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회가 잘 짜놓은 한 편의 연극에 미스 캐스팅된 인물, "후회하는 자들"

연극 <후회하는 자들>
글 입력 2019.12.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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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자들>은 트랜스젠더라는 특정 인물들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올린다. 극 중 주인공들은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다. 미카엘은 1994년 50살의 늦은 나이에 성전환 수술을 거쳤고, 올란도는 1967년에 스웨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여성의 삶을 살다가 다시 재수술해 현재 남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8년, 이제 60대가 된 이들은 서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후회’, ‘성 정체성’, ‘성적 재규정’과 관련된 주제를 마주하며 느낀 생각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철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말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된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가족 사이의 갈등, 예를 들어 부부 사이의 갈등, 부자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등, 꽤 많은 이들이 겪는 이 같은 상황은 우연성의 결과가 아닌 각자가 맡은 역할 놀이에 충실함으로써 일어나는 필연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라 여겼던 ‘감정’조차 역할놀이에 의한, 그러니까 일종의 메커니즘에 의한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하나의 의견에 불과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보면 꽤나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카엘은 본인이 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역할놀이라고 했다. 잠시 ‘미카엘라’라는 역할을 맡은 것이고, 이제는 그 역할을 끝마치고 다시 미카엘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올란도도 그런 미카엘라/미카엘의 말에 공감했다. 올란도는 ‘이사도라’라는 역할을 맡기로 결심하고 그 배역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 오면 참았던 숨을 몰아쉬곤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배역 중에 자신에게 꼭 맞는 것이 있을 거라 믿었을 것이다. 이사도라는 성전환 수술 이후, 남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얼굴에 화장을 계속해서 덧바르고 더욱 화려한 가발을 썼다. 반대로 미카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후회하는 자들] 올란도(김용준 분) 과거 사진.jpg



“그 당시엔 나 자신에 대해 너무 경멸하고 있었어요. 나에게 성전환은 옛날 ‘미카엘’에서 벗어나서 ‘미카엘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였죠. …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몸으로 새 출발할 수 있다 생각했죠.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착각했어요.”


 

두 인물은 모두 남성에서 여성으로 생물학적, 사회학적 성전환을 겪었다. 그 이후에 새로운 삶이 펼쳐질 거라 믿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카엘은 어릴 때부터 ‘남성’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다. ‘호모 새끼’라는 말을 듣고 살았고, 그 경험들은 스스로가 어딘가 부족하고 잘못된 몸뚱이로 태어났다는 느낌을 주었다.


처음으로 긴 가발을 쓰고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었을 때, 정말 잘 어울린다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스스로가 가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매일 부정 당하던 모습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변화와 그에 따른 주변인들의 인정과 수용은 본인의 정체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이사도라/올란도에게는 오래전부터 간직해오던 꿈이 있었다. ‘어느 여자’들처럼 집을 청소하고, 저녁이 되면 식사를 준비한 뒤, 일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꿈에 그리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편을 속인다는 것에 마음 한편은 항상 불편했지만 꿈에 그리던 배역을 따냈을 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은 어느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다. 이사도라/올란도는 남성을 좋아하고,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 그러한 묘사는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었다. 몸의 변화는 곧 사회가 본인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후회하는 자들] 미카엘(지춘성 분) 과거사진.jpg

 

 

그들은 ‘여성’으로 성전환하면서 더욱 부조리함을 느낀다. 남성일 때는 몰랐던, 여성이기에 겪는 불합리한 상황들과 마주한다. 미카엘라/미카엘이 고객센터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그가 겪었던 이야기는 그것을 잘 드러낸다. 그가 미카엘보다 좀 더 가늘고 높은 톤의 음성을 가진 미카엘라로 통화를 했을 때 상담원은 몇 번이고 미카엘라를 기다리게 했다. 화가 난 그가 좀 더 굵고 낮은 톤의 미카엘로 통화를 했고 상담원은 곧바로 문제 해결을 도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사회가 부여하는 역할놀이에 우리가 얼마나 심취해있는지 말해준다. 그와 같은 일련의 상황들은 여성으로의 성전환이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삶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느끼게 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성(Sex)을 바꾸면 사회가 부여하는 사회적 성(Gender)도 바뀌는 것일까. 생물학적 성과사회적 성의 관계는 필연적인가, 절대적인가. 아니면 필요에 의해 부여된 하나의 역할놀이일 뿐인가. 이사도라/올란도가 성전환 수술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폭행했고 11년의 결혼생활은 종지부를 찍는다. 올란도가 원했던 것은 섹스 Sex의 변화였을까, 젠더 Gender의 변화였을까. 그는 이제 이야기한다. ‘나는 누구이기를 원하지 않아요, 나는 그저 나이기를 바랄 뿐이에요.’ 다시 올란도가 된 그는 여전히 화려한 옷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남성을 좋아한다.

 

개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회를 우리는 원한다. 하지만 사회는 필요에 의해 규정되고 정의되며 그것은 다시 우리의 허리를 조른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은 경멸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사회가 잘 짜놓은 한 편의 연극에 미스 캐스팅된 인물, 곧 연극을 망치는 이가 된다. 과연 우리의 성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여성이란 무엇인가? 남성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정체성은 하나의 단어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인가?

 


[후회하는 자들] 홍보컨셉 사진.jpg

 

 

인터뷰가 끝난 후 무대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대화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저녁에 뭐 드실 거예요?’ ‘역시 그게 최고죠!’ 극이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 오늘 저녁거리를 고민하고, 내일의 하루를 고민한다. 철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회구조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변화시켜나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몫 아닐까.


사회에 만연한 배제를 몸으로 감각하던 시간들은 이제 문득문득, 어쩌면 꽤 자주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만든 작은 균열은 우리 일상을 어떤 감정으로 채워나갈까. 이는 언제나 변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흙에 생긴 균열과 그 속에 떨어지는 촉촉한 생각들은 우리 정체성 또한 말랑말랑한 찰흙처럼 변화 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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