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랍스터(The Lobster) [영화]

글 입력 2019.10.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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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허공에 붕 뜬 시간을 보내며 이 영화를 봐야지 하는 계획은 없었는데 밥을 먹고 정말 충동적으로 머리에 더 랍스터!라고 떠올라서 보게 된 영화. 상당히 충동적으로 본 영화라서 보기 이전에 줄거리를 읽진 않았고,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와 금지된 사랑이라는 키워드만 봤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것은 그저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해당 영화의 포스터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 전에 포스터에 이끌려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게 된 것도 있는 것 같다.


*

아래 내용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그리고 주관 주의


 

1. 이분법적 세계에서의 이분법적이지 못했던 사람


데이비는 호텔에 들어가면서부터 성향에 대한 물음에 본인을 양성애자라고정의 내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직원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또 신발을 고를 때에는 44 반 사이즈를 원했지만, 44와 55중 하나만 고를 수 있다고 했다. 호텔에서의 음악은 타인과 손을 잡고 춤을 추며 듣는 남녀 한 쌍이 부르는 블루스였으며, 숲에서의 음악은 양쪽 귀에 이어폰을 꼽고 홀로 춤을 추며 즐기는 일렉트로닉이었다. 그는 스스로 정의하는 본인의 위치와 무관하게 이분법적 잣대에 맞추어 본인을 다시 정의 내려야 했다. 이는 영화 자체의 세계관인 무성애와 유성애(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그러한 성향을 강요하는 사회)의 양극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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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 없는 등장인물들 그리고 영화의 온도


물론 데이비드와 그의 친구 둘의 이름이 간간이 나오긴 하지만 등장인물의 설명에서 친구들과 리더뿐 아니라 여성 주인공조차 이름이 없다. 이들은 웃음을 잘 보이지도 않으며 마치 감정이 없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음산한 느낌이 들면서 따뜻하게 느껴지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찾을 수 없었다. 키스를 나누는 장면까지도 차가웠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 무미건조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온도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대비의 수단이었고 결국 그도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3번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3. 이해와 감정의 교류가 아닌 '공통점 찾기'


호텔에서의 짝의 조건은 공통점이었다. 그렇기에 절름발이 친구는 여기저기 일부러 코를 부딪히고 피를 만드는 등 본인이 짝이 되기를 원하는 여성이 가진 특징인 '코피를 자주 흘린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기 위해 거짓 코피를 흘렸다. 이를 이상하게 보던 데이비드마저 후에 감정이 없는 듯한 여성과 짝이 되기 위해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데이비드는 유일하게 영화에서 진실한 감정을 가진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가 여성과 사랑을 나눈 것은(사랑을 나눈 것인지 성욕을 해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근시라는 공통점을 찾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성과 다른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웃기만 해도 다른 남성에게 다가가 막무가내로 눈을 벌려보는 등 근시가 아님을 증명하길 바랐다. 여성이 장님이 된 후 본인도 장님이 되려는 것까지 그러한 공통점 만들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연장선으로 데이비드의 성욕도 이 영화의 키워드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데이비드는 동물로 변해야 한다면 랍스터가 되고 싶다고 답했다. 이유 중 하나인 평생 번식을 하는 것. 이러한 욕구의 해결책이 공통점 찾기와 짝짓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4. 열린 결말에 대한 아주 주관적인 해석


사실 개인적으로는 열린 결말은 열린 결말인데 답이 정해져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유인즉슨 영화 초반 한 여성이 차를 몰고 가서 들판에 있는 당나귀를 쏘게 되는데 그 장면에 등장하는 당나귀가 총 세 마리였음에도 여성은 당나귀 한 마리만 쏘고 다시 차에 탄다. 아마도 이 당나귀가 데이비드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의문인 것은 근시 여인이 실제로 눈이 멀게 된 것이 맞는지. 내 머릿속에 물음표 세 개를 띄운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은 웨이터를 보고 감사하다고 하고 창밖을 보기도 한다. 이 장면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여성은 버려진 것이다.'라고 해석을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좀 다르다.


근시 여인은 병원에 다녀온 후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예요?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대장은 이 근시 여인의 데이비드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확인한 것 같다. 그러니 실제로 멀게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멀게 했더라도 (영화의 스토리 진행상 암묵적으로) 다시 돌려놓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후 일부러 근시 여성에게 연기를 시켰을 수도. 데이비드가 도시로 떠나는 것을 결심한 것은 워낙에 갑작스럽게 결정한 일이라 대장이 무덤에 들어가게 된 것까지는 상황을 미리 알지 못했고 대비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쓰면서도 엉성하고 아리송하지만 개인적인 해석은 이러하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자신의 눈을 찌르지 못하고 도망을 가다가 잡혀서 동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동물이 바로 첫 장면에서 죽은 소가 아닐까 싶다. 호텔에서 지내던 감정이 없는 듯한 여성이 동물이 되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장면은 없으며 친구마저도 '짝에게 끔찍한 일을 했다'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러니 그 여성은 동물로 변하지 않았고 결국 데이비드를 찾아 사냥에 성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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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강요하는 사회와 혼자 살 것을 강요하는 사회. 아마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전자에 가깝지 않나 싶다. 토스터에 손을 넣어도 말리는 이는 하나 없었고, 덫에 걸린 다리를 부여잡고 소리를 질러도 그들은 본인의 일이 아님에 웃음까지 보였다. 모 아니면 도 그게 아니라면 손가락질과 형벌 그리고 조롱거리.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의 다수와 다른 이념을 가졌을 때, 혹은 다른 모습과 다른 성향을 가졌을 때 등 우리는 소수에 대한 시선이 아직은 너무나도 부정적인 사회인 것 같다. 나조차도 아주 작은 것들로도 사회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도태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 영화에 대한 후기와 해설을 적으면서 자연스럽게 뜻밖에 다수와 소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다수와 소수라는 말조차 너무 상대적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다수와 소수로 가를 수 없다. 우리와 이 세계는 끝없이 변하고 영원히 한 쪽에만 서 있을 수 없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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