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차별주의자"의 세계 [사람]

글 입력 2019.12.2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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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차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그 평등의 개념을 성취하며 성장했다. 인간을 계급으로 분류하여 위계를 매기는 시스템은 증발했다. 성별, 인종, 장애 등에 의한 차별이 정당하지 않다는 의식은 사람들에게 이미 정착돼 있다. 헌법에도 명시돼 있다. 헌법 11조는 명시한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 11조가 명시한 평등이 진정 사람들에게 내면화 돼있는가.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관찰하면서 세계를 보는 렌즈를 갖는다. 어떤 세계에서 어떻게 서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갖는 렌즈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내 렌즈에 투영돼 보이는 세계로 타인의 세계를 재단한다. 거기서 편견이 태동한다. 고정관념이 생긴다. 차별의식도 그 때 태어난다.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 된 건 2007년이다. 이미 헌법에 표기된 내용을 또 다시 입법 한 건 법령으로 구체적 내용을 다뤄야 실질적으로 집행할 수 있어서다. 헌법에 주거소유와 이동의 자유를 명시했더라도 그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 예산, 제도, 절차 등을 법령으로 지정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차별금지법은 발의되자마자 논란이었다. 차별금지 목록에서 병력, 출신국가. 언어, 가족형태, 범죄, 학력 등이 제외됐다. 이마저도 반발에 부딪혀 철회됐다가 2013년에 다시 제기됐다. 입법화는커녕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미완된 채 표류중이다.


논란의 이유 혹은 반대의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나서서 법으로 제도화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냐는 거다. 차별의 가시화는 과거보다 줄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거기에 무지하지 않다. 이성적 개인이 모인 사회이니 자발적으로 차별의식을 검열할 거란 기대다.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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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9월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공청회'에 참석한

장애아 부모들이 무릎 꿇고 호소하는 모습.

출처 : 서울장애인부모연대 페이스북

 

 

2017년 서울시교육청은 강서구 공진초등학교 폐교부지에 장애인학교(서진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으로 주민토론회를 열었다. 당시 총선에 출마한 김성태 의원이 폐교 부지에 국립한방병원을 세우겠다고 공약하여 대립이 점화됐다. 교육청과 장애학생의 부모, 지역 주민의 고성과 욕설이 난무했다. 장애학생의 부모는 토론회 도중 무릎 꿇고 울면서 호소한다.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장애아들에게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쇼하지마!”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은 그렇게 응수한다. “장애인은 한군데 몰아넣어야 한다.”, “장애인이 많으면 무섭다.”는 발언이 이어졌다.(박수진 기자, <“장애아 학교 짓게 부디…” 또 무릎꿇은 부모들>, 한겨레, 17.09.06)

 

차별을 넘어 혐오다. 혐오감정에 이성은 없다. 단지 싫은 ‘감정’이다. 지역주민들이 장애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이유는 집값이 떨어진다는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장애인을 자기 시야에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 싫어서다.


그리고 싫다는 감정을 맘대로 표출할 수 없다는 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거다. 지난달 12일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 외 40명이 발의한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이 그 예다. 개정안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 사유 중 ‘성적 지향’을 삭제해야 함을 언급한다. “성적지향의 대표적 사유인 동성애가 법률로 적극 보호돼 사회 각 분야에서 동성애가 옹호, 조장돼 왔다. 반면, 동성애에 대한 양심·종교·표현·학문의 자유에 기반한 건전한 비판 내지 반대 행위가 오히려 차별로 간주돼 금지되고 있다”(장일호,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지배하는 세상”, 시사IN 19.11.26) 해당 개정안을 발의한 집단은 인간은 무엇인가 싫어할 자유가 있음을 천명한다. 자유에 대한 권리가 차별금지보다 더 높은 위계에 있다고 발언하는 듯하다.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호오는 자기 취향이고 기호다.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게 뭐가 문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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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 6월 대구시 동성로에서 열린

대구기독교총연합회의 동성애 반대 집회

출처 : 일요신문 

 

 

김지혜 교수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지적한 것처럼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상황 혹은 위치에 따라서 싫은 걸 싫다고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는 경험을 종종 한다. 학생으로서 교수에게, 부하직원으로서 상사에게 싫은 걸 싫다고 말하기 두렵다.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관계엔 권력이 작동한다는 걸 당신과 나는 인지한다.


권력 있는 누군가가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단지 취향의 발로가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교수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취향이나 기호가 아니다. 권력 그 자체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p142, 창비, 2019)


그리고 권력은 높은 위계의 누군가만이 획득하는 고정된 속성이 아니다. 관계·집단·범주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모하는 무엇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권력을 갖고 있다 해도 이주남성이 한국여성보다 권력을 가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높은 위신과 명예를 가진 이만이 권력이란 자본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게 뭐가 어떻냐,는 문제제기가 등장하는 셈이다. 장애인이 무섭다, 몰아넣어야 한다고 말한 지역주민도 이런 맥락이었을지 모르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집단 사이에서 누가 권력을 가진 주류집단인지는 자명하다. 이성애자의 “동성애자가 싫다”는 말은 동성애자의 그것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의 “장애인이 싫다”는 말은 장애인의 그것과 다르다. 무수한 차별이 바로 그 싫다는 감정에서 출발한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p180, 창비, 2019) 싫다는 감정은 배척으로 이어진다. ‘증오범죄’란 표현이 등장한 것처럼 싫음이 동기가 돼 범죄로 이어지는 일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다.


장애인 학교 설립을 둘러싼 강서구 공청회로 다시 돌아가보자. 공청회는 고성 섞인 반대로 마무리된다. 해당 상황을 지켜본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애인 학교 설립 반대행위는 헌법 11조에 위배된다는 의견을 표시했지만, 지역주민들의 반대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지자체 역시 지역민들의 반대를 이유로 학교 설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1년 넘게 계류되다가 지난해 9월 국립한방병원 설립 이행을 전제로 합의됐다. 시공에 들어가 구체적 개교 일정까지 나왔는데 주민들의 반대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정확한 개교 시점이 불투명하다. 반대 논거는 여전하다. “장애인이 싫다.”


헌법 31조는 교육권에 대해 명시한다.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강서구 장애인학교를 둘러싼 갈등은 주류집단이 소수자 집단을 배척할 권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류’가 사회적 입신에 성공한 특정 집단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다수의 싫다는 감정이 어떻게 소수집단의 권리를 박탈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싫다’는 감각만 있는 건 아니다. 서진학교 설립에 관한 공청회 내용이 언론에 다뤄지고 부모들이 무릎 꿇은 사진이 게재되자 사람들은 동정했다. 국가와 제도가 정비돼 이들에게 시혜를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언급하는 식이다. 장애인의 교육은 당위적 권리가 아니라 시혜다. 개인이 당연히 보장받아야할 교육권이란 맥락은 삭제됐다.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맥락만 남았다. 그 같은 맥락엔 장애는 열등하고 불운한 것이라는 의식이 전제돼 있다. 열등하고 불쌍하니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거다.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다.


 

17년 10월 한 장애인이 신길역에서 장애인리프트에 탑승하려다 계단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대한 시위를 개진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신길역에서 시청역까지 매 정거장에서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6개역을 이동하는데 1시간 40분이 걸렸다.


“나가 xxx아. 왜 여기 와서 이래.”, “시민들을 볼모로 잡으면 어떻게 하냐!” 시민들은 노려보고, 욕하고, 분노했다. 일부는 시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절대 다수의 무관한 비장애인에게 불편을 초래한다는 까닭이다.


김원영 변호사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서 장애 역시 피부색이 검거나 성별이 남자인 것 같은 정체성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때문에 개인의 책임이나 불운이 아니다. 이 정체성이 ‘장애’가 되는 건 사회가 그 정체성을 제대로 수용할 만큼 구조화 되지 않아서다. 그러니 그들이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킨 건 부조리에 대한 투쟁이고 내 정체성을 수용하라는 구호다.(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사계절, 2010, p125)


시위를 주도한 박경석씨는 미신고 집회를 하고 교통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재판받았다. 박경석씨는 실제로 법을 어겼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만들어진 법도 때로 부당하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창비, 2019, p164) 법은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그게 법의 필연적 한계다. 다수의 이해관계를 따르니 소수자의 입장이 불리한 경우가 발생해서다. 이 경우가 그렇다. 역사에 설치된 장애인 리프트는 무용지물이었다. 장애인도 시민이다. 그러니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는 건, 법과 제도가 다수의 입장으로만 집행돼서다. 이것 역시 차별이다.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이동권이 다수 집단에게만 적용되는 현실이다. 시민들이 욕하고 분노하고 노려본 건 자기 이동권을 침해받았다고 느껴서다. 똑같다. 장애인은 시민이 아닌가. 장애인은 ‘대중’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가.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 정책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건 2000년대다. 그 전까지 그들의 이동은 지금보다 더 제한됐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는 모든 차원에서 온당하다. 과격한 방식을 취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 귀기울일만한 방식을 취한 거다.


결국 다시 차별금지법이다. 법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조치인 동시에 사전 예방의 목적도 가진다. 그리고 한 사회가 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선언이다. (장일호,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지배하는 세상”, p18, 시사IN 19.11.26) 때문에 차별금지법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의지의 발로다. 누구나 평등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차별은 은폐돼 있다. 실은 차별의식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법의 제정 여부에 따라 한국 사회의 차별 철폐 의지를 확인할 수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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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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