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I'M STILL ALIVE, 창문 너머에 삶이 있었다 -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글 입력 2019.12.2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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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100살 때 뭘 하고 있을까? 해가 바뀔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난다. 올해로 스물 여섯. 이제 내년에 스물 일곱으로 바뀔 나이는 백세즈음 이르려면 한참 남은 듯 느껴지면서도, 점점 순식간에 내 손을 떠나가는 시간을 느끼노라면 그리 먼 때는 아니구나 싶다. 백세. 너무 나이가 많다. 난 허리를 제대로 펴고 걸을 수나 있을까? 지금도 무릎 아파서 끙끙대는데 그때엔 어디 밖을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노년의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때론 너무도 아득히 멀게 느껴져 대수롭지 않게 미래의 고민으로 미뤄버리곤 한다. 그건 사실 대단한 일이다. 나이가 세자리수에 가까워진다는 것 참으로 별것 아닌 시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굉장히 대단한 일이다. 무엇이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하면, 삶의 마지막이 결국 죽음이라 했을 때 이와 가까워지는 시기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에서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죽기 전까진 죽은게 아니다. 노년은 죽어가는 과정도 아니다. 심지어 절정의 시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너무 오래 살았다고 해서 당연하게 여겨질 삶이란 없다.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알란은 그래서 창문을 넘었다. 100세 생일을 축하하려는 바로 그 날. 그가 지내던 양로원 안에는 '100번째 생일'이라는 기념적인 숫자를 축하하려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그들은 아무도 몰랐다. 알란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저 알란은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알란이 창문을 넘은 순간, '그냥 할아버지'였던 그는 '세계 각국을 돌며 산전수전 헤쳐온 역사 속 인물'이 된다.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시간을 알기 전까지 그 누구든 그를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난 영화를 볼때도, 연극을 볼때도 이게 너무 좋았다. 아주 평범하고 별 일 없어 보이는 특별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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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노인은 망설임 없이 창문을 훌쩍 넘어,

자신의 삶을 되찾아 떠나갔다.

마지막 장면까지 완벽했던 연극.


 

창문을 넘은 알란은 좌충우돌 사건을 몰고 다니며 짧지만 굵은 여행을 시작한다. 생각과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때그때 충실하게 본능을 따르는 알란. 그는 본의 아니게 돈이 가득 든 갱단의 가방을 훔치게 되고, 이런 그를 뒤쫒는 갱단과 추격전을(시끄럽고 정신없지만 놀랍도록 느긋하고 별볼 일 없는 추격전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불운의 인생사를 지닌, 좀더 젊은 노인과 세상의 거의 모든 전문 지식을 습득했지만 아직 고졸인 한 청년, 사랑스러운 코끼리를 키우는 여인 등을 만게 된다.


기막힌 우연의 힘과 톡톡 튀는 재치를 바탕으로 위기를 모면해가는 그들은 알란이 살아온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친해진다. 연극에서는 이러한 현재의 시간과 과거 알란이 지내온 기구하지만 다이내믹하고 흥미로운 인생사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과거, 그는 온갖 사건을 몰고 다니며 세계 핵 전쟁까지 관여하게 됐음에도 마음에 부담감이 없다.


늘 담백하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눈 앞에 놓인 상황에 집중해 그때그때 선택하고, 무엇보다 그 결과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해봤자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그런 식으로 적까지 아군으로 만드는 무시무시한 그의 매력. 알란이 제 삶을 대하는 이러한 마인드는 연극을 보는 내내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용기를 주었다.


지나치게 무겁거나 진지한 톤이 아니라 좋았다. 다만 조금 아쉬운건 영화에서 느껴졌던 매사에 극도로 무관심하고 덤덤한 알란의 캐릭터성이 드라마틱한 전개를 위해서인지 다소 감정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원작 특유의 블랙유머가 약해졌지만, 그 대신 좀더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가 전개돼 영화와 연극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던 연극이었지만, 끝나는 순간까지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볼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연기력과 감각적인 무대 연출에 비결이 있었다. 배우 다섯명이 매번 여러명의 극중 인물을 소화해야 할뿐만 아니라 나레이션을 진행하듯 극중에 개입하는 구성상, 핑퐁핑퐁 말장난하듯 긴장감 있게 오가는 대사와 연기가 눈과 귀를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발을 경찰견으로 역할하게 만들거나, 한 사람이 앞뒤로 돌며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장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게 됐다. 특히 세계 지도를 형상화한 듯한 무대 배경의 부스를 백번 활용해 때로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때로는 바다 위 휘청이는 선박 위로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이끈 점이 굉장히 재밌었다.


커튼콜 이후 퇴장하는 장면도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흘러간 모든 이야기를 천천히 불빛으로 띄우며, 이를 바라보고 있던 암전된 무대 위의 알란은 관객을 등지고 다시 한번 창문을 넘는다. 그는 이번에 어떤 하루하루를 만들어갈 것인지, 그리고 나 역시 언제쯤 창문을 넘어볼까 곱씹게 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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