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일랜드에 살면서 느끼는 '여유' [여행]

This is Ireland!
글 입력 2019.11.0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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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횡단을 당연하게 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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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 양손에 1년 치 짐을 끌고 홀로 끙끙대며 더블린 시티 한복판에 위치한 숙소로 가던 길을 생생히 기억한다. 구글 지도로 숙소 위치를 확실히 파악하고 나서야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담한 도시였지만 수도는 수도인지라, 길 위는 관광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다들 이리저리 정신없이 바빠 보였는데, 그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깜짝 놀랐다. 수많은 인파가 당연한 듯 도로에서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4차선이든, 6차선이든, 심지어는 8차선까지도 적색등 따위는 무시한 채 제 갈길 가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차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 나라는 무단횡단 관련된 법 처벌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8차선 도로에서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는데 차들이 모두 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다니, 쌩쌩 달리는 도로 위 화난 고함 소리가 익숙한 나로서는 이 모습이 낯설고 놀라웠다.

 

 


여행과 살아보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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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가벼운 여행지로 이 나라를 선택했다면, 이곳 생활 속 여유는 나에게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과 살아보는 것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였다. 일주일  간의 더블린 여행 후 소도시 코크로 와서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사이, 놀라움은 이내 곧 답답함과 짜증으로 변했다.

 

워킹 홀리데이나 어학연수를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통과해야 할 세 가지 관문이 있다. 바로 집 구하기, 비자 발급 받기, 그리고 은행 계좌 열기다. 이것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종종 있을 정도로 만만치가 않다. 나 또한, 이 과정을 겪으며 초반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중에서도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해서 들인 시간과 노력은 지금 떠올려도 머리가 지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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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지만, 초기 3개월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어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기에 내가 계좌를 열 수 있는 방법은 총 두 가지가 있었다. 학생 신분으로서 계좌를 열거나, 일을 구해서 월급 통장을 만드는 것이다. 당장은 학원에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후자는 미뤄두고 학생 계좌를 열기로 했다.

 

이 나라에서 학생이 계좌를 열려면, 월요일 아침 은행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가서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줄을 선다고 해서 바로 계좌를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격요건을 확인한 뒤 은행과의 약속을 따로 잡고 약속한 시간에 재방문을 해야 한다. 따라서 아침 9시에 은행으로 갔고, 차례를 기다려 준비한 서류를 보여줬다.

 

하지만 내 서류는 자격요건 미달로 거절당했다. 이유는 바로 내가 등록한 보험이 이 나라 보험이 아닌, 한국 보험이기 때문이었다. 1년 해외여행자 보험이라서 이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단지 한국 회사의 보험이라서 계좌를 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일랜드 보험만 등록해오면 나머지는 문제가 없느냐고 재차 확인을 했고, 그렇다는 대답을 받은 채로 은행을 나왔다.

 

그날 오후에 바로 아일랜드 보험을 등록했고, 그 다음 날 화요일에 은행을 방문했다. 하지만 월요일이 아니면 약속을 잡아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다음 주 월요일은 뱅크홀리데이였다. 뱅크홀리데이는 유럽의 공휴일로, 말 그대로 은행이 쉬는 날이다. 그래서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한 약속을 잡기 위해서만 2주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2주를 기다려서 또다시 월요일 아침에 은행을 방문했고, 다시 심사를 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또 실패. 이유는 내 어학원 등록기간이 6개월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결국 이곳에서 계좌를 여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의 인터넷뱅크를 오픈했다. 

 

 


This is Ir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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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살면서 이와 비슷한 과정을 수차례 겪으며 유럽의 답답하고 느린 시스템에 질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여러 번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건지, 결국 계좌를 열고 일을 구하고 여행도 다니기 시작하며 나름 만족할 만큼의 정착을 마치고 나자, 이 느긋함 또한 어느새 익숙해졌고 이들의 문화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평생을 ‘빨리빨리’,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아온지라 본능적으로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11시에 온다던 버스가 10시 45분부터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일상이다. 택배를 집에서 직접 받지 못하면 멀리 있는 택배 회사로 직접 찾아가서 가지고 와야 한다. 오늘 하루를 비워놓고 종일 기다린 택배가 내일 오기도 한다. 1시 반 영화가 스크린 청소가 늦어져 1시 35분에 입장이 시작되어도 불평하는 사람도, 사과하는 사람도 없다.

 

바로 얼마 전, 더블린 공항에서 밤 버스를 타고 코크로 올 일이 있었다. 미리 예약해둔 시간은 11시였고, 20분 전부터 티켓에 명시된 정류장으로 가서 기다렸다. 하지만 10시 57분이 되어도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고 정류장은 텅 비어있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기에 마음이 조급해져 직원을 붙잡고 도대체 왜 버스가 안 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미소를 띤 채 뭐가 걱정이냐는 말투로 대답했다.


“This is Ireland!”

 

여기는 아일랜드라고,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버스는 정말 11시가 딱 되어서야 도착했다. 그래, 여긴 마음 한 구석에 ‘여유’라는 방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 아일랜드였다.


 

 

지금 여기서 이 여유를 최선을 다해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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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의 나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매일 정신없는 일상에 지쳐있었다. 내가 코크에 온 이유는 한적한 곳에서 숨 한번 크게 쉬고 싶어서였다. 각종 선행학습, 대학입시, 학점, 취준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25년 인생에 홀리데이를 주고 싶었다. 답답하고 짜증났던 느긋한 생활 속 여유는 그저 우리와 다른 삶의 태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내가 서울에서 그토록 애타게 원하던 것이었다.

 

외로운 타지 생활에 지칠 때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이곳을 그리워할 내 미래를 그려보곤 한다. 아마도 가장 그리워하게 될 것은 바로 이 여유가 있는 삶이 아닐까 한다. 이 나라에 온 뒤로 나이에 대한 초조함, 취업에 대한 불안감, 내 인생에 대한 걱정이 온전히 사라졌다. 그보다는 오늘 오후엔 어딜 걸어볼까, 내일 점심엔 뭘 먹을까 하는 소소하고 기분 좋은 고민이 내 머릿속을 더 차지하고 있다. 

    

가장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다시 여유 없는 바쁜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돌아가서도 이 삶의 태도를 계속 지니고 살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이 느긋한 여유를 온전히 즐기는 중이다. 바로 지금 여기, 아일랜드 코크에서.

 

 

 

문화리뷰단 김지은.jpg


 

[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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