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과 책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함께 보기 [공연예술]

박지리 작가의 장편소설 『다윈 영의 악의 기원』(2016)과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
글 입력 2019.10.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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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2016년 故 박지리 작가가 발표한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로, 작가가 아주 짜임새 있게 창조해 낸 세계 안에서 ‘러너 영’, ‘니스 영’, ‘다윈 영’ 3대에 걸친 인물들을 이야기하며 ‘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18년 10월, 서울예술단에서 이 소설을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으로 무대화했고, 현재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재연 중이다. 서울예술단은 <잃어버린 얼굴 1895>, <윤동주, 달을 쏘다> 등 한국적인 소재를 위주로 공연을 제작해왔는데, 한국 배경도 아닌 박지리 작가만의 세계를 서울예술단이 무대화했다는 게 생소한데다 초연 당시 공연에 대한 호평이 많이 들려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초연은 공연 기간이 짧아 책으로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먼저 접한 후, 최근 무대로 다시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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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뮤지컬로 제작한 사례는 세계문학전집의 제목을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대로 옮겨왔느냐이다. 그 중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잘 압축하여 비장한 음악과 연출로 탁월하게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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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것은 ‘푸른 눈의 목격자’이다. 이 장면에서 아버지인 니스의 죄를 덮고자 레오를 죽인 다윈 영과 러너의 과거를 없애고자 제이를 죽인 16살의 니스 영은 다리 양 끝에 위태롭게 서있다. 다리 아래에는 ‘12월의 혁명’으로부터 도망쳐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낯선 집의 문을 두드리는 과거의 러너 영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현재의 러너 영이 서 있다. 그 세 사람은 ‘나의 열여섯 살을 던진다 … 나는 나의 세계와 결별한다 …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된다.’고 함께 노래하며, 3대에 걸쳐 진화된 악과 운명의 굴레를 효과적인 시각적 구도로 함축한다.


 

“다윈은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때 맞은편 검은 차창 위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 똑바로 선 인간.” (p.832)

 


『다윈 영의 악의 기원』 후반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필자의 독서 인생 중 가장 큰 충격을 준 동시에,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 문장이다. 이는 무대에서 빨간 끈으로 레오를 옥죄는 검은 후드들과 다윈의 모습으로 재현되며, 무대 오른편에는 제이의 목을 조르는 니스의 모습을 동시에 배치하여 아버지에서 아들로 악이 대물림되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제이를 죽이던 당시를 상기하는 니스의 넘버 ‘괴물’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배우들이 ‘살인자 살인자’를 속삭이듯이 반복하며 니스를 압박하는 음악적 표현과 연출이 돋보인다.

 

하지만 서사적인 면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원작 속 ‘오래된 것들 행사’에서 레오가 다윈과 교환한 것은 유효기간이 지난 놀이공원 입장권이지만, 극에서는 제이가 쓰던 녹음기이다. 원작 소설 마지막 장의 ‘다윈 이후의 다윈’은 순수와 아이의 상징이자 레오와의 우정의 상징인 놀이공원 입장권을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 칭하며 구두로 짓밟는다. 그리고 레오 삼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길 포기한 루미와 함께 걸어간다.

 

다윈은 완전한 어른으로, 악으로, 성공적인 진화를 이룬다. 왜 이 작품의 제목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에 비해 무대 위에서 레오를 죽인 후의 다윈은 니스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살인을 저지른 자신을 괴로워하는 다윈은 니스처럼 죄책감에 시달리고 그 죄에 지배당해 원치 않는 삶을 살 것 같았다. 그래서 ‘악의 진화’보단 ‘악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이밖에도 루미나 조이 등 영 가문 주변 인물들의 서사가 상당 부분 축소된 점도 아쉽다. 뮤지컬에서와 달리 원작에서 루미는 ‘여성’이라는 부당한 이유로 프라임스쿨에 입학하지 못한 프리메라 여학교 학생이며, 이에서 비롯된 열등감 등 제이 삼촌에 집착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충분히 서술된다.

 

그래서 만약 ‘다윈 영의 악의 기원’에 관심이 생겼다면 뮤지컬을 먼저 보고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뮤지컬을 관람하며 신선한 충격과 즐거움을 느낀 후에 책을 읽으면 인물들의 서사와 행동의 틈을 퍼즐 맞추듯 맞추어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엄청난 책의 두께가 무색할 정도로 흡입력 있게 독자들을 작가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인물들을 속속들이 이해시켜 독자들이 그 세계 밖으로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훌륭한 작품이다. 또 창작가무극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책을 읽을 때의 독자들의 상상을 그대로 무대에 옮겨 놓은 듯하며, 작품 전체에 쓰인 문학적인 가사가 여운을 깊게 남기며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만드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여전히,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악의 기원은 무엇인가? 가족애, 그리고 사랑을 악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는가? 어떠한 죄도 짓지 않은 채 사회로 편입될 수 있는가? 악은 계속해서 진화하는가? 악의 굴레를 끊어내면 역사 또한 무너질 것인가?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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