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자본의 얼굴이 폭로하는 기만 -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

"나치즘하에서도 자본주의는 '일반적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글 입력 2019.10.2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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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리고 이것이 혁명의 끝입니다!” 독일의 많은 하층계급 국민들은 히틀러가 그 실현을 약속했던 ‘사회주의적’ 변화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독일 노동운동이 파괴된 이후, 히틀러는 독일의 기업가와 은행가를 비롯한 상층계급에게만 큰 만족감을 안겨주고 ‘혁명’을 마무리했다.

 

(H. G. 트라프가 그린 캐리커처, 망명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1933년에 발행된 독일 사민당 당보 - 『노이어 포어베르츠(Neuer Vorwarts)』에 수록) (192p)

 

 

 

 

1.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가 무시될 때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것, 더 좋은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 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곳보다 조금이라도 괜찮은 환경에서 살아가려는 욕구는 아주 당연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보존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안위까지 고려할 수 있는 상황을 원한다는 것을 가정할 때 이를 보다 합리적이고 풍요롭게 행할 수 있는 방법론이 제시되면 우리들은 기꺼이 따른다. 그 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는 영역 가운데 대표적인 부문이 경제다. 물론 관련 산업 종사자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이 부문에서 나오는 전문적인 이야기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여러 결정들에 경제라는 영역이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관심은 가진다. 적어도 내 손이 주어진 돈을 효율적으로 굴릴 수 있을지 정도는 고민하지 않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은 생각 이상으로 소박하다. 일반화를 하긴 어렵지만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서 소망하는 내용은 내 몸 하나 잘 건사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답하며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TV에 등장하는 대부호(?)들이 누리는 부를 나도 누려보면 좋기야 하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는 걸 지독히도 잘 알고 있다. 물질적인 자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물질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재화의 범위도 넓어지긴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소위 재벌이나 그에 준하는 재력가들이 축적한 부의 크기만큼이 내게 주어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가끔씩 당첨되길 소망하는 로또의 경우에도, 세금을 다 떼고 실질적으로 수령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10억 초중반 즈음이다. 정말 큰 금액이지만 연단위로 굴러가는 나랏돈의 크기나 거대 자본가들의 재력 수준을 생각해볼 때 이 역시 상대적으로 지극히 소박한 금액대로 비추어진다. (10억 모으기 매우 힘들다는 것, 아니 저축 자체가 힘든 것임을 나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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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건 이리도 사람들의 소망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한편 역사의 어느 시대에서나 이와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부유하고 힘이 있는 권력층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권력층을 구분하는 세부적인 기준은 시대마다, 동일한 시대 안에서도 개별 국가의 사회마다 상이하지만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크게 1)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함 2) 부유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제시할 수 있겠다. 한 나라의 정치적 결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동시에 돈까지 많은 집단. 자본주의라는 시장논리가 본격적으로 잠식한 20세기에 이런 집단은 누구일까. 바로 대기업과 금융사, 그리고 해당 사회의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은 각종 정치계 인사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와 경제라는 두 영역에서 힘이 매우 약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다수가 존재하지 않으면 기업과 금융사, 은행들의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짐은 물론이고 정치계 인사들의 존재 이유도 사라지므로 절대다수 ‘시민’들은 어찌 되었건 정치적, 경제적 결정에 무조건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권을 가지고 조금 더 윤택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줄 법한 정당에 한 표를 행사하고, 값을 지불할 재화를 고르고 돈을 저축할 은행도 고른다. 기업을 비롯해서 앞서 언급한 대형 경제 주체들, 그리고 정치계 인물들은 일반 시민들의 의사에 귀를 기울이고 시민의 입맛에 맞는 정책이나 재화 서비스를 제시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에서 주요 고객은 사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중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대중을 가축에 준하는 존재로 격하하여 취급하고 그들이 주요 고객으로 삼지 않아도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경우에 파멸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파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까지 ‘나치’세력(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 독일을 휩쓰는 동안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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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수에게‘만’ 악마였다는 모순


 

‘다수에게만 악마였다.’ 이 말은 무언가 앞뒤 호응이 맞지 않는다. 보통 타인을 향한 부정적인 평가가 서술어 자리에 올 때 평가를 내리는 대상이 보편적인 개인을 지시할 경우 한정과 강조의 표현을 암시하는 ‘만’이라는 조사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당 문장은 이렇게 수정되어야 ‘상식에’ 부합한다. ‘소수에게만 악마였다.’ 그렇지만 저자가 서술한 바에 따르면 히틀러를 위시한 나치세력이 독일을 지배하는 동안과 그들이 물러난 이후의 상황을 묘사할 때는 전자에 해당하는 문장이 아주 적절하다. 히틀러와 그가 당수로 있었던 나치는 당대의 시민과 당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시민들 다수에게 악마였고 큰 힘을 손에 쥐었던 소수의 세력들에게 천사였다.

    

 

“히틀러는 과반이 넘는 독일인들이 선출해 집권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치 정권은 대부분—‘1퍼센트’와 대비되는 ‘99퍼센트’—의 독일인들에게 혜택은커녕 힘겨운 고통만 안겨주었다. 하지만—사회적 배경을 불문하고—너무나 많은 독일인이 그들의 기만을 받아들였고, 상황에 적응해나갔으며, 어떠한 형태의 저항도 하지 못했다.” (122p)

 

 

다수에게만 악마였음을 역설하는 본 저서는 크게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지는데, 제1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사회의 거물들과 손을 잡아 ‘새로운 사회 건설’의 주력으로 나서게 된 배경과 진행과정, 결과를 다루며 제2부에서는 그러한 나치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당대의 미국 정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1부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국민 과반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속한 당을 제1당으로 승격시킬 수 있었는지에 관한 기만적인 과정 전반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다소 유쾌하지 않은, 매우 암울한 성격의 것이다.

 

나치가 제1당으로 성장하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력은 누구인가. 보편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 본인의 기가 막힌 선전 운동과 정치력이 그의 집권을 가능케 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정치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유추할 수 있듯이 정치는 절대로 자본과 분리될 수 없다. 정치와 경제는 끊을 수 없는 실로 이어져 있기에 한 사회의 정당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힘에 기대야할 수밖에 없다. 히틀러는 이 점을 매우 잘 인지했고 그 자신으로서도 사회주의를 외치며 삶의 질 개선과 평등을 요구하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했기에 기업들을 비롯한 독일 재계의 힘을 얻고자 실질적으로는 그들에게 아주 유리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다. 패전 이후 사람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 어설프게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식’ 정치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불만을 가졌다. 민주주의를 전복하고 러시아 혁명과 유사한 방식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국하고자 했던 공산당 세력과 이와 대조적으로 농부나 교사, 화이트칼라 노동자, 하급 관리 등의 하층 중산계급.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 아래에서 충분한 이익을 취할 수 없었던 각종 기업들.

 

히틀러의 나치는 ‘형식적으로는’ 이들 모두를 계산에 고려한 아주 기이한 집권당이었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다. 그러니까 당 이름만 고려하자면 당시 독일 사회의 시민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표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뼛속까지 자본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과 소수만이 동의하는 ‘엘리트주의적’인 통치 기준을 바탕으로 기업들의 배를 불리고 일반 시민들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악마였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들의 이윤을 위해 파시즘에 동의하고 파시스트를 후원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한 기업가들과 정계 인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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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다르다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상황이 있을까. 그의 당명은 분명 노동자와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실제로도 그는 다수의 시민들 앞에서 시민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강력했고 시민들은 그에게 표를 던졌다. 절대다수의 민심을 사는 한편 그는 기업가와 대자본을 소유한 자들을 위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악마나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으로 속을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나치는 내부에 존재했던 진짜 ‘좌익’ 당원(저자에 따르면 명확하게 묘사하긴 어렵지만 전반적으로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처단하기도 했다. 실업자층이나 하층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돌격대가 그것이다. 서민들로 구성된 돌격대는 1934년 7월 1일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 돌격대는 곧 상층 부르주아와 상위 중산계급, 귀족 가문의 일원들을 중심으로 모집된 친위대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모순적인 행보를 보임에도 히틀러는 당명을 바꾸지 않고 그가 몰락하기까지 그대로 유지했다. 전형적인 프로파간다식 대응 방식으로 그는 평생을 일관했다. 자크 파월은 이러한 “나치즘과 자본주의 역사를 친밀한 관계의 연대기이자 일종의 러브스토리”라고 표현한다.

 

대형 자본가들이 히틀러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이유는 히틀러가 재무장 프로그램을 비롯해 군사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나라와 전쟁을 할수록 필요한 물자와 무기들은 많아지기에 당대의 독일이 놓였던 폐쇄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외부에 투자처를 확보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내부에서’ 좋은 투자처를 개척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민간에 피해가 초래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자신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고 계속해서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희생당한 사람들은 나치독일에 의해 처형 대상으로 강제되었던, 혹은 관심을 둘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사소하다고 여겨진 존재들이다. 어느 쪽이나 힘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히틀러는 잔인했다. 그러나 더욱 잔인한 존재는 히틀러의 뒤에서 하이에나처럼 이윤의 때를 노리고 있었던 상류 자본가들이었다. 나치 독일의 경제 정책은 너무도 당연하게 전쟁으로 이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희생을 착취했다.

    

 

“독일의 기업과 은행은 전쟁 기간 동안 자신들이 기대했던 높은 수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전쟁 초기에 독일 재계가 올린 수익은 어마어마했다. 1940년에 기업과 은행에서 올린 수익은 [전례 없이 높은 수준으로 수직 상승]했다. … 193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이게 파르벤 등 기업의 세후 수익은 1939년과 1940년에 계속 늘어나다가 1941년과 1942년에는 다소 주춤했다. 그럼에도 최소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유지되었다. 더욱이 이들 기업은 이익을 최소화해 소득을 신고했다.” (1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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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탄압의 연속


 

히틀러가 유대인을 탄압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세계사 서적을 뒤져보아도 저명하게 등장하는 사실이다. 그는 당대 독일의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자로서 유대인의 뿌리를 독일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다. 그의 나치식 세계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중으로 유해한 민족이었다. 첫 번째로는 독일의 ‘선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대비되는 ‘악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두 번째로 그들은 독일의 ‘선한’ 자본주의자들과 대비되는 ‘악한’ 자본주의자들인 ‘금권 세력’이었다. 재산이 없는 가난한 유대인들은 선별적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가스실에서 고문을 당하여 죽거나 값싼 노동인력으로 부려지는 등 수모를 당했고 자영업자와 같은 중산계급 유대인들은 가진 재산을 몰수당하고 일자리를 잃었으며 똑같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독일 바깥의 영역으로 추방당했다.

 

나치즘의 집권이 장기화될수록 부유한 유대인들도 처분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히틀러는 재산이 막대한 유대인들에게 ‘아리아화(Arianisierung)’를 명목으로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들을 ‘아리아계’ 독일인들에게 헐값으로 매각할 것을 강제했다. 나치당과 독일 재계는 아리아화 운동을 통해 유대인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거나 그들의 자본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 자산을 증식시켰다. 히틀러 전기를 작성한 이언 커쇼에 따르면 부유한 유대인들을 착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들이 재계였음을 밝히며 그들은 “유대인들을 희생시켜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그 수익이 많든 적든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들은 수백 개의 유대계 회사—바르부르크(Warburg)와 블라이흐뢰더(Bleichroder)와 같은 설립된 지 오래된 민간 은행까지 포함해서—를 마치 폭력배가 강탈하듯 헐값에 사들였다. 가장 많은 것을 차지한 곳은 재계였다. 마네스만, 크루프, 티센, 플리크, 이게파르벤과 같은 대기업과 도이체 방크, 드레스드너 방크와 같은 대형 은행이 주요 수혜자였다.”

 

유대인에게 행해졌던 가혹한 조치들은 깊게 찾아볼 필요도 없이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관련 서적 전반에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책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는 부분까진 다루지 않고자 한다. 사실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들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았는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홀로코스트의 현장에 더욱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에게 닥칠 운명이 무엇인지 알지조차 못한 채 태연하게 가스실 앞에서 담소를 나누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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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당 휘하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탄압을 그려낸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탄압 행위는 반유대주의에 그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표면적으로 표방했던 사회주의를 부정하며 노동조합과 같이 중하층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각종 활동들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자본가와 달리 이들에게는 그 어떠한 이익이나 권리도 반갑게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노예 부림에 가까운 가혹한 처사였다. 나치당 집권 하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1933년 이전과 비교했을 때 3시간에서 4시간 정도의 추가적인 노동이 강제되었다. 독일의 역사학자인 클라우스-마르턴 가울(Claus-Martin Gaul)은 독일 노동자들이 1939년에 이르렀을 때는 주당 평균 47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고 밝혔다. 1933년에 주당 평균시간이 42.9시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4.1시간이나 노동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그에 반해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해서 식료품 가격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의복의 가격도 올랐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치당이 표면적으로 홍보했던 것처럼 1933년에서 1939년으로 향할수록 절대적인 실업자 수 자체는 550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실업자의 수가 감소할수록 노동자 개인의 삶의 질은 끝없이 낮아졌다. 명목임금은 상승했지만 나치당을 위한 기부금이나 회비로 상당수가 빠져나감과 더불어, 절대적인 노동자수가 많아지면서 개인에게 돌아가는 파이 역시 작아졌기에 실질임금은 하락했다. 자신들의 노동력을 낮은 임금을 받고 제공함으로써 대자본가와 기업가, 은행가들은 이러한 노동력들을 바탕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였다. 파월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일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희생을 바탕으로 사회적 생산물 ‘파이’중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할 수 있었다.”

 

저자는 히틀러 역시도 ‘평범한’ 독일인들의 생활수준을 걱정하긴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주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이유에서였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이 가난한 상황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군을 지원할 수 있는 ‘국내 전선(home front)’, 즉 민간인이 군을 지원하는 체제를 구축하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래서 히틀러는 그냥 전쟁을 택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쥐어 주어 주요 자본계층의 이익을 줄이는 행동은 할 수 없었기에 식민지를 개척해서 점령국 국민들을 약탈하고 착취함으로써 독일의 내적 안정을 이루고자 했다. 정말 재미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대체 그가 수호하고자 마음먹었던 ‘안정’이란 무엇인가. 모두를 위한 독일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을 위한 독일 사회의 안정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을 포함해서 자신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던 대자본가들만을 생각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은 ‘가짜 사회주의’, 즉 명목상으로만 사회주의였지 실제로는 자본주의 정당이었다. 이 자본주의, 20세기의 자본주의는 소규모 사업가들을 위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대기업의 대형 은행의 대기업가들을 위한 자본주의였다. 전문용어를 쓴다면 ‘독점기업’과 ‘독점자본’을 위한 자본주의였던 것이다.” (1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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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더욱’ 악마였던 존재들


 

악인이 천년만년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기에 히틀러 역시 심판을 받고 물러나야만 할 시기가 찾아왔다. 그와 주변부 고위 인사들의 예상과 달리 독일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패전국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독일이 소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면 동쪽 땅에 자신들의 또 다른 자본 분수를 세우려는 야망을 내비추었던 자본가들은 독일의 패망이 확정되자마자 나치의 이용가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지하고 손길을 떼버리려고 했다.

 

히틀러의 이용가치가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기업들과 은행들은 본격적으로 나치당과의 이별을 선고하기 시작했다. 전범기업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그들과의 인연을 정리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이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나치 독일의 패망이 기정사실화되는 순간 기업들은 전범들과 상부상조하면서 이익을 선점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나치의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기업가와 대자본가, 각종 금융계 및 정치계 인사들은 이토록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자랑했다.

 

이는 유럽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였나.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밝혔듯 제2부는 나치당과 긴밀히 공모했던 당대의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역시도 선인이 아니었다. 1929년에 심각한 대공황을 겪은 이후 헨리 포드와 같은 미국의 대기업가들은 새로운 투자처로 독일을 지목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산업계와 금융계에서는 히틀러의 성장을 반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들고 나온 ‘전쟁’이라는 카드가 그들의 수익을 올려줄 긍정적인 기제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모든 노동운동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클 리 없었고(이런 점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쉬웠고), 군수 산업의 성장에 집중함으로써 공업과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하던 많은 회사들의 눈길을 이끈 것이다.

 

또한 서비스 사업가들도 나치 정권을 “선전하는” 파시즘의 “대변인”으로 명성을 떨칠 기회를 얻었다. 재무장 프로그램을 위시하여 공격적인 성장을 이뤄내고자 하는 히틀러의 “전쟁 위주 경제”는 수많은 미국 자본들의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미국 내부에서는 비교적 ‘사회주의적’인 정책으로 시장경제에 개입하던 루스벨트에게 그가 유대인일 것이라고 조롱하며 ‘로젠펠트’라는 별명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루스벨트가 진행하는 뉴딜 정책은 ‘주딜(Jew Deal’ 정책, 즉 유대인 정책이라고 조롱했다. 그들은 파시스트를 그들 경제 활동의 구원자로 칭송하기까지 했다. 돈을 위해서.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주요 인사들은 전쟁에 집중된 경제라는 틀에서 미국 자본이 활발히 독일에 투자되는 데 매우 만족해했다. 미국 기업의 독일 지사에서 공급되는 전쟁 물자는 질적, 양적인 측면에서 나치 거물들의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우수했다.” (234p)

 

 

그런 와중에도 미국 자본들은 자신들이 나치 독일에서 벌이는 사업 활동이 미국 내에서는 주목을 크게 끌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국인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홍보활동을 진행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독일에 자회사를 두면서 미국의 기업과 은행은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다. 일례로 제너럴모터스는 전쟁 기간 동안 정부의 주문으로만 134억 달러의 매출과 6억 7300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했다. 미국 정부도 우호적으로 반응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령을 통해 특별 허가를 받은 기업들이 적국이나 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중립국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저자는 당시의 미국 현행법의 정신이 적국과의 어떠한 거래도 용납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루스벨트의 행보가 현행법 정신에 명백하게 위배된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나치와 협력하거나 나치 독일에서 사업을 꾸렸음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손해보상을 받기도 했다. 유럽의 파시즘이 종말을 맞은 시점에 기업가들과 은행, 각종 거물급 자본가들은 아주 “조용하게” 판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조용히 빠져나와 주도면밀하게 이윤 추구 활동을 이어나갔다. 또한 나치 독일의 핵심적인 정치계 인사로 활동했던 인물들은 미국의 상류 자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전범재판의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거나, 신분을 위조하거나 새로 만들어 아르헨티나와 같은 먼 나라로 떠나기도 했다. 미국은 ‘대자본가들의 경제 권력이 온전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조를 고수하며 나치 정권을 옹호했던 독일 산업계와 금융계 지배층에게 “사실상의 사면”을 선포했다.

 

히틀러는 역사에 길이 남을 범죄자다. 그의 나치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학살과 착취 활동은 비뚤어진 신념을 유지한 인물이 나라의 핵심 권력을 쥐게 될 때 어떤 재앙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만이 범죄자인 것은 아니다. 악마가 한 명 뿐인 것은 아니다. 악마의 뒤에 숨어서 상황을 탐욕스럽게 관조하는 또 다른 악마의 무리들도 명백하게 악마다. 파월에 따르면 히틀러와 나치세력 뿐 아니라 당대의 독일 재계, 미국을 비롯해 파시즘을 옹호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득한 각국의 대자본가와 정치 인사들 모두 악마다.

 

어쩌면 그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악마다. 분명히 범죄 정권과 공모하고 해당 정권의 사회에서 부당하게 이윤을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까지 처벌을 피해가지 않았는가. 아마 그들은 떳떳하지도 모르겠다. 해당 사회 속에서 “정당하다고” 혹은 “정당한 것에 가깝다고” 규정된 질서에 따라 부를 창출했을 뿐이라는 당당한 변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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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선’의 자명함


  

 

“…그들은 나치가 추악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독일에 있던 관리자들이나 미국 본사에 있던 기업 소유주와 경영진은 그런 세부적인 사항에 개의치 않았다. 미국 본사에서도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그들이 중시했던 건 무조건 히틀러와 협력하면 전례가 없을 정도로 큰 수익을 긁어모을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나치의 모토였던 ‘독일이 최고(Deutschland uber Alles)!’를 한 단어만 바꾸면 아마도 그들의 모토가 되었을 것이다.

 

"수익이 최고(Profits uber Alles)!” (347p)

 

 

나는 위선이 싫다. 나도 살면서 종종 위선을 저지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저지르건 타인이 저지르건 간에 위선은 매우 싫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선이란 기본적으로 앞과 뒤가 다른 행색을 의미한다. 선의 행색을 뒤집어 쓴 채로 뒤에서는 온갖 악행을 일삼고 다니는 것은 싫은 것을 넘어서서 무섭다. 나치당은 원래도 나에게 그런 존재였지만 이제 그런 존재’들‘이 더 생길 위험에 처했다.

 

자본력을 내세우며 나치당의 탄생과 성장 전반에 은밀한 후원을 보냈던 모든 사람들. 돈이라는 가치를 맹목적으로 좇으면서 그에 따르는 희생의 책임은 타인에게 내맡기는 모든 존재들. 이들 역시도 확실한 위선자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분명 나치당의 집권이 히틀러 개인이나 그의 주변인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리라는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그 실체를 직격으로 고발하는 서적을 읽으니 상상 이상으로 허망하다. 결국 이 역시도 자본의 문제, 돈의 문제와 결부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이 저서 역시 한 역사학자가 제시한, 파시즘 사회를 이해할 또 다른 관점의 일종으로 이해한다면 나의 두통 해결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분명 이 서적 내에서 역사적으로 ’사실적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합당하게 추론한 대목들이 존재하고, 자본주의가 도래한 사회에서 집권당이 아니었던 정당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 중 하나가 재정적 여유라는 것을 고려할 때,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 산업을 바탕으로 막대한 재화를 벌여들었던 것임을 고려할 때. 자크 파월의 견해는 상당히 타당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자본의 손을 거쳤다는 점은 명백하다.

 

두 마리를 토끼를 다 잡으려는 행동은 욕심이라고 옛 속담에서 배웠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그 욕심을 비틀린 방식으로 현실에 구현해내는 존재들이 아주 많다. 자본이 좋고 계급주의와 엘리트주의가 좋고, 유대인을 싫어하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형식적인 투표 절차에서 민심을 끌어 모을 수 없을 것 같으니 표면적으로 ’사회주의‘를 위시했던 히틀러의 나치당이나. 나치 정권 하에서 돈을 벌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대다수의 민중들이 혐오하는 나치 독일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은 보이기 싫었던 각국의 기업과 은행들이나.

 

이들은 모두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았다. 잡은 뒤에도 놓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자멸했고 나치당 핵심 인사들도 재판에서 처벌을 받았지만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재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람들도 정말 많다. 그리고 기업들은 온갖 로비를 통해 ’꼼수‘를 부려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속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위선을 저지르는 자들에게는 유효하지 않은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에 한동안 긴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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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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