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톡 쏘는 탄산과 레몬의 신맛을 삼킨 뒤 혀에 남는 것 : 레몬사이다썸머클린샷

이 연극은 '잼 있다'
글 입력 2019.10.24 15:2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1_c김희지.jpg

 

 

 

'보통'의 농구 연극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 앞에 붙은 ‘보통’이라는 단어에 왜 크게 주목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여성’ ‘농구’가 나에게는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까? 내가 생각했던 연극의 전개는 이런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농구를 시작하면서, 성별과 스포츠라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그에 따른 갈등과 극복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 속에서 내가 간과한 것은 ‘보통’이라는 단어다.

  

그들의 농구 경기가 끝난 후, 나는 다시 한번 ‘보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보통은 ‘일반적으로’ 또는 ‘흔히’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음’,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 내가 한 시간 동안 빨려 들어갔다가 나온 곳은 어느 특별한 공간도, 특별한 시간도 아닌 그저 내가 앞으로 살아갈 그저 흔하고 일반적이며, 특별하지 아니한 ‘보통’의 농구 경기였을 뿐이다.

  

 

KakaoTalk_20191024_150833282_02.jpg

 


극장 안의 의자는 농구장의 관중석에 앉은 듯한 느낌을 준다. 밑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기장과 경기의 흐름을 모두 읽을 수 있도록 한참 위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정렬된 의자들. 저 경기장 아니, 무대 위에서 마음껏 튀어 오를 선수들의 발걸음을 상상해본다. 저는 정말 마음껏, 열성적으로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이야기 속에서 인물들이 집중하는 것은 ‘농구’다. 처음 선수들이 모이는 자리. 농구 경기를 진행하려면 교체 선수까지 최소 10명은 필요하다. 하지만 농구 골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하나, 둘, 셋, 넷… 총 네 명. 그래도 다섯 명은 모일 줄 알았는데. 농구 한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의 기본 인원이 다섯 명이란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잔뜩 날이 서있는 표정 한 명, 어딘가 차분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그래도 낙관적인 표정 한 명, 기대감 가득한 표정 한 명, 결심한듯한 표정 한 명. 각자 다른 표정들을 읽어 보며 괜히 나까지 불안해진다. 경기고 뭐고, 연습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3_c김희지.jpg


  

골대 옆으로 ‘연정’이 지나간다. ‘연정’은 작업 중인 게임 시나리오의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한 문장도 쓸 수가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주인공의 행동을 선뜻 써 내려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발견한 ‘재영’의 회유에 못 이겨 비워져있던 농구 팀의 다섯 번째 자리에 앉는다. 농구를 학창 시절 이후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던 ‘연정’까지 합류하고 나니 비로소 5명의 한 팀이 ‘나 준비됐어요!’를 외친다. 농구 경험이 있는 ‘혜준’과 ‘재영’ 그리고 ‘환희’를 제외한 ‘연미’와 ‘연정’은 농구의 규칙조차 낯설다.

  

뭐야, 농구 공을 그냥 링 안에 던져 넣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촘촘한 팀워크가 필요한 스포츠였어? 팀 별로 5명의 선수가 코트에 서있고, 선수는 모두 공격과 수비에 참여한다. 농구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PG), 슈팅 가드(SG), 스몰 포워드(SF), 파워 포워드(PF), 센터(C) 로 이루어진다. 포인트 가드는 경기 중 코트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한다. 팀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두 번째는 슈팅 가드. 슈팅 가드는 포인트 가드와 함께 외곽에서 패스를 해주거나 돌파로 외곽 수비를 흔들어 공격을 시도하며, 특히 3점 슛을 많이 날린다. 스몰포워드는 다재다능함으로 공수를 모두 책임지고, 파워 포워드는 골 밑과 중거리를 넘나들며 공격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센터는 골밑 슛을 책임지고 블로킹으로 상대 팀의 득점을 막기도 한다.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5_c김희지.jpg

  


각자의 포지션까지 정해지고 나니, 이들의 연습은 생각보다 순조롭다. 아, 두 사람만 빼고. ‘아줌마는 농구 왜 해요? 아니, 이기려고 하는 거죠!’ ‘혜준’은 ‘연미’가 영 못마땅하다. 농구를 진짜 하고 싶어서 들어온 것 같지도 않고, 허우적대는 몸동작으로 어떻게 슛을 넣겠다는 건지. ‘연정이는 언니인데 나는 왜 아줌마냐!’ ‘연미’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날아온다. 그렇지만 투닥거리는 순간에도 그들의 연습은 진지하다. 절대 손에 붙을 것 같지 않던 농구공도, 절대 잘 굴러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팀워크도 연습을 거듭할수록 착착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판에 박힌 듯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을 더 많이 봐왔던 것 같다. 희생적인, 겁이 많은, 피해를 주는, 절대 야망적이지 않은, 잘 보살피는, 묵묵히 응원하는. 그것은 여성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덕목’같은 것들이 아니라는걸, 이들을 보며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인물들이 가진 개성과 성격은 정말 각양각색이다. 왜 여성은 순수하고 조용하며 사근사근해야 하는가?

  

이 극은 중간중간에 유머를 잃지 않는다. 과장된 몸짓이나 희화화를 통한 웃음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유희적 요소들을 대사와 연출에 조금씩 뿌려놓는다. 공연 내내 많은 관객들이 웃었다. ‘연미’의 말 들에서 오는 엉뚱함과 현실성에 많은 이들이 웃음 지었다. 그의 말들은 바라보는 이 또한 팀원의 한 명으로 빨아들인다. 나는 경기 내내 그들이 가진 저마다의 표정에 공감하고 응원을 보내며 눈물 흘리고 껴안는다.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9_c김희지.jpg


  

이들에게도 드디어 실력 발휘할 시간이 왔다. 대회 출전하기 전, 같은 경기장을 쓰는 초등학생 팀과 경기를 해보기로 한다. 그래, 농구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모인 우리들. 우리가 노력한 것들을 다 보여주자! 하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처참하다. 그들이 10점 넘게 득표할 동안 레몬 사이다팀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한마디로 빵점. 꼭 이기고 싶은 경기에서 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감정이 얼마나 우리를 바닥끝까지 내려 꽂는 것인지.


녹화해둔 경기 장면을 돌려보면서 부족한 부분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결국 서로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분노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은 언성을 높이고 이들은 기약도 없이 헤어져 버린다. 정말 농구를 그만둬버리는 거 아닐까? 걱정도 잠시. 농구에 대한, 서로에 대한 끈끈함은 쭈뼛쭈뼛 다시 농구 골대 밑으로 모인다. 드러난 약점은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13_c김희지.jpg


  

‘아니야 나한테 절대 절대! 공 주지 마요 절대!’ ‘언니도 공 던지고 싶잖아요. 표정에 다 쓰여있어요.’ ‘내가?’ ‘연정’은 지금 막막하다. 마음처럼 들어가지 않는 농구공도 그렇고, 클라이막스에서 막혀 버린 시나리오도 그렇다. 아무도 먹지 않는 레몬 사이다를 마셨을 때도 막막함은 풀리지 않는다. 게다가 모두에게 중요한 마지막 경기에서, ‘연정’은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본인의 손에 경기의 승패가 달려있는 것 같다. 마치 본인이 만든 게임 속 캐릭터처럼. 총을 쏘기만 하면 되는데… 슛을 날리기만 하면 되는데… ‘연정’은 두렵다. 두려움의 실체조차 모호하다. 그렇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시도라고 했던가. ‘연정’은 마지막 한 발을 날린다. 과연 그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이어질까?

  

농구라는, 우연성이 많이 개입되는 경기를 어떻게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풀어나갈 것인지 궁금했다. 우리 인생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공은 그들이 서 있는 경기장에서 어떻게 다뤄질까. 그 속에서 마음 졸이며 농구 골대를, 마구 솟아오르고 튀어 오르는 농구공을, 선수들 뺨에 흐르는 땀방울들을 바라본 사람들은 안다. 지켜보는 관객들은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한다. 그들이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경기의 막바지에, ‘연정’이 날리는 샷을 모두가 숨죽여 지켜본다.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_공연사진_11_c김희지.jpg

 

 

   

이 연극은 '잼 있다'


 

나오면서 기분이 이렇게 몽글 몽글하고 따뜻한 연극은 오랜만이다. 내 앞에 걸어가는 관객분이 중얼거리는 달달한 향기가 귓속에 파고든다. ‘아 재밌다.’ 내 마음도 중얼거린다. ‘그러게요. 진짜 재밌다.’ 온몸이 저릿 저릿해지는 레몬사이다는, 그래서 아무도 먹지 않는 그 레몬사이다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이 연극은 ‘잼 있다.’ 톡 쏘는 탄산과 레몬의 신맛을 삼킨 뒤에 혀에 남는 것은 잼처럼 달짝지근한 잔잔한 달콤함이다. 그 달콤함에 우리 마음은 진득하게 눌어붙는다. ‘연정’이 처음 자신도 모르게 날렸던, 톡톡 쏘는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 그 긴장되고 저릿한 시도 뒤에 남은 것은 달콤함과 그 달콤함의 따뜻한 끈적거림이 끈끈하게 이어준 우리 마음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자그마한 운동장이 하나가 있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괜히 운동장의 작은 골대 밑을 살핀다. 초등학생 남짓해 보이는 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다. 모두들 초롱 초롱한 눈빛을 띠고 골대를 바라본다.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좋겠다. 스포츠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접점을 찾고 싶어 농구를 시작했든, 그토록 좋아했던 농구를 부상으로 인해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했든, 삶의 답답함을 벗어나고자 농구에 발을 들여놓았든… 좋아하는 마음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우리 사이에는 레몬 사이다의 달짝지근함이 녹아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슨 사이다? 레몬 사이다!

  

 

[장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