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욕망과 결핍의 경계에서 외줄타기 [공연예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관점에서 바라본 연극 <맨 끝줄 소년>
글 입력 2019.12.2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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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중력과 결핍이라는 근원의 경계



인간은 무수한 욕망을 마주한 채 살아간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 끝없이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 몸서리 칠만큼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욕망까지. 그중에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강력한 욕망이 존재한다. 애써 감춰둔 사실이나 은밀한 부분을 파헤치고 싶은 인간의 오랜 본성.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훔쳐보고 싶은 욕망, 즉 관음(觀淫)의 욕망이다.


연극 <맨 끝줄 소년>에는 아무도 그곳을 못 보지만 거기 앉으면 다 볼 수 있는, 맨 끝줄에 앉는 한 소년이 등장한다. 그 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 속 세계를 살아가는 허구의 인물도, 이를 관찰하는 관객조차도 욕망이라는 필수 불가결한 힘에 굴복해버릴지도 모른다. 혹자는 관음이라는 욕망의 중력에 이끌려 허구와 실재의 경계에서 방황할 수도 있다. 이토록 강렬한 욕망의 힘과 기저에 깔린 결핍, 그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을 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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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고등학교 문학 선생 헤르만이 학생들의 작문 과제를 채점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써보라’라는 주제에 학생들은 하나같이 성의 없고 수준 미달인 글을 제출하는데, 그중 한 학생의 글이 헤르만의 눈에 띈다. 항상 맨 끝줄에 앉아 눈에 띄지 않는 학생 클라우디오의 것이다. 헤르만은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가진 클라우디오의 글에 점차 매혹되며 글쓰기 수업에 열을 올린다. 더군다나 그 속에는 같은 반 친구 라파의 가족에 대한 냉소와 은밀한 욕망이 담겨있지만, 문학은 허구의 세계이며 허구는 안전한 가짜라는 전제를 깔고서 탐닉하기를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클라우디오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반면 윤리나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수학과 과학이 논리와 진공의 세계라면 그에 반해 문학은 복잡하고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이 가득한, 피하고 싶은 현실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개념이 아름다운 만큼 그에게 현실은 지루하고 의미 없다는 말인데 그런 그가 문학 수업을 통해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는 스승처럼 자기가 쓰는 글 속으로 도피하고 탐닉하기를 반복한다. 이는 피하고 싶은 현실 세계에 대한 정면 승부가 아닌, 또 다른 차원으로의 도피 행위인 건 아닐까.


 

 

클라우디오가 염두에 둔 ‘다른 사람’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필자가 궁금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왜 클라우디오가 타인의 삶을 관음하고 욕망하게 되었는가?”라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클라우디오의 반응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지, 좋은 결말은 무엇인지 등 헤르만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며 작품을 수정하고 글쓰기 수업을 기다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클라우디오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는 클라우디오가 자신이 쓴 글에서 헤르만과 그의 아내인 후아나를 인물로 등장시키고, 헤르만은 자신이 요구하던 갈등과 반전의 상황에 자신과 아내가 처해 있음을 깨닫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말에서 드러나게 된다. 즉 ‘다른 사람’은 후아나를 의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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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클라우디오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게 된다. 읽기를 멈출 수 없었던 헤르만 부부는 소설을 탐닉하는 것을 넘어서 집착하기 시작한다. 특히 소년의 시선이 불편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후아나는 어느 순간부터 작품에 빠져 허구와 실재를 확인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라파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부부싸움을 관찰하다 못해 라파의 어머니인 에스테르가 '더 예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소감까지 밝힌다. 이들은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현실적인 호기심에서 더 나아가 소설 속에 언급된 내용을 기반으로 라파 부부의 일상을 추측하고, 클라우디오의 심리까지 상상한다.

 

이렇게 헤르만 부부가 소설에 과몰입하는 사이 라파 가족에 대한 클라우디오의 글쓰기는 끝나고 만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의 글이 계속된다. 특히 <맨 끝줄 소년>에서 두 명의 여성 인물들이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할 때 극의 사건과 긴밀히 만나며 사건을 일으킨다. 가령 라파의 어머니 에스테르에게 보낸 시가 발각돼 라파의 집에서 쫓겨나거나, 헤르만이 없는 헤르만의 집을 방문해 후아나와 만나 그녀의 하얀 발목을 훔쳐보며 글의 마지막을 완성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으로



클라우디오가 라파의 가정에 접근했던 목표는 헤르만의 관심을 끌어 그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클라우디오는 헤르만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기심을 느꼈다. "저 아저씨 집은 어떨까? 누가 저런 남자랑 살 수 있을까?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여자가 있을 거야.”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클라우디오에게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바로 헤르만과 사는 ‘완전히 제정신 아닌 여자’이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 ‘들어갈 방법’으로 라파 가족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집요하게 타인의 가정을 맴도는 클라우디오의 욕망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한, 비틀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아들이 동성인 아버지에게는 적대적이지만 이성인 어머니에게는 호의적이며 무의식적으로 성적 애착을 가지는 복합 감정을 일컫는다. 프로이트는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려는 경향이 남근기(phallic stage, 4~6세)에 분명하게 드러나며, 잠복기(latency stage, 6~12세)가 되면 다시 억압된다고 주장했다.

 

세 살에서 다섯 살 무렵의 소년은 엄마의 사랑을 독점하기를 원하지만, 라이벌인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하며 질투심을 느낀다. 그래서 아버지가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어머니와 같이 자겠다고 떼를 쓰거나, 아버지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의 감정을 알고 하게 될 복수를 두려워한다. 이 단계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 남근을 가져갈 것으로 의심하고 '거세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때 소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머니에 대한 독점욕을 양보하고 아버지의 행동을 흉내 내고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부모의 인정받는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타협을 수용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만든 인간의 임무라고 말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이다. 더 나아가, 트라우마를 피하고자 점차 어머니 대신 일반적인 여성들을 성적 충동의 대상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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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관점에서 클라우디오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극 중 클라우디오는 아버지와 함께 살긴 하지만, 실질적 관계는 단절된 것으로 암시된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함께 사는 클라우디오는 자신에게 가족이 없다고 생각하며, 9살에 가출한 어머니의 부재를 통해 그에게 결핍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상황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클라우디오는 어릴 적 욕망의 대상인 어머니의 존재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거나, 아버지의 존재를 수용하는 타협의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발생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성들과 어머니에 대한 성적 충동을 혼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기저에 깔린 결핍을 애정 결핍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라파의 어머니를 연민하고, 라파의 아버지를 부정적이며 공격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후아나를 욕망하는 것은 어머니의 결핍을 채우려는 행위이며, 클라우디오의 결핍이 어긋난 욕망으로 발현된 예이다. 이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으로 연극을 읽어낼 수 있는 실마리가 충분히 생긴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부족한 결핍을 불온한 욕망으로 채우기를 반복하는 클라우디오의 외줄타기를 마주하게 된다.

 

 

“처음엔 자신의 결핍을 채울 재료를 찾기 위해 세상을 바라봐요. 그래서 자신한테 없는 걸 가진 라파 가족을 관찰하게 되는데, 그들 또한 다른 결핍을 안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클라우디오는 자신의 결핍을 채울 재료를 찾기 위해 어느 공원의 벤치에서 무심하게 세상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세상과 이어주는 매개인 ‘글쓰기’를 통해 바라보는 것을 넘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본 풍경을 글쓰기 재료로 삼게 되고, 그는 쓰기 위해 봐야만 했다. 그래서 수학 과외 핑계로 라파에게 접근해 그의 집에 들어간다. 그렇게 라파의 집 현관문 앞, 거실, 그리고 발코니에서 그가 앉았던 공원의 벤치를 바라보기까지 타인의 삶 속에 개입해 남몰래 관음하며 위험한 글쓰기를 행했다. 이 모든 행위의 동력은 강력한 욕망과 결핍이 아니었을까.

 

이 작품은 보고, 쓰고, 읽는 행위가 전부인데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 이는 욕망이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진실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결핍을 품게 된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결핍을 극복하거나, 억누르거나, 비틀린 방향으로 발산한다. 클라우디오뿐 아니라 욕망과 결핍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살아가는 우리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결핍 속에서 평생 자기 자신과 사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클라우디오의 글처럼 각자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에.

 

 

참고문헌

 

이은혜, 「<맨 끝줄 소년> 연습 일지」, 『맨 끝줄 소년 프로그램』, 예술의전당, 2019, 16쪽.

이은경, 「맨 끝줄 소년: ‘지켜보기’로 관점의 차이를 말하다」, 『공연과이론』(60), 2015, 259-264쪽.

엄현희, 「글쓰기에 대한 불온하며 통렬한 상상 <맨 끝줄 소년>」, 『연극평론』(80), 2016, 50쪽.

정성훈, 네이버 지식백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019.12.21.

이동귀, 네이버 지식백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2019.12.21.

김희경, 「결핍과 욕망을 횡단하는 두명의 클라우디오」, 『맨 끝줄 소년 프로그램』, 예술의전당, 201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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