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구든 햄릿이 될 수 있다 - 햄릿,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공연]

글 입력 2019.09.30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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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내용에 대해 말하기 전에, 작품이 상연되었던 공간에 대한 후기를 먼저 들려드리고 싶다.

 

약 70석 규모라는 말만 들었을 때와 극장을 직접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크게 달랐다. 극장은 검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닿을 수 있는 검게 칠해진 박스형 공간이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더 아담한 크기였으며, 자리에 앉으면 맞은편에 앉은 관객과 곧장 눈이 마주쳤다.

 

초면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기분은 썩 괜찮았다. 몇 번만 둘러봐도 얼굴을 외울 듯한 적은 관객수와 작은 공간, 서로에게 사각지대가 없는 서로단막극장은 소통을 위해 지어진 아지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러한 공간에서 연극을 행하는 배우들에게서도 일반적인 공연에 등장하는 배우들과는 차별화된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서 있는 배우가 순식간에 다른 인물로 변신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갑자기 내 옆의 사람이 연기에 몰입한다고 생각해 보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객석과 무대가 분리되지 않은 공간, 서로가 가깝기에 소통할 수 있는 공간, 그야말로 ‘서로’라는 극장의 이름에 이보다 걸맞을 수 없는 장소에서 연극은 시작되었다.

 

 

 

누구든 햄릿이 될 수 있다 - 오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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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깼던 존재는 극중 ‘오필리아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였을 것이다.

 

오필리아? 고작해야 햄릿의 비극적인 여주인공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햄릿, 죽은 자는 말이없다>는 더 이상 오필리아를 소모적인 캐릭터로 그려내기를 거부한다. 이번 연극에서 관객들에게 가장 많은 소통을 요구했고, 가장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존재가 바로 그녀이다.

 

그녀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오필리아’로서의 정체성, 하나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 자신으로서의 정체성―덧붙이자면 이 연극은 연극 속의 연극이라는 액자 구조로 구성되어있다―이다. 하지만 두 정체성은 분명 상이한 지위일진데 서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필리아는 희곡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폴로니우스, 오빠인 레어티즈, 연인인 햄릿 등 숱한 남자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 존재이다. 아버지와 오빠는 미쳐가는 햄릿과 “교제하지 말라.”, 미친 척 연기하는 햄릿은 그녀에게 “수녀원으로 가라.”라고 명령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없는 수동적인 인간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제껏 전통적인 ‘햄릿’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미쳐서 물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두각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오필리아는 자신의 역할에 환멸을 느끼는 여자배우를 입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녀의 대사들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해명이었다. 흔히 오필리아의 죽음은 실연의 상처와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 연극에서는 그것을 전면 부정한다. 슬픔 앞에 꺾여 버린 연약한 죽음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물에 빠져든 것이었다고, 어떻게든 나를 찍어 누르려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그녀는 울부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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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Ophelia)>



아직까지도 여자 배우의 울부짖음은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아름다운 명화로 칭송받는 <오필리아>도 더 이상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물 밑으로 침전했을 수많은 오필리아들의 영혼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구든 햄릿이 될 수 있다 – 분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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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치장으로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분장사’도 이번 연극에서 직접 목소리를 내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도록 만드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연기, 노력, 연출 등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그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덧입혀지는 ‘분장’이다.

 

무대 뒤 보이지 않는 손들은 언제나 그들의 배우가 어떻게 하면 더 빛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칠하기를 반복한다. 각 인물들에 따라 개성 있게 칠해진 분장은 하나의 얼굴이 되고 관객들은 그 얼굴을 보며 환호한다.

 

극중 분장사 아저씨는 무대 뒤에 서서 관객들의 환호성 소리를 듣는다. 무대에 오른 배우는 온몸으로 박수 갈채를 받지만 분장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숨죽여야 한다. 그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연이 끝난 뒤에 자신이 빚어낸 얼굴들이 가차 없이 지워지는 순간뿐이다.

 

분장사는 이에 대해 분노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겪게 되는 것들을 독백을 통해 담담하게 전할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누군가는 동정할 것이고, 누군가는 공감할 것이다. 여기엔 정답이 없다.

 



연극의 종결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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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대사들이 많다. 특히 후반부에 길게 이어지는 분장사의 독백에서 다수 등장하는 ‘죽음’은 이 작품의 주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죽음’을 연극의 끝에 빗대어 말한다. 인간이 죽으면 침묵만이 남듯이 연극도 막을 내리면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고 장례라는 절차를 통해 공식적으로 애도하는 시간을 갖지만, 연극의 죽음은 전혀 슬픈 감정을 수반하지 않는다. 뒤풀이를 열고 서로의 수고를 치하하는 단란한 시간을 가질 뿐이다.

 

분장사는 묻는다. 왜 우리도 연극의 뒤풀이처럼 죽음을 기념해서는 안 되는가. 죽음이 슬프기만하고 부정적인 가치인가, 그는 계속해서 되묻는다.

 

이윽고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연극을 끝마친 두 배우와 분장사가 한 자리에 모여 신나는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몸을 흔든다. 화려한 조명, 혼을 쏙 빼놓는 음악, 역동적인 움직임에 관객들은 넋을 놓고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놓쳐선 안 될 부분은, 그들은 요란해보이지만 사실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연극을 삶 전체에 비유한다면, 연극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 온 배우들은 ‘망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임을 끝마치고 죽음 후에 그것을 기념한다. 우리도 만약 삶에서 이루어야할 바를 다 하고 난다면, 그리고 죽음 후에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들처럼 춤을 추며 자축하지 않을까.

 

그들이 원통해하든 기뻐하든, 산 자들의 몫은 변하지 않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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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살아있었지만 그 안에 많은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완벽하게 끝마치고, 바통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연극을 보고 온 우리들은 여전히 산 자들이다. 극장을 찾은 우리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저마다의 입으로 그것을 떠들어대는 것이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그들의 목소리를 전하였길 바란다.





[박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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