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공미술은 우리와 어우러지고 있을까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11.2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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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서울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지인을 만났다. 제대로 서울 구경을 한 것이 정말 오래 전이라는 지인을 위해 기꺼이 관광안내원의 역할을 자처했다. 아침부터 시작해 광화문, 종로, 서울시청, 덕수궁 그리고 다시 광화문까지 걷고 다시 걸으며 사진 찍기를 반복했다. 종로에서 다시 서울 시청으로 향할 때부터,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지만 동행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참고 걸었다.

 

종로에서 서울 시청으로 향하는 길, 다시 청계천의 시작점에서 기꺼이 동행의 사진기사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던 내게 그가 외쳤다. “야, 우리 저기 꼬깔콘에서 사진 찍어야지!” 네? 고깔콘이요? 그게 뭔데, 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동행은 다시 어딘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있잖아, 저거 뭐 보라색 꼬깔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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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하고 돌아보았는데, 맞다. 지인의 손끝은 청계천의 시작에 자리한, 뽀족한 끝은 하늘로 향하는 소라게 껍질 같기도 한 그 조형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꼬깔콘”이라니, 타박을 주며 포즈를 취하는 내게 그는 카메라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생겼잖아. 생긴 대로 부르면 어때, 내가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근데 참 청계천이랑은 안 어울린다.”

 

나는 그저 그럴지도, 라고 대답했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동행과의 그 대화 이후 청계천의 그 “꼬깔콘”을 볼 때마다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의문이 자꾸만 생겼다. 정말 청계천과 어울리지 않게 이국적인 그 조형물은 어떤 의미를 두고 여기 세워졌을까. 누가 만든 것일까. 의문은 생각보다 일찍 풀렸다.

 

여느 때와 같이 방문한 서울시청도서관에서 우연히 눈길을 끈 책에서 그 답을 찾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도시를 꾸미고 있는 여러 공공미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을 통해 나는 그 “꼬깔콘”의 정식 명칭이 “스프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책에서 스프링을 소개하는 소제목은 이러했다. “유명하지만 욕도 많이 먹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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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은 스웨덴 태생인 미국 팝아트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의 작품으로 2006년 청계천이 시작되는 지점에 세워졌다. 2006년 9월, 청계천 복원 1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이 조형물은 약 35억 원의 비용이 투입됐지만 우리나라 공공미술 최악의 작품을 뽑을 때마다 거의 1위를 놓쳐보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청계천이라는 장소와 이 작품에 유사성을, 관계성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프링”에 대한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무엇보다도 당혹스러웠던 점은 클래스 올덴버그가 해당 조형물을 작업하면서 청계천에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조형물이 자리할 장소를 직접 방문해서 장소와 작품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사정이 무엇이었건 간에 이해하기 어렵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미술계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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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되던 중, 2017년에 있던 “슈즈트리” 논란이 떠올랐다. “슈즈트리”는 서울역 고가도로를 개방하며 2017년 5월, 서울역 광장에서 서울역 고가도로까지 단 9일간 전시한 야외 설치 작품이며 신발 3만여 족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작품을 두고 보기 거북하다, 서울역이라는 장소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비가 오면 신발에 물이 고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악취가 난다는 등의 날선 비판이 이어졌다.

 

위의 사진은 9일간 전시 기간 중 어느 날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다른 전시 기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필자가 방문했던 날에는 작품에 악취는 없었다. 생각보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진지한 자세로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광장에 한 없이 자리한 신발에선 꽃이 피어있었고 그리고 그 앞에 자리한 작품 소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차가 다니던 도로가 이제는 사람이 걷고 풀벌레가 우는 숲이 되려고 합니다....

 

도시 안이 본질적 결핍은 신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또 하나의 줄기가 되고 대중의 언어가 되어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도시, 그 도시의 땅과 마주하는 신발들. 비어있는 신발에 꽃과 자연을 채우면 결국 도시를 채우는 사람들의 마음 속 결핍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작품 의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으로 다시 꽃피운 신발을 보니 또 달리 보인다.

 

그렇다면 고가도로를 시민을 위한 산책로로 개방한 시점에서 이런 작품은 또 장소와 꽤 어울리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여본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을 둘러싼 신발이 주는 위화감은 계속 마음에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서울역하면 역사적인 장소로서의 상징성이 마음에 있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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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과 “슈즈트리”를 향한 비판 중 가장 많았던 것은 설치한 장소와 작품이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공공 미술에 대해서 작품을 설치하는 장소의 의의를 담고 있는지, 사회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서, 시민을 위한 예술적 가치가 담고 있느냐라는 시선, 그리고 그럼에도 그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자유로운 시도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시선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더불어 미술관이 아닌 개방된 장소에서 시민들이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공 미술의 가장 큰 존재 이유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를 공공 미술의 존재 이유라 여기는 것이 진정한 공공 미술의 진보를 위한 길인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하는 이들도 있다.

 

적어도, 그저 어느 이름 있는 국내외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타이틀만 갖춘 채 예산의 낭비가 없이 두고두고 흉물이라는 평을 받는 공공 미술이 더 도시에 자리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공간을 향유하는 시민들의 일상에서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시민들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진지하게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예술품이 도시를 더 많이 꾸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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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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