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눈사람] "현재"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 - 뒤 돌면 앞 [연극]

글 입력 2019.11.2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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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힘들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눈앞의 현실만 커지게 된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들만이 가득 남아서 우리를 괴롭힌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그냥 지금 힘드니까, 지금 아프니까 괴롭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도 막막해진다. 아픔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힘들까"는 진짜 "왜"를 묻지 않는다. 그저 내가 이런 상황을 마주해야 함에 대한 불만을 제기할 뿐이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아파야 하는 이유가 뭐길래 이렇게 괴로운가를,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한다. "왜"까지 마주할 여유는 없다.

아픔이 짙어지는 데에는 과정이 있다. 특정 사건이나 생각으로 인해 아픔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사건에 의해 상처를 입은 우리는 그 고통에 시달린다. 상처가 아물고 흉터로 남을 때까지 계속 덧나고 쓰리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건보다, 덧난 상처로 인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사건이 지나갔다고 해도 상처가 곪으면 회복되지 못한다. 너무 아파서, 그 아픔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울부짖는다. "나 지금 아파." 메아리로 돌아오는 외침 역시 현재를 머문다. 사건 혹은 생각이 완전히 감정으로 전환된 후에 고통은 더 심해진다. 남은 게 고통뿐이라서, 그게 너무 커서, 벗어나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너무 아픈 사람에게 아파하지 말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힘내라는 말도 때로는 잔인할 만큼, 현재의 무게가 큰 사람은 그 무게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아파지고 싶지 않은데 그 길을 모른다. 아파지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바람이 있지만, 그 방법을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만의 현재에서, 언젠가 끝날 고통을 참아내며 눈물을 삼킨다.


 

 

<뒤 돌면 앞> - 타지 못할 버스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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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뒤 돌면 앞>의 인물들은, 정류장에서 각자의 기다림에 집중한다. 끝내 타지 못할 버스를 기다린다. 드라마터그 '김나볏'은 이를 부조리극의 풍경이라 말했다. 인물들의 기다림은 끝이 없었다. 그들의 희망은 버스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나온 개 '영온'은 매일 정류장에 가만히 앉아 있다. 음악이 하고 싶은 '나빈'은 공무원 시험 학원에 가는 버스를 매번 놓치고, 그녀의 할아버지 '원호'는 그런 그녀에게 택시비를 쥐여준다. 이들은 정류장에서 늘 같은 모습으로 만나지만, 정작 버스에 타는 이는 없었다.

정류장에 모인 그들의 사연은 다양했지만, 특별한 감정의 고조는 없었다. 서로에 대한 편견도, 평가도 없었다. 산 자와 죽은 자, 개와 인간 등 현실에 공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 역시 흐릿했다. 어떤 이야기를 가진 무엇이든, 그들은 정류장에 모였고, 각자 몫의 기다림을 다하며 사념할 뿐이었다.


<뒤 돌면 앞> 속 정류장은 은유적인 공간이었다. 기다림과 바람을 형상화한 그 공간에서, 정작 "버스"를 타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기다림의 방향이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나타냈다. '나빈'이 진짜 바라던 것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탑승해야 할 버스와 그 이유를 찾아내지 못해 정체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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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조용했다. 한 편의 시가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잔잔했고, 덤덤했다. 현실과 비현실이 엉킨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 섞인 듯 안 섞인 채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무심하게 뒤를 돌아, 자신의 서사를 마주해냈다. 자신이 정류장에 온 이유와 그 이유 속에서 진정으로 바라던 것을 찾아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 온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기다림에 본질을 회복한 후에야 그들은 정류장의 반복되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정류장을 떠났고, 누군가는 바라만 보던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에 타야만 성취되는 기다림은 아니었다. 정류장이란 공간에서 품어왔던 희망을, 정류장 너머에서 찾아낸 그들이었고, 그 희망이 바로 그들이 진짜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들이 희망을 찾아낸 곳은 정류장 너머의 그들 자신이었다. 버스도 기다림도 아닌, 정류장에 향하던 그들의 발걸음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뒤 돌면 앞>, 그들이 뒤를 돌아 그 발걸음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정류장에 갇혀 있던 그들이 시선을 돌리는 순간, 끝나지 않을 기다림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던 것이다.




"현재"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

 

<뒤 돌면 앞>을 보며 어딘가에서 현재를 아파하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정류장에 머물던 연극 속 인물들처럼, 고통 속에 갇혀 잡지 못할 희망을 바라고 있을 많은 이들이 생각났다. 기다림의 본질을 잊은 채, 아픔의 이유를 잊은 채, 돌아보지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천천히 뒤를 돌아 앞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처를 준 무언가를 마주하는 일은 고통이다. 하지만, <뒤 돌면 앞>에서 자연스레 존재하던 비현실적 이야기처럼, 자신의 과거를 무심하게 흘려보낼 용기가 필요하다. 잘 견뎌왔기에 지금 이곳, 이 정류장에 서 있는 것이고,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기억해야 한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는 쪽을 봐요. 그런데 그쪽 눈은 지평선만 향해 있는걸요."

희망에 닿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곳을 향해야 한다. 진짜 향해야 할 방향을 모르겠을 때는, 덤덤하게 뒤를 마주하는 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발견할 개연성이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고, 진정으로 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다.

삶에도 복선이 존재한다. 자꾸만 우리는 현재에 갇혀 방황하지만, 현재를 만들어 낸 "나의 것이었던 날들"을, 뒤를 돌아 만날 수 있다. 그 속의 개연성을 소화해내면 분명 보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잔잔하게, 덤덤하게. 기다림의 본질을 회복한 후에야 버스를 탈 수 있던 인물들처럼, 아픔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

"현재"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 <뒤 돌면 앞>을 선물하고 싶다. 어떤 아픔을 가졌든, 어떤 눈물을 흘렸든, 그 시간을 덤덤히 마주하며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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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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