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딴소리 아닌 딴소리 "딴소리 판" [공연]

그 어떤 말보다도 공감을 이끌어낸 '거지들의 딴소리'
글 입력 2019.11.30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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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화는 그 본연의 색깔과는 관련 없이 그저 그 시작으로부터 긴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루하다는 이미지를 얻곤 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판소리나 탈놀이 등의 우리나라 전통 악극이 그러했다. 이들은 서민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았던 장르였지만 오늘날에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문화생활과 멀리 떨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난 11월 초 <딴소리 판> 공연의 문화초대를 권유받았을 때 나는 판소리를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으니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넘겨버렸다.

 

하지만 이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라’는 대표님의 메시지를 받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문화초대를 통해 처음 접해보는 문화생활들을 기꺼이 반겼으면서 왜 판소리는 시도할 생각도 않고 배제해 버렸을까? 나의 편협했던 태도에 반성하며 친구와 함께 충무로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놓친 탓에 허겁지겁 달려가는 와중에도 남산골한옥마을은 아름다웠고 남산타워는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사실 나는 부끄럽지만 남산골한옥마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당연히 서울남산국악당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겉보기에는 작아 보이는 한옥에서 어떻게 공연을 하는지 의아했지만 공연장은 다름 아닌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대 디자인이었다. 크고 밝은 달과 난데없이 뿌리를 드러낸 채 매달린 나무가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공연 속 광대들의 엉뚱한 판 깨기처럼 논리적이지도, 사실적이지도 않지만 별나고 유쾌한 어딘가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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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소리 판>, 판소리 딴인지 딴소리 판인지 모를 익살스럽고 장난기 어린 제목과 오묘한 무대 디자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이 공연은 온갖 딴소리로 가득 차 있다. <딴소리 판>은 판소리의 교과서와 같은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등의 다섯 작품을 멋대로 비틀고 제멋대로 깽판을 쳐 버린다. 당시로서는 수많은 민중들의 공감을 얻었겠지만, 어찌 되었던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때와는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공연은 총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다. 그 시작은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는 소리꾼의 판에 난입한 거지들의 판이다. 춘향을 구해야 할 타이밍에 등장한 몽룡은 장원급제를 하고 당당히 돌아온 암행어사여야 하건만, 그는 거지꼴로 돌아온 ‘아맹거사’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폭삭 망한 채 돌아온 몽룡은 천, 방, 지, 추 그리고 마골피 총 7명의 거지들과 함께 들이닥친다. 어처구니가 없는 춘향이 그를 다그치자 몽룡은 뻔뻔하게 밥을 요구한다. 당황한 춘향은 거지들의 이야기라도 한 번 들어 보기로 한다.

 

그들은 오직 ‘밥’ 하나만 좇는다. 밥을 얻어먹기 위해 봉사로 위장하고 심청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벌인 전국봉사대회에 찾아간다던지, 밥 좀 배불리 먹자고 조조의 군사가 된다던지 하는 식이다. 용왕 전용 뷔페 이용권을 준다는 말에 가짜 약을 팔며 사기를 치고, 흥보의 박 속에서 튀어나와 소원을 ‘들어 주기만’ 하고 밥을 얻어먹으려 들기도 한다.

 

결국 광대거지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다 무슨 소용이야?” 대의와 명분을 부르짖으며 전쟁을 벌이는 조조와 제갈공명, 용왕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위기까지도 불사하는 자라, 먹여 살릴 가족들 때문에 일확천금을 바라고 박을 탄 흥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심청... 정말 그렇다. 결국 다 무슨 소용인가. 거지들은 말한다. “살고자 해도 죽고 죽고자 해도 죽을 거, 알아서들 살아남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결국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의 밥 한 그릇이기에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들은 제쳐 둔다.


 

 

 

거지 거지 그런 거지,

인생사 다 그런 거지!

 

 

거지들은 가진 것도, 원하는 것도 딱히 없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하며 고생하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는 단순하고 쉽게 생각하면 마음 편해질 일들을 가지고 골치 아파한다. 그래서 무대 위 거지들의 태도는 부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판소리, 탈놀이를 사랑했나 보다. 아무리 현실 속 고통과 고민거리들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해도 그들의 판 속에서는 웃음과 공감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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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대거지들의 어처구니없는 딴소리는 결국 딴소리가 아니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에 열광하는데 어찌 딴소리라 할 수 있겠는가. 소리꾼과 고수, 광대거지들의 목소리는 기존의 판소리극 속에서 미심쩍었던 부분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정절과 효심, 충의를 지키기 위한 모든 희생과 노력들은 결국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결국 광대거지들은 나 자신을 위해 살라고 외친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우리는 가끔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에 나 자신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내 주변을 옭아매는 관계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가장 먼저 나의 모습에 집중하는 광대거지들의 태도야말로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필요한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연의 피날레에서 춘향은 큰 결정을 내린다. 몽룡과의 해후를 택하기보다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존의 춘향가에서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상처만 입어야 했던 춘향이 이제는 스스로의 미래를 직접 선택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도 그렇다. 정해진 하나의 행복만을 좇다가 얻게 되는 상처는 그만큼 쓰라리기에, 가끔은 당장의 내 목소리에 온전히 귀를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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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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