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형적인 성녀, 악녀의 결말에서 벗어난 “벽속의 여자” [영화]

글 입력 2019.10.06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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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1960년에 개봉했던 영화 “로맨스빠빠”에 관한 글을 쓰면서 언급했지만, 나는 부모님 세대의 영화들을 즐겨 보기도 하고 일부러 보려고도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간혹 고전 영화를 감상하기가 힘든 순간들이 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금 과한 듯한 영상 효과라던가 평양 말씨와 가까운 당시 서울 말투까지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고착화된 여성과 남성의 역할 그리고 성차별이 거침없이 드러날 때이다.

 

그 때문에 영화를 보다가 눈살 찌푸리게 되는 순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고전 영화를 일부러라도 감상해보려는 시간을 가지는 이유는 결국 그 또한 영화가 탄생한 시간의 모습이라는 것과 그리고 내가 존재하지 않던 시간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창이라는 점이었다. 동시에 나는 그 견고한 시대상의 관념을 깨트린 작품이 행여나 있지 않을까 하며 그런 영화를 찾곤 했었다. 1969년 개봉한 “벽속의 여자”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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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 남진, 남궁원 주연의 "벽속의 여자



주인공 미지는 성민과 약혼한 사이다. 약혼식까지 올린 행복한 한 쌍의 연인이었지만 성민이 교통사고를 당해 성불구 증상을 보이며 둘의 내외적 갈등이 시작된다. 성민은 자괴감에 이별을 고하고 미지를 떠나려 하지만 고민 끝에 미지는 성민에게 찾아가 함께 건강을 회복하도록 노력하자고 말한다.


성민과 미지가 함께 병원에 내원했던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병원에 있었던 허 선생은 미지를 눈여겨본다. 힘들어하며 방황하던 미지와 우연히 마주친 날, 허 선생은 미지에게 다가가 대화를 이어간다. 괴로운 마음에 술을 마신 미지는 허 선생과 관계를 갖고 둘은 이후 사랑 없는 만남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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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선생의 아내는 둘의 만남에 분노해 성민에게 이를 알리고 성민은 분노하지만 미지를 탓하지 않는다. 허 선생이 사냥을 나간 어느 날, 참다못한 성민은 허 선생을 찾아가 미지와의 관계에 대해 비난한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허 선생의 태도에 분노한 성민은 근처에 있던 총을 들어 허 선생을 쏘고 만다.

 

팔에 총을 맞은 허 선생은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실수로 다친 것이라고 성민을 감싼다. 미지는 이에 감사를 표하고 허 선생과의 관계를 정리한 후 성민에게 돌아간다. 과거는 과거로 묻고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결심하고 결혼을 준비하는 두 사람. 그러나 미지는 결국 어느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두 남자에게 이별을 고한 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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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베드신이 당시에는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미지를 연기한 배우 문희가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관객에게는 그리 인상적이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베드신 연출보다는 60년대의 풍경, 주인공들의 옷차림을 보는 등의 재미가 더 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세련된 이미지로 당시 인기를 얻었다는 미지를 연기한 배우 문희의 모습을 기억하는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며 그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도 꽤 즐거웠다.

 

당시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은 성녀, 악녀로 구분 지어서 권선징악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특히 성과 관련된 잘못을 저지른 주인공들은 파멸하거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결말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약혼자를 배신한 주인공이 죽음 또는 삶이 파괴되는 결말이 아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마무리 또한 당시로서는 영화 속 베드신만큼이나 파격적이었을 것이다.

 

결말에 비해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성민과 이별할 때 미지는 이별의 이유를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리고 미지의 대사로 규정된 "여성의 행복"이란 다음과 같다. “나는 여자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 거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그이의 아이를 낳는 여자의 삶 말이야.” 당시에 생각한 여성의 꿈과 바람이란 결국 가정을 이루고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라는 미지의 대사는 1969년 당시 시대의 한계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 등장한 또 다른 여자, 허 선생의 아내와 미지는 마지막에 최고조로 대치를 이룬다. 성민과 이별 후, 긴 머리를 자른 단발의 미지를 마주한 그는 “너를 따라서 나도 머리를 내렸는데 너는 머리를 잘랐구나, 내 남편이 자르라고 했느냐”라며 따지기 시작한다. 결국 운전기사의 손을 빌려 미지를 폭행한 그는 자신도 미지처럼 머리를 자르겠다고 말하며 떠난다.

 

물론 유부남과 관계를 가진 미지는 허 선생의 아내에게 가해자이며 그에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미지에게 가해진 폭행이 허 선생 아내가 직접 행한 것이 아닌 허 선생의 아내라는 위치로 가지는 권력을 이용해, 사모님의 명령을 받은 기사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지난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길을 가려는 미지, 그런 미지의 외적 모습을 따라 하며 남편을 붙잡으려는 허 선생의 아내, 앞으로 이어갈 각자의 삶의 길을 두 여자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허 선생과 헤어지며 미지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여달라는 그의 부탁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 상처가 가득한 얼굴이지만 살짝 미소 지으며 꼿꼿이 앞을 바라보며 걷는 미지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착한 여자, 악한 여자라는 천편일률적으로 정해 놓은 틀, 그리고 그대로 이어지는 두 가지 결말이 부여한 길을 벗어나 걸어가는 미지의 모습에 떠올려본다. 사람이란 본디 착하다, 악하다 그 둘로 또렷이 규정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리고 이 당연한 것을 얼마나 많은 작품 속 여성 인물들이 부여받지 못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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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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