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라는 존재는 ‘너’와의 관계 맺음 없이는 설명 불가능할까 : 인정투쟁; 예술가 편 [공연]

인정투쟁; 예술가 편
글 입력 2019.11.0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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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극장과 전시장에서 이 팜플렛을 많이 만났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 이라는 제목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인정투쟁’ 들어본 적 없는 단어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직관적으로 다가왔달까? 게다가 예술가 편이라면,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심리를 다루는 예술은 관객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않던가.

 

사회에서 겪는 각종 갈등으로 마음이 막힌 듯하고 속이 울렁거린다면 내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 하나가 절실히 필요하다. 나를 투영해서 다시 읽어보는 이야기들은 내 묵은 감정들을 차분히 비워준다. 영화를 통해 심리치료를 하는 ‘시네마 테라피’라는 단어도 이러한 예술의 기능성에 대해 인지한 시점부터 활발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 상대편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에게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명예를 위한 싸움이며, 무조건적으로 상대편을 제압하려는 목적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의식적이며 정신적인 성격을 지닌다.

 

 

인정투쟁은 원래 헤겔의 철학 원고에서 등장하는 단어다. 나는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인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 내 마음속에 생기는 감정들을 돌아보고, 그 감정의 기원이 된 나의 욕구를 살펴보면 그 욕구는 대부분 타인의 인정과 존중을 갈구하는 데에서 온다.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존중받지 못해서 생겨나는 감정들이 꽤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는 존재는 ‘너’와의 ‘관계’맺음 없이는 설명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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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가 세계 밖에서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자리와 언어를 습득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본다.

 

존재는 세계 안에서 확인받기 위해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존재의 선택과 행동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과 세계 안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갖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대라는 큰 숙명을 예술가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예술가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 없이 예술가로 존재하는 것은 가능할까? 예술가와 관객은 어떻게 만나는가?

 

무대 위 신체장애 예술가들이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나타내면서 이 시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질문을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이 극의 시놉시스는 딱 세 줄이다. ‘빈 무대. 한 예술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세상 속으로.’ 여기 이 짧은 문장 속에서도 예술가는 스스로 예술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본인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무대에 등장하는 ‘나’는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예술인패스’ 코스를 선택한다. 예술인패스는 시각예술, 연극, 무용, 음악, 영화, 방송, 전통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에 대한 예우 제도다. 예술인 자격 증명에서 PASS한 사람은 박물관, 미술관, 공연 등을 할인받아 관람할 수 있다. 한마디로 타인을 통해 ‘예술인’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했듯이, 타인의 인정은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부여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선 경력을 쌓아야 한다. 경력이 없는 ‘나’는 ‘예술인패스’ 자격에서 탈락하고, ‘나’는 예술인패스를 목표로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다. 오디션을 위한 독백 1001가지.. 제목을 가진 책을 구입하거나, 끝없이 연습한다.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과 그 노력이 통하지 않는 뒤틀린 현실이 이상하게 웃음을 자아낸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노력의 척도는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기준에 들어맞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간절히 염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된다. 그렇다면 이 증명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 ‘예술가’라는 단어는 어떤 문맥에서 탄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 극은 연극 속의 연극 형태로 진행된다. 무대 위의 ‘나’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이자 연극 속의 캐릭터이다. 극은 무대가 끝나거나 시작하기 직전의 무대 뒤 모습도 보여준다. 배우에게 그곳은 ‘연기를 연습하는’ 연기를 하는 무대인 것이다. ‘이 극은 너무 올드해.’ ‘너 정말 이 연극 할 거야?’ 등의 대사들은 관객들을 연극 속의 또 다른 연극으로 끌어당긴다. 허구 속의 허구는 현실 속의 예술가의 정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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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과 ‘일반적’이라는 단어는 꽤 폭력적이다. 그 울타리 안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보편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으로 분류된다. 그 기준은 모든 사람이 동의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오류도 거기에 있다. 소수의 의견은 묵살되어 마땅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것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라는 하나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대상화하게 된다. 섣불리 ‘일반적이지 않은’으로 판단해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는 신체장애 예술가 7명이 등장한다. 극은 오로지 개인이 예술가로 증명받는, 그러니까 제목 그대로 ‘예술가의 인정투쟁’을 다룰 뿐이다.

 

 

이연주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쉽게 하나가 되거나, 무대 위의 존재들이 성급하게 타자화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관객이 일방적으로 월등한 위치를 점하지 않도록, 그리고 무대 위 인물들을 내려다보며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을 쉽게 소비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는 것이지요. 이연주는 개별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극적인 맥락 위에 섬세하게 배치하고 나열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개인의 목소리를 지우는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대신-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찬찬히 지켜보게 합니다. 사회비판에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 누군가는 기능적으로 지워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요. 섣부른 메시지 전달보다는 조금이라도 인물의 자기발화에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 정진세(극단 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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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난 후, 나는 도대체 어떤 예술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반문해본다. 예술가는 정말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증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연출의 방식 또한 새로웠다. 무대 위에 막이 내려왔지만 그 뒤의 인물들의 행동은 얇은 막을 통해 보인다. 독백을 하는 듯, 대사를 주고받는 배우들. 관객 바로 앞의 조명을 배우가 켬으로써 조성되는 극적인 분위기. 이 모든 것은 어우러져 예술가의 인정투쟁에 대해 새롭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이러한 질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한다면, 재밌고 새로운 연출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당신도 이 질문의 일부로 기꺼이 뛰어들기를 추천한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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