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김지영을 모른다 - "82년생 김지영" 영화화를 앞두고 다시 읽기 [도서]

페미니즘과 남녀혐오의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 최전선에서
글 입력 2019.10.1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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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과 영화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영화화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즘의 최전선에 있는 책 <82년생 김지영>. 원작은 물론 영화화 확정을 둘러싼 각종 이슈가 있었다. 대체 이 책이 무슨 책이길래 이렇게 많은 관심이 집중되는걸까. 개봉을 눈 앞에 두고 원작을 다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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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82년생 김지영’ 표지(왼쪽), 배우 정유미가 영화 ‘82년생 김지영’ 주인공으로 나선다.

 

 

 

페미니즘과 양성평등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왜 페미니즘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의 권리 및 평등을 중요시 여기며 성평등을 만드는 이론이며, 여성주의로 번역된다. 권력관계에 의한 부당한 성폭력을 폭로한 미투 운동과 ’몰카와의 전쟁‘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사실 여성차별의 역사는 오래됐다. 페미니즘(feminism)이라는 용어도 19세기 여성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널리 공유되며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발전하면서 이미 등장했고, 한국의 페미니즘은 1920년대에 시작한 것으로 본다.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며 유리천장 등 사회분야, 여성의 성 상품화 등 문화분야에서도 성차별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갑자기 왜 페미니즘이냐고, 아직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차별의 역사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닌만큼 페미니즘 역시 갑자기의 일이 아니며, 이 두 사건을 입구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우리는 아직 페미니즘을 지나오지 못했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이 두 사건조차 아직 다 해결하지 못했고, 인권과 차별에 관한 문제라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주의(페미니즘)를 이야기해야 하는가? 여성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한 쪽 성에 편향될 가능성을 함의하고 있지 않은가. 양성평등은 이른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양성평등’이라는 기존의 단어로는 여성들이 받는 차별이 심도있게 다뤄지기 어렵고, 여성주의를 통해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인권의 신장을 말할 때 비로소 양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불온서적 <82년생 김지영>과 혐오


 

 이런 상황에서 2016년 10월에 등장한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차별의 현실을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주변에 한 명쯤 있을법한 ‘김지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과 그의 어머니가 ‘여성’으로써 받아야했던 차별을 세세히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가장 특징적인 점을 고르라면 통계와 참고자료일 것이다. 책을 읽다 그녀가 겪어야했던 차별적인 발언과 상황에 마음이 답답해져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들 즈음 객관적인 지표가 그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열풍과 함께 화제의 중심에 있던 책이다. 일각에서는 책의 내용이 과장은 아니더라도 차별의 사례를 집대성한 책이라는 의견 즉, 여성들이 받고있는 차별의 합이지 여성이 겪는 일상적인 차별은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반해 김지영은 여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즉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다는 의견이 있었다.  판단을 해야한다면 나는 차별을 직접 겪어야했던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책을 둘러싼 또 다른 이슈로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여자 연예인을 지탄하거나 탈덕, 심지어는 사진을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 불온서적을 규제하던 독재군부도 아니고, 특정 책을 읽는다고 비난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 무엇이 그들이 페미니즘을 혐오하게 만들었을까.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업고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를 필두로 범죄수준의 ‘미러링‘을 자해하거나 ’한남충은 이래서 안 돼‘등의 이야기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기 위해서 분노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일부 여성들 중에서는 이러한 과열양상과 범죄수준의 미러링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일종의 필요악이라 여기는 인식도 적지 않은 듯하다. 페미니즘의 정신은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지만 일각에서는, 남성혐오. 여성혐오. 서로에 대한 혐오 양상이 짙어지는 것 같아 조심스럽고 안타깝다.

 


 

개인적 혐오와 구조적 혐오 


 

 이처럼 페미니즘은 이제 20,30대에게도 낯선 일이나 옛 일이 아닌 현재여서, 페미니즘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준비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페미니즘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이해해볼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에서 종종 남성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발언권을 잃는다. 때로는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남성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기만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너는 남자잖아. 아무리 말해도 넌 몰라’) 페미니즘에 관해 물으면 한숨부터 쉬거나, 다분히 방어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니 건설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느낄때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오랜 시간 차별의 주체였던 남성들이 안고 가야할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리 알려고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아니 어쩌면 쉽게 안다고 생각하고 깊이 고민하지 않으니까. “결국 일을 그만두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p.170)

 

 <82년생 김지영> 통해 나는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게 되는 두 가지 양상을 다뤄보려고 한다. 마지막 챕터의 등장하는 남자는 구조적인 층위의 차별과 혐오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인지했지만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차별은 인지하지 못한다.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모르게 되는 경우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p.175) 그러나 과연 그가 진정으로 알았다면,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안다고 말하면 이내 지겨워지고, 그만두는 일이 쉬워질 뿐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알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를 지속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예민하지 못한 감수성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될 가능성을 함의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개인적의 층위의 차별은 인지하지만 구조적인 층위의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근데,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p.69) 내가 이 문장을 골라낸 것은 남자로써 어떤 변명을 하고싶은걸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 좋은 남자도 자신도 모르게 여성차별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김지영씨의 남편이 그렇다. 그는 평범한 좋은 사람처럼 읽힌다. ‘김지영 씨의 상황과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해주고‘(p104), 아이스크림 가게 일을 하려는 그녀에게 ’하고싶은 일‘인지를 재차 확인한다.(p.161) ’맘충’(p.164)이라는 말을 듣고 온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그런 생각 하지 말라며 달랠줄도 아는(p.165) 남편이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 해도,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정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는 잃지 않아도 되는 곳에 서 있다.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p.136)  남성이 일종의 기득권을 가진 현 구조에서 남성은 그 자체로 이미 구조적인 폭력을 가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도덕적이고, 좋은 사람인가의 문제와는 별개다. 그는 잃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잃겠다고 말할때만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모를 수밖에 없으므로 읽어야한다. 그리고 잃어야한다. 잃기를 다짐하며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그 예민한 감수성은 이른바 “여성화된 존재” 성차별을 받는 남자, 노약자, 장애인, 세상 모든 약자를 동시에 향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위치만 뒤바꾼 같은 구조의 재생산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같은 이유로 분노를 위한 분노도 멈춰서야 하리라.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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