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나에게로 이르는 글쓰기, 싱클레어의 데미안

글 입력 2019.11.0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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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 아래 놓인 백지의 위로"

 

좋아하는 것을 미소 지으며 나만의 세상 속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군가에게 꺼내 보이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나도 모르는 어떤 긴장감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상대방도 나와 같이 생각해줄까?”, “나는 그저 좋아하는 것뿐인데, 별로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생각해보면 글은 내게 그랬다.


글을 만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20살, 어리고 연약했던 그 시절의 나는 ‘글’이라는 존재를 내 삶에 크게 끌어오지 않았다. 대학이라는 세상은 그저 신기했고, 20대라는 특권이 짜릿하기만 했다. 어쩌다 사회로부터 받은 마음의 생채기들은 그저 꾹꾹 담아두기 바빴고, 가끔씩 침대에 종일 파묻혀 모든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고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날수록 조여 오는 20대의 무게와, 나에 대한 미움은 그 크기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생각보다 훨씬 더 내 마음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여렸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지만, 오직 나만이 나를 미워했다. 잘하고 싶은데 열심히 하지 않았고, 변화하고 싶지만 똑같은 자리에 매일 머물러 있었다. 누구보다 나를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여겼으며, 이제는 내면의 평화나 진정한 행복이란 나와 먼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이 쓰라린 마음에 연고를 발라주고, 나를 보살핀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단지 ‘글’이라는 존재다. 쓰레기통에 매일 하루치의 나를 버리듯 글을 쓰며 어두운 나를 비웠다. 시작은 백지와 볼펜이었다. 어느 날의 깊은 새벽, 종이 한 장을 책상에 덩그러니 두고 볼펜을 집어 들어 생각이 나는 대로 나에 대해 휘갈기듯 써 내려갔다. 도대체 나는 왜 힘들고, 어떤 이유로 공부가 싫으며, 무엇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인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은 무엇이며, 지금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나는 왜 사람이 어렵고, 마음이 이토록 불안하기만 할까?


근본적인 삶의 뿌리를 하나씩 건드렸다. 글을 쓰고 살펴보며 나의 마음을 나에게 자세히 알려준 것이다. 그렇게 나와 대화를 시작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인간에게 마음의 해방을 준다는 것도, 누군가의 구원이 된다는 사실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글쓰기’에 대한 책을 써왔다는 것도 그 당시의 나는 몰랐다. 그저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자존심이 상하고, 이대로는 사는 것은 힘들 것 같으니 그저 묵묵히 써 내려갈 뿐인 것이었다.


이후 글의 세계에 흠뻑 발을 내디뎠다. 반복적으로 행해진 쓰는 행위는 나에게 ‘비움’을 선사했다. 그저 써보고, 멀리 떨어져 있던 생각의 뭉치들을 엮어보고, 문제의 해결 방법을 적는다. 생각으로 머물렀을 때 그 어떤 것보다 무겁고 숨 막히게 다가오던 많은 잡념들이 막상 쓰고 보니 별것 아니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 이렇게 얻은 깨달음으로 나는 차곡차곡 내면을 기록하기 시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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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말들》 - 은유


 

글이 그저 좋았다. 쓰고 읽는 행위, 그것이 내게 선사한 정신적 기쁨과 희열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확실하고 단단한 평안이었다.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숨을 곳이 있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게 했다. 눅눅한 종이에 쓰인 검은색 활자들은 그 어떤 풍경보다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글을 쓰면 마음의 위로를 온몸에 퍼트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글과 함께 늘 일상을 살아갔다.

 

 


"잘하는 것보다 먼저, 진심이 있다면"

 

글은 특별하다. 나라는 사람과 글은 연결되어 있다. 그런 확신 속에 살아왔다만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다. 누군가에게 선보이는 글에 대한 칭찬도, 어딘가에 이름을 달고 공식적인 글을 보내는 것도 모든 것이 부끄럽고 머쓱하기만 했다. 나는 그저 썼을 뿐, 글이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전공자가 전문 지식이 필요한 대회에서 얼떨결에 상을 타버린 불안함과 머쓱함이랄까, 글을 대할 때 늘 마음 한편에 존재하는 불안감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아트인사이트를 처음 만나면서도 그랬다.

 

글을 좋아한다. 내 이름을 달고 생각을 담아 공식적인 글을 쓰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지원서를 채워갔던 여름날의 어느 저녁이 문득 떠오른다. 내겐 ‘로망’이었던 ‘에디터’라는 직함과 ‘아트인사이트’라는 공간은 여름날의 꿈들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너무나 순조롭고 평화롭게, 그리고 따뜻하게 말이다. 나는 이 공간의 일원인 것이 감격스럽다. 수많은 지원자 속에서 내가 에디터의 자격을 부여받은 것도, 개인적인 공간이 아닌 공식적인 공간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것도 말이다.

 

그저 매일 글을 쓰고 즐기기만 하던 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에디터라는 자격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니. 이것은 자아의 큰 성장이자,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존감의 근원이었다. 그저 좋아하는 것에 머물러있지 않고 삶 안에서 큰 줄기로 키워내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내가 자랑스럽다. 용기를 가지고 도전을 하고, 마무리 맺음까지 착실히 해낸 내 모습을 침대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던 소녀가 보면 박수를 칠 것이다. 한 번 더, 나는 글을 통해 성장했다.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 활동은 따뜻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모든 것은 자유로웠고 수용되었다. 문화와 예술에 대해 나만의 생각을 쓸 뿐이었지만 하나의 멋진 기사가 되었고, 따뜻한 말들로 모두가 함께 이곳을 만들어갔으며, 다양한 시각을 그대로 보듬어주었다. 비일상적이었던 예술의 세계를 접하게 해주었고, 나의 내적인 영역을 넓힐 기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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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그대로 담아 썼던, '서울'을 주제로 한 오피니언>

 

 

매주 오피니언을 쓰기 위해 주제를 고심한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글의 형식은 내가 걸어온 삶과 진심을 담기 충분했다. 지원서의 글까지 더해 총 18개의 오피니언을 4개월 동안 썼다. 그 과정에서는 나의 삶 역시도 돌아볼 수 있었다. 문화, 예술에 대한 글을 쓰지만 그 속에는 나만의 경험과 가치관까지 녹여내어야 좋은 오피니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도 다양한 생각을 접하는 것도 중요했고, 글에서 나만이 가진 시각을 함께 쓰려고 늘 노력했다. 다행히도 마지막 주까지 이야기 샘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보니 모든 이야기들은 나의 경험과 내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글로써 어떤 것을 소개를 하고 감상을 쓰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즐기고 애정이 담겨있다는 확신이 생겼다면 그때부턴 걱정이나 욕심이 사라진다. ‘양과 질이 뛰어난 글’, ‘잘 썼다고 평가받는 글’에 대한 목표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저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함께 즐겨보시는 것은 어떤가요?’라고 따뜻한 시선으로 독자에게 글을 선사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4개월을 즐겼다. 말 그대로 그저 즐기기만 했다. 누군가에게 뛰어나다고 찬사를 받는 글을 쓰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타닥타닥 들려오는 자판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음악과 커피를 옆에 두고 에디터의 이름을 달고 쓰는 그 순간을 사랑했다. 그리고 또다시 진정 글을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일이 있다. 몸에 딱 맞는 옷을 걸친 듯 만족스러운 정신적 안락함, 어떤 상황이 펼쳐져도 고통을 감수하며 나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것 말이다. 4개월의 에디터 활동은 글을 다루는 것에 있어 그런 안락함과 확신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해주었다.

 

20대의 나는 이렇게 여러 번 쓰는 행위로 자아를 깨고, 변화시키고, 또다시 성장했다. 또 그 과정들을 글로 펴내며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어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은 일말의 티끌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당당히 글을 쓰며 나를 고백하고, 행복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글로 인해 나를 깨트려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늘 글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글쓰기, 나에게로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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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속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은 전혀 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하루가 밝았다고 느꼈고 나를 에워싼 세계가 변화했음을, 나와 깊은 관련을 갖고서 장엄하게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고 느꼈다. 나직하게 내리는 가을비조차도 아름답고 고요하게 또 축일답게 엄숙하고도 즐거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으로 바깥 세계가 나의 내면 세계와 어울려 순수한 화음을 냈다. 그 다음은 영혼의 축제일이었다. 그 다음은 살아볼 만했다. 어떤 집도, 어떤 쇼윈도도, 골목의 어떤 얼굴도 나에게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분명 그래야 할 그대로였지만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의 공허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는 자연이었으며 경건하게 운명을 맞을 채비가 되어 있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적 큰 축제일 아침에, 성탄절이나 부활절 아침에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았었다. 세상이 아직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었다.

 

나는 내면을 향해 가는 삶을 살아가는 데 익숙했었다. 또한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한 감각은 내게서 상실되었다는 사실, 반짝이는 색채들의 상실은 유년의 상실과 불가피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영혼의 자유로움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는 이 아름다운 광채의 포기로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감수하는 데도 익숙했었다. 이제 나는 매혹되어 인식했다. 그 모든 것이 다만 엎질러지고 어두워져 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유년의 행복을 포기하고 자유로워진 사람에게도 세계가 빛을 뿜는 모습을 바라보고 어린이다운 시각의 내밀한 전율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데미안》에서 빨간색 메모지를 붙인 페이지의 문장들이다. 에디터 활동을 마무리하며 여린 나를 동요시켰던 작품, 데미안을 다시 돌아봤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날들의 나는 마치 싱클레어의 아주 어린 시절 같았다. 자신의 내면 안에 갇혀 거칠고 어두운 세계 속을 혼자서 걷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 말이다. 모든 문장들이 나의 내면과 현실을 투영한 것 같아 눈물을 흘렸었다. 수없이 많은 줄을 그었고, 공감을 하며 마음을 다독이고 싱클레어의 성장을 뒤따랐다.

 

그는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깨트렸다. 또 그는 현실에 발을 내디뎠다. 데미안과 함께하며 자신의 ‘알’을 깨트린 것이다. 가져온 이 페이지의 문장들을 다시 읽으니 너무나도 현재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내면에 갇혀있어 현실을 바라볼 수 없었고, 모든 시선이 안으로 향해있었던, 그럼에도 공허했던 그 시절에서 벗어난 지금의 내 모습. 글을 쓰고 비우고 또 채우며, 나는 나를 깨고 있었다.

 

데미안을 첫 번째로 읽었던 그 시절의 나는 싱클레어의 성장을 동경했다. 그의 어둠에 공감했고, 온통 불안을 표현했던 구절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가 나보다 한발 앞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읽은 데미안은 조금 달랐다. 지금껏 겪어온 나의 많은 도전들과 글쓰기, 그리고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얻은 정신적 성장은 데미안을 만나 자신을 깨트려버린 싱클레어와 동일선상을 걷고 있게 해주었다. 다시 읽고 나서야 이런 ‘체감’을 해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단단하다. 적어도 방법을 아니까. 언제나 잔잔하고 평온할 것이란 약속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저 파도를 잘 타고 넘어가는 항해사처럼 내 거친 내면의 파도를,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 세상을 순조롭게 타고 넘어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거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흔들릴 때마다 나만의 열쇠를 찾아내어 나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렇게 나를 발견한다. 나를 위로한다. 나를 사랑한다. 그저 그러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사람이 얼마나 더 변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까. 20대의 나를 스스로 보고 있노라면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든다. 나를 깰 수 있다는 믿음,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래도 오늘의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준다. 싱클레어에게 인도자였던 데미안처럼, 나의 구원과 인도자였던 글쓰기라는 행위.

 

나의 오래된 글쓰기 공간의 제목은 '나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결국 내가 스스로 부여한 제목은 현실이 되었다. 글은 결국 진정한 나에게 이르도록 이끌었다. 오늘도 글과 나를 깊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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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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