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을 통해 사랑을 통찰하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9.10.0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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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제 <아쿠아맨>을 다시 봤다. 투입된 자본 대부분이 컴퓨터 그래픽을 작동하는데 썼다니 눈이 아픈 건 불만 없다. 영상은 현란했는데, 캐릭터 대부분이 납작하게 빚어져 활기가 없었다. 아쿠아맨은 당위적으로 스스로가 영웅임을 감각한다. 악역은 당위적으로 악행을 벌인다. ‘왜’가 결여돼 공허했다. 메라와 아르토니아란 여성 캐릭터는 서사에 무용한 인물이었다. 여성이 조력자로서 영웅의 각성을 촉발하는 매개로 기능하는 양상은 익숙하다. 주체성은 탈각됐고 남성의 각성을 촉진하는 장기 말 정도로 소모된다는 비판이 제기돼도 비슷한 서사는 매년 소비된다.<아쿠아맨>도 별로 다를 건 없다. 거기서 메라와 여왕은 조력자도 못 된다. 변곡점의 순간에 이건 남성 영웅의 의무라며 발 뺀다. 없어도 될 법했다.


이제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 <죄 많은 소녀>, <국가 부도의 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래도 미미하다. 나는 <비밀은 없다>의 연홍 같은 캐릭터를 더 보고 싶다. 기존의 모성 관념을 반박하는 양태의 연홍은 모든 여성이 모성을 갖고, 그건 숭고하다,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가 실종된 딸을 찾는 까닭을 모성의 발로 같은 문장으로 설명하는 건 부적절하다. 강박과 집착, 등 다양한 층위의 감정 중 하나에 모성이 있을 뿐이다. 그는 관습적인 여성성 묘사를 배격하는듯한 캐릭터다. 과격하고 욕하고 주먹에 맞아 코뼈가 부러져도 서슬 퍼렇게 응수한다.


그동안 읽은 고전 서사에서 여성 인물을 비중 있게 다루는 건 <루딘>과 <고리오 영감> 정도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가부장제에 봉사하는 순종적 여성상의 전형이다. <광인일기>, <아큐정전>은 여성을 천박한 하층민으로 묘사한다. <더블린 사람들>은 비중이랄 게 없다.


<루딘>에서 나타리아는 잉여인간 루딘과 대비된다. 그럴듯한 언어로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타인을 선동하는데 능란한 루딘은 정작 그 언어를 실천하는데 미숙하다. 나타리아는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자각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하다. 의지와 의지를 실천할만한 심지가 있다. 그러나 소설 속 나타리아의 말로는 좋아하지도 않는 인간과의 결혼이다. 나타리아의 열의는 발휘될 여지없이 저물었다. 나타리아는 루딘의 위선, 루딘 내부에 뒤틀린 구석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소비되는 인물처럼 보인다. 나타리아는 서사에 종속됐다. 이야기의 도약을 위한 발판 정도다.


<고리오 영감>에서 고리오 영감은 외견상 희생자, 약자 같다. 배은망덕한 딸들은 자기 아버지가 몰락하도록 종용하는 형국이다. 서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읽힌다. 텍스트 내부에 좀 더 천착하면 영감은 욕망의 화신이다. 돈의 누적 말고 신분상승을 바랐기에 자기 딸을 상류층 자제와 혼인시켰을 테다. 딸들도 이를 알았기에 영감에게 돈을 요구했다. 영감과 영감 딸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고 성취되지 못하는 욕망은 그냥 욕심이라서 자기 파괴를 초래한다. 영감은 몰락하나 소설은 그 몰락의 중심에 딸들이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내부에까지 파고들지 못하면 영감은 부모 은혜 모르고 사치스러운 딸 때문에 죽는 인간인 것 같다. 진정한 부성의 전형 같다. 여기서도 여성은 사치스럽고 허영에 차 있는 인간으로 규정된다.

 


 

2.



내 독서는 사사롭고 개인적이어서 콘텍스트보다 여성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더 신경 쓰였다. 나는 모든 대중문화에 이데올로기가 내포돼 있다고 믿는다. 그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의식 형성에 기여함을 믿는 인간이다. 히틀러는 나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모든 대중문화를 검열했다. 전두환은 대중의 민주화 의식을 제어하기 위해 사회적 시멘트 효과의 일환으로 섹스, 스포츠, 스크린 문화산업에 투자했다. 모든 문화는 특정 집단의 사상과 가치관을 대변할 수 있다. 혹은 그것들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이 있다. 여기서 다룬 작품은 문학이고 예술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관통한 대중문화다. 그것들이 내포한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은 배제됐음이 아쉬웠다. 무시하고 업신여겨도 온당한 군상이라는 의식이 있음에 위화감을 느꼈다. 과거에 여성에 대한 의식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걸 어쩌겠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아쉬움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다.


그것들을 읽고 가장 많이 생각난 건 은희경의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이다. 내가 읽은 최초의 페미니즘 소설이 그것이었다. 거기서 여성인물은 이원화되지 않는다. 불륜을 다뤘음에도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통속적 ‘여적여’ 구도를 생산해내지 않았다. 불륜을 통해 같은 여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여성 연대가 가능함을 말한다.


주인공 여자는 상대가 유부남임을 인지한 뒤에도 관계를 지속한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금방 이혼할 거라 말한다. 그러나 말 뿐이다. 여전히 여자는 불륜녀의 처지다.

 

주인공의 엄마가 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 소송 중이다. 아빠는 불륜을 저질렀다. 이혼의 원인을 제공한 아빠를 힐난하는 엄마. 그러나 엄마의 신경질적인 잔소리, 집착을 겪었던 주인공은 엄마에게 동조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남자와 헤어지고, 엄마와 반갑게 통화하며 안부를 묻는다. 그는 불륜을 통해 사랑을 통찰한다. 남자는 아내의 잔소리에 질렸다며 그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남자가 아내의 단점을 나열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순간이 점점 많아지자 그는 문득 깨닫는다. 사랑은 무한하다거나 영원한 감정이 아니다. 애당초 감정이란 건 오랜 시간 같은 형태를 유지하는 바위 같은 것도 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변한다. 사람도 사물도 심지어 바위도 변한다. 사랑 역시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가 아내를 가리키는 호칭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마누라’라고 지칭할 때와 ‘집사람’이라고 할 때의 차이를 나는 알고 있었다. 집사람을 의존하고 살면서 마누라는 지겨워하는군요 그 두 가지는 똑같은 역할의 양면일 뿐이에요. 당신 아내와 내가 다른 게 뭐죠? 똑같이 당신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말해요. 담배를 순한 것으로 바꾸라 하고.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은 배려로 듣고 아내가 하는 말은 잔소리라고 짜증을 내죠...(중략) 언제까지나 새로운 관계는 없어요 (은희경,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창비, p31)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주인공은 이제 자신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 남자의 아내처럼 엄마 또한 아빠와 주인공에게 집착했다. 그러나 그것은 애정의 다른 양상이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 잔소리할 수 없으며 집착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집착과 잔소리는 평화와 윤택을 동반한다. 아빠의 와이셔츠가 빳빳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아침을 거르지 않고 활기찬 상태로 등교할 수 있었고, 준비물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갈 수 있었던 것 모두 엄마의 집착 때문이었다. 헌신의 이면이 집착이었다. 거기 의지해 살아왔으면서 이제야 그걸 경멸하는 건 이기적이다.


헌신하길 바라면서 동시에 헌신을 집착으로 규정하는 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확신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속물이 돼버린 우리는 시시시각 마음도 어떤 수치로 측정한다. 내가 가진 마음만큼 힘껏 사랑하면 되는데 이것이 사랑인지 의심하고 자문하려 든다. 측정이 완료되면 사랑도 권력관계의 일환으로 본다.

 

 

내가 넘어져 무르팍을 깨고 발바닥을 못에 찔리고 초경을 보고서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린 곳은 어머니의 끈끈한 타액 속이었다. 아버지의 몽롱한 담배연기 속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게 됐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반 평생 누리고 살아온 평화와 윤택 역시 바로 그것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거기 의지해 살아왔으면서 뒤늦게 헌신의 당연한 이면인 집착과 독선만을 탓할 수 있을까(은희경,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창비, p45)

 

 

 

 

3.



혁명의 구체적 성분을 파악하지 못해도 된다. 나를 억압하던 것이 전복되는 감각. 어깨를 누르던 아귀의 힘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감각. 그 감각만으로도 혁명에 동참할 수 있다. 대학 강의에서 들었던 발언 중 가장 인상적인 언어였다. 페미니즘은 혁명이다. 남성 중심의 질서가 온당하지 않음을 구체적 운동의 양상으로 표현하는 그들에게서 나는 경이로움을 느낀다. 나는 남성이기에 그들에게 전달하는 어떤 말도 공허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그래도 하고 싶다. 소란스럽다, 유난하다, 과격하다, 란 단어가 첨부돼 페미니즘을 희석하지만, 어쨌거나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이란 인장을 대중에게 조각했다. 그것 자체가 혁명이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출간된 지 20년이다. 페미니즘이 이데올로기가 돼 대중문화에 내포되는 양상을 더 많이, 구체적으로 보고 싶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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