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빅터 플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2 [도서]

글 입력 2020.01.05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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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1편"과 이어집니다.


 

독자들에게 책에서 추린 문장이 닿길 바라는 마음에 두 편으로 나누었다. 이 글들이 아트인사이트 오피니언의 n분의 2개의 시리즈로 채워진 것은 필자의 의도적인 욕심이자 바람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싶다. 우울감을 겪는 이들과 언젠가 또 한번 ‘현타’가 올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두 개의 선물이다. 하나에 하나 더 얹은 상품으로 가치와 깨달음이 배가 된 걸 어필하고자 한 것이니 모두에게 좋은 바람이 일었으면 한다.


 

 

범 결정론에 대한 비판



『범 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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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디로 자율적인 존재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굴복과 맞서 싸움 중 그때그때 자신이 판단하며 주체가 되어 책임을 진다. 위 문장에서 나는 “어떻게”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도서관에서 본 책을 찾기 전, 왠지 모르게 손이 갔던 책에서도 그랬다. 이 역시 좋은 문장이어서 잠깐 언급하자면 ‘사람은 왜 사나요? 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라고 언급하며 ‘삶은 그저 하루하루를 수습하고, 그 와중에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즐기고,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단지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그 일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HOW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를 추천한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특성이 있듯, 그 누구도 한 명의 삶에 정답을 가리키거나 똑같은 길로 인도할 수 없다. 접점에서 만나는 것 뿐, 우리는 모두 서로 자신의 온도대로 살아가는 것이니, 이 역시 예측 불가능에서 오는 무한한 가능성이 사람들에게는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타가 오며 왜 살지? 라는 나의 물음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 이었다, 삶이 내게 물어오는 것에 답하며 그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집중하며 살리라. 각자에겐 열망하는 것이 있다. 그를 찾기 힘든 이는 일단 어떻게 살고 싶은지 쭉 적어 내려간다. 매일 여행하는 삶, 삼시 세끼 먹으면서 고양이 한 마리랑 사는 삶, 독립해서 자율적으로 살고 싶은 삶, 돈 많이 벌거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삶 등 다양할 것이다.


단순히 그런 삶을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그 삶이 곧 내 삶이 되길 너무나 열망한다면, 당신의 첫 번째 임무는 끝이다. 다음은 더 간단하다. 그 삶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일단, 일정량의 돈을 벌어야 한다던지,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던지, 고양이 사료나 캣 타워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현실에 부딪힌다.


전투적으로 싸울 것인지 굴복할 것인지 잠시 보류할 것인지는 자신의 판단에 달려있다. 그런 와중에 분명 우선순위라는 것이 생길 것이고, 일단은 그 1순위를 목표로 설정하고 달려 나가는 것이다. 가는 그 길이 의미에 닿기 위한 나만의 자기장 안이니,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목표가 끝나면 그다음, 그다음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학교 수업 혹은 이런 저런 책에서 본 것들의 총체이고, 더불어 짧지 않은 시간 방황하며 겪은 경험이자 도움을 받은 방법이었으니, 추천한다. 목표를 설정, 그 후엔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고 하루하루 투쟁해 나가는 독자와 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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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속에서의 낙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가 있다. 강요되지 않은 낙관적인 생각이나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함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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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 엄청나게 아픈 일이다.

 

고통 없는 세상이 존재했으면 좋으련만 삶은 때때로 사람을 무진장 힘들게 한다. 지금은 추억할 날이지만, 구정에 아르바이트한 적이 있다. 넘쳐나는 손님에 나 혼자 그 넓은 홀을 지켜내기란 너무나 버거웠다. 그 와중에 한 아주머니가 치우는 것을 잠시 도와주셨는데 그 5초 사이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아 낼 뻔했다. 집에 와 서럽게 울고 난 후에 든 감정은 독한 감정이었다. 이제는 두려운 게 없다, 덤벼라 세상아 하며 독기가 피어올랐던 그때가 생생하다.


그 5일 동안의 감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건설적이고 패기 있게 세상 앞에 설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었던 건 아프지만 좋은 일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도 그 이후에 ‘고통’이란 단어가 내겐 조금은 특별해졌다. 고통이란, 온실 속 화초로 살다가 필히 겪어야 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이자 한 단계 성장하게 해주는 신이 주신 장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뭐든 겪어야 아는 것 같다. 세게 겪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이겨 냈다는 것, 그 안에서 성취와 의미를 찾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비극 속에서도, 살기 위한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무언가’를 찾아가기 마련이니까.


 

 

삶의 의미



『실직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하고,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을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자들에게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후에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 길은, 자기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중략)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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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하기. 돈을 받지 않고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건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학창 시절부터 강요된 봉사 여러 번, 성인 이후 자발적 봉사를 손에 꼽을 정도만 했던 나는, 봉사 그 자체도 좋았지만, 그 안에서 만난 이들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생각하는 것들의 총체가 어쩌면 지금의 내 가치관이 있기까지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반성하고 배우면서 자연스레 알아갔던 그들의 매력을 기억하리라.


상황을 바꿀 수 없지만, 내 태도는 선택 할 수 있다는 말은 사뭇 무섭게 느껴진다. 이와 비슷한 문장이 명언 혹은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이와 같은 문장을 만나기 전, 그 상황의 분위기에 쉽게 휩쓸려 한껏 격앙되거나 날이 서거나 짜증을 내 거나 침울해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제를 만나면 해결하면 된다.”고 하는 말에 조금이나마 감정을 컨트롤해갔던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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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이런 경우였다. 물건을 사고 오는 길, 근처 분식집에서 사야 할 것을 잊은 채 집에 온 적이 있다. 그 전의 나였다면 짜증 내며 나를 원망하고, 배고픈 그 상황과 다시 몇 분을 걸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화를 냈을 것이다. 그리고 엎어져 한참 분을 삭이다가 결국에는 털레털레 울상인 얼굴로 분식집에 갔을 것이고, 먹기 전까지 한숨에 지침의 감정을 양껏 드러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도를 선택하고,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을 배운 이후에는 좀 달라졌다. 아마 계속해서 차츰차츰 변할 것이다. ‘놓쳤어? 그럼 다시 하면 되는 거야.’, ‘항상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다 써서 지금 당장 너무 화가 나? 그럼 지금 가까운 ATM기 찾아가서, 카드 넣고 돈 뽑아오면 돼. 그럼 해결되는 거야.’ 하는 생각. 당장에 상황에 안주해 있기보다는 ‘해결 방법’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태도를 ‘선택’까지 할 수 있는 것에, 어른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감정까지 책임지고, 태도를 결정한다는 건 결국 나를 위한 일인 것이다. 내 정신 건강은 내가 책임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시험 하나가 계속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한다. 그 분위기에 취해 있지 말고, 뭐다? 공부하면 되는 거다. 초조함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해내면 되는 것이다. 그래, 모조리 씹어 먹어 치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하면, 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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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이 시리즈 오피니언에 애정이 많이 갔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나보다~ 하고 새삼 느낀다. 완벽한 사람이 될 순 없지만, 나아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책이 내게 감동을 선사해주었듯 누군가에게도 그러길 염원한다. 삶의 의미로 어깨가 무거워질 때는 가볍게 생활하고, 그렇게 놀다 지치면 다시 의미를 찾는, 그리고 찾아내는 내가 되길. 파이팅하자! 밥이 되든 죽이 되든 해 보는 거야.

 

 

[서휘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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