개서를 낸 대외활동으로부터 처음으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여러 대외활동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아트인사이트 에디터가 되어 긍정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긍정의 힘을 믿는 이유 두 번째, 실패를 실패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과 약속한 분량의 글을 써야 하는데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한글 파일의 빈 창 앞에서 글이 얼마나 쓰기 싫은지 핸드폰만 내리 두세 시간을 했다. 그래놓고 눈이 피로해지자 침대에 쓰러져 네 시간은 잤고 눈을 떴을 땐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실컷 놀아놓고는 우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슬럼프인가?’ ‘오늘 하루를 다 날렸네.’라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는 관점을 바꿔보기로 했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살 수는 없잖아. 오늘 나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를 쓰레기처럼 보낸 것처럼 보여도, 사실 쉰 것을 한 거야.
오늘 푹 쉬었으니 내일은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거야.
이걸 보고 누군가는 저건 포장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험상 저 때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나는 쓰레기야.’하고 자조하면서 우울감에 빠져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기분으로 잠들면 ‘나는 쓰레기니까’ 생각이 내일도 영향을 주어 글을 못 쓰게 되었다. 쓰레기 같았던 내 하루를, 수고한 내가 쉰 날로 바꿔주는 것이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하루를 보낸 거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긍정적인 사고가 좋은 이유는 어떤 결과를 마주해도 그걸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내가 쓴 소설을 공모전에 낼 일이 많은데, 떨어질 때마다 ‘와, 더 좋은 타이밍에 등단하려고 떨어졌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떨어진 건, 내년 신춘문예까지 더 많은 글을 쓰고, 더 많은 책을 읽어서 내년에 더 성숙한 작가로 등단할 기회라고 여기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공모전에 입상하지 못한 게 부끄럽거나, 슬픈 일이 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배우게 한 경험이 된다. 중요한 건, 이렇게 생각했을 때 매번 떨어지더라도 계속 도전해보는 걸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긍정의 힘이 잘 발휘되었다고 생각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고등학생 때 논술 대회를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논술시험의 문제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문제를 내신 선생님께서 우리를 고등학생이 아니라 대학생으로 생각하고 내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난 우등생들도 답안을 다 쓰지 못한 채 나가기 시작했다. 문제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 건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나도 이 문제를 낸 선생님께 원망의 감정이 들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 이 대회에 참여해보지 못했으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볼 일이 얼마나 있겠어. 대학교 시험을 미리 체험하는 것 같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빈 답안지를 낼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답안지는 다 채우는 걸 목표로 해볼까?
그래서 그때의 나는 문제가 요구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머리를 쥐어 짜내 겨우 에이포 한 장 분량의 답안지는 다 채울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대회에서 나는 입상을 했는데, 절대 내가 글을 잘 써서 입상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그때의 나는 문제가 요구하는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논술 대회에서 절반 이상이 답안지를 채우지 않고 중간에 나갔기 때문에, 내용이 어떻든 답안지를 다 채웠다는 것 자체에 큰 가산점을 받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물론 긍정의 힘을 믿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은 있다.
개인적인 내 경험을 쓴 것이라 이 글을 읽고 누군가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면 한다. 나도 힐링 서적이나, 지나치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강조하는 자기 계발서를 읽고 공감은 되지 않고 공허함을 느낀 경험이 있다. 긍정적인 마음을 품기 전에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으로 날 속이거나 내 감정을 억누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단 나의 상태를 온전히 포용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긍정적인 사고가 약으로써 기능하는 것 같다.
내가 나이를 먹고서도 큰 소리 내어 엉엉 운 적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구청에서 열리는 토론대회에 결선 진출을 못했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서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아 가며 열심히 준비했고, 나 스스로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결선에 아예 진출하지 못한 건 큰 충격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닥을 치며 큰소리로 울었다.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처음엔 위로해주시던 엄마도 몇 분 지나서 시끄러우니 네 방에 들어가라 하실 정도였다.
평상시에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결선 진출하지 못한 건 나에게 절대 좋은 경험이 될 수 없었다. 좋은 경험은 명백히 상을 타는 쪽이었다. 그동안 쏟은 노고와 시간을 생각하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기에 통곡을 했다. 이십 대가 된 지금도 그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좋은 결과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내가 포용할 수 없는 일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런 상태의 나에겐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주입시키기보다는, 분노하고 애통해하는 나를 포용해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누군가는 인생이 고해(苦海)라고 말한다.
난 이왕이면 인생엔 멋진 상들이
잔뜩 숨어있다고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박해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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