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945년,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공연예술]

국립오페라단의 <1945>
글 입력 2019.10.0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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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그날이 찾아왔다. 바로 독립이다. 35년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은 많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고, 집과 땅을 잃고 고통받았던가. 그렇다면 앞으로 이 나라에 남은 것은 일제 강점이라는 어둠을 거둬내고 되찾은, 말 그대로 찬란한 광명일까?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9월 27일과 28일 양일 초연한 오페라 <1945>는 해방 직후 만주, 정확히는 장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춘은 1901년 러시아가 동청철도를 부설하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교통의 요충지가 된 곳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만주에서 거주하던 조선인들에게 장춘은 독립이 되어 조선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장소였다. 오페라 <1945>의 이야기는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기차를 기다리는 조선인이 모인 장춘의 전재민 구제소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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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의 인물들

장춘 전재민 구제소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든다. 그중 극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는 바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분이와 미즈코다. 분이는 해방이 되었으니 조선인은 조선인대로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하지만, 임신한 미즈코를 외면할 수 없어 결국 함께 길을 떠난다. 분이와 미즈코는 전재민 구제소에서 위안소를 관리하던 인물인 박섭섭을 만난다. 전재민 구제소에서 만난 분이와 섭섭은 서로의 과거를 목줄처럼 쥔 채 조선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만을 기다린다.

전재민 구제소에는 한글 강습회를 열려고 했지만 좌절한 구원창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살아남은 부끄러움과 치욕을 노래하지만 그의 아내 순남은 두 아이를 먹여살릴 현실적인 걱정을 털어놓는다. 먹고 살기 위해 떡장사를 하자는 순남의 앞에서 원창은 현실감과 경제력이 부족한 인물로 비친다. 두 사람의 아이 숙이와 곤이는 일본어와 한글을 유창하게 구사하며 해방이 뭔지, 독립이 뭔지에 대해 묻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두 아이에게 조선이라는 조국은 낯설기만 하다.

또 다른 인물은 인호이다. 그는 빨치산 형 때문에 가족을 잃고 동생 인아를 데리고 만주로 왔지만 인아는 폐병으로 사망한다. 인호는 구제소에서 만난 분이에게 호감을 갖고, 증명서가 없는 순이(미즈코)를 위해 죽은 인아의 증명서를 대신 쓸 수 있게 해주지만 순이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특히 인호가 빨치산이었던 형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음을 암시하는 노래는 몇 년 뒤 발발할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것 같기도 하다.



2. 정체성

이렇듯 <1945>에 등장하는 인물은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인 그들은 일본인에게는 식민지 조선인이었고, 중국인에게는 일본의 2등 국민이었다. 숙이와 곤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아이에게 조선이라는 조국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였다.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러시아인 등이 뒤섞인 만주라는 공간과 해방 직후라는 시간적 배경은 더욱더 인물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렇다면 역으로 과연 정체성이 뚜렷해야 좋은 것일까? <1945>에서는 이 질문에 직접 답을 주는 대신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두 정체성이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중 하나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 여성은 군중 앞에 끌려 나와 손가락질과 매질을 받는 장면이다. 여성은 자비를 외치며 사랑한 남편을 보호하려 하지만 군중들은 온갖 말로 여성을 비난한다.

또 다른 장면은 바로 미즈코에게서 나온다. 분이와 함께 기차를 타기 위해 전재민 구제소로 온 미즈코는 말을 하지 못하는 분이의 여동생 순이로 속인다. 그러나 미즈코가 일본어를 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기차에 타기 직전 결국 미즈코의 정체가 드러난다. 구제소 사람들은 분이에게 미즈코를 버리고 같이 기차에 타자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분이와 미즈코가 과거 위안부였던 사실이 드러나고 분이에게 마음을 갖고 있던 인호는 미즈코를 버리면 자신이 그 상처를 '씻어주고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분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건져내어 / 데려가신다? / 더러운 우리들을 / 씻어주신다? / 아니야, 우리들은 / 더럽지 않아 / 더러운 건 우릴 보는 / 당신의 그 눈 / 아무것도 모르는 / 가엾은 그 눈"


- 오페라 <1945> 4막 중



결국 분이가 함께 하길 선택하는 사람은 같은 조선인이 아닌, 같은 지옥을 경험했던 미즈코이다. 오페라 <1945>는 이처럼 해방 직후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묻는다.



3. 우리가 그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오페라 <1945>는 그 이외에도 여러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한다. <1945>에는 그 어떤 절대악도 절대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일본 순사도 <1945>에는 없다. 대신  "하여간에 조선 것들 안 된다니까!"를 외치는 전재민 구제소의 관리 최주임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주임 역시 조선인이기에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은 결국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극에서 최주임이라는 인물은 희화되는 와중에도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위안소를 관리했던 박섭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극이 진행되면서 박섭섭 또한 위안부 피해자였으며, 현재에는 아편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박섭섭은 전재민 구제소에서 장막난이라는 인물과 눈이 맞아 함께 하게 되는데, 망나니처럼 살았던 막난은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기차 탑승이 거절되고 섭섭은 그와 함께 남게 된다.

위안부 피해자였던 분이 역시 극 초반에 죽어가는 일본 여인에게서 받은 아이를 중국인에게 팔아 떡을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를 팔아 떡을 사 먹는 비극, 같은 조선인을 핍박하는 조선인 관리가 존재하던 비극, 일본인 남편을 둔 조선인 여성을 군중이 손가락질하는 비극 앞에서 특정 정체성이나 심지어 도덕성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은 흔들린다. 이처럼 <1945>는 누가 옳고 그른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때때로 가해자가 되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에서 삶은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한 아귀다툼이다.



4. <1945>의 음악

올해 제작, 초연된 오페라 <1945>에서는 1930~40년대 한국의 동요, 민요, 트로트, 창가나 군가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1막 마지막에서 <울리는 만주선>을 부르는 장면은 오페라 극장에서는 흔히 접할 수 없던 인상적이고 친근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돋보였던 것은 특정 선율의 차용이 아닌, 한국어로 된 가사의 효과였다.

이탈리아어, 독일어로 된 오페라는 해당 언어의 억양을 살린 음악이라 해도 모국어이거나 그 언어가 능숙하지 않은 이상 크게 와닿지 않는다. 또한 극장에서 오페라를 감상할 때 자막을 따라가느라 힘든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어로 된 오페라 <1945>에서는 그런 어려움이 현저히 줄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어의 억양을 살린 레치타티보나 우리말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리아는 극의 흐름과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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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1945> 커튼콜


*

오페라 <1945>는 1945년 가을, 장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2019년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1945>에서 등장하는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큰 화두이며, 민족이나 국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만주의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오페라를 보고 그동안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너무 닫힌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국가와 국가 간 정체성이 충돌하는 장면은 요즈음 더욱 커지는 반일 감정과도 더불어 생각할 수 있다.

지난 7월 한국 초연한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에 이어 이번 <1945>까지. 쉬운 길을 가지 않는 국립오페라단의 행보가 앞으로도 기대된다. 한국 오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 <1945>의 재공연을 넘어 더욱더 많은 소재를 다룬 한국 오페라가 극장에서 공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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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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