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별이 더 멀어지기 전에 - 연극 '킬롤로지' [공연]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
글 입력 2019.09.2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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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킬롤로지 티저 포스터.jpg
 

풍요 속의 빈곤. 현대사회를 정의하는 수많은 구절 중 상당히 와 닿는 말이다. 끝없이 소비하고, 끝없이 공급하고, 또 끝없이 소비하는 와중에 정작 채워야 할 구멍은 텅 비게 놔두는 현대인들. 우리는 오늘도 풍요로운 빈곤을 걷고 있다.

열등감이나 폭력성의 근원을 한 군데서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인간의 감정과 본능, 욕구가 일차원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원한을 품어서, 누군가는 타인에 의해 상처를 입어서, 또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자극과 쾌락에 심취해 타인을 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많은 근원 중 하나로 풍요 속의 빈곤, 이로 인한 끝없는 결핍과 갈망을 짚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미성년자들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잔인한 콘텐츠를 제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주 예전부터 나오고 있었고, 그에 따라 ‘방송심의규정’과 같은 규제가 생겼다. 성인의 보호나 지도 없이는 적나라한 살인 장면이나 선정적인 연출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보호 장치인 셈이다. 그러나 요새 다시금 청소년 유해 매체 관련 이야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이유는, 제도와 사회적 합의보다 기술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탈바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을 점이 ‘게임이 애들을 망친다’ 따위의 훈계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어째서 사회는 날이 갈수록 더 큰 자극을 갈망하는가’ 정도의 깊은 고뇌여야 한다. 유해 매체물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치니 매체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지겹다. 이제는 더 깊은 이야기를 해야 할 때다.


[5] 알란(윤석원)_폴(이율)_킬롤로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데이비를 죽이던 모습을 녹화해 놓은 비디오 영상을 폴에게 보게 하는 알란.jpg
 

그러니 연극 ‘킬롤로지’가 던지는 물음과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킬롤로지’, 살인학. 어떻게 하면 더욱 잔인하고 신선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에 관한 게임의 이름이다. 이 게임을 개발한 개발자 폴은 어마어마한 돈과 명예를 얻었지만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 게임에 의해 아들을 잃은 아버지 알란도 등장한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버지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집을 나가 깊은 유대를 쌓지 못한 상태였다. 아홉 살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선물해 준 뒤 아들을 다시 만난 장소가 그의 장례식장이었던 셈이다. 알란의 아들 데이비는 가정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이들 셋의 이야기가 바로 연극 ‘킬롤로지’다.

언뜻 보면 ‘킬롤로지’는 유해한 게임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지에 대한 극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극에는 더욱 깊은 메시지가 숨어 있다. 바로 결핍이다. 극은 세 인물의 결핍과 갈망에 대해 조명한다. 극의 99%는 세 인물의 독백으로 진행되는데, 각각의 시점과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고, 무엇을 원했는지. 극의 결말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한 곳으로 뭉치는 순간, 그 때 비로소 ‘킬롤로지’가 이야기하는 진짜 주제가 드러난다.


[1]-데이비(은해성)_9살-생일,-아빠는-강아지-한-마리를-선물로-주고-떠났다.jpg
 

아버지가 가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폴을 평생 옥죄었다. 게임을 만드는 일을 못마땅해 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고스란히 게임 속 살해 대상에 입혀졌다. 폴은 아버지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캐릭터를 때리고, 찌르고, 짓밟으면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폴에게도 좋은 기억은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나란히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 자신을 덮칠 만큼 빼곡하게 수놓아진 별무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던 유년기. 자신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다정한 아버지. 이 따뜻한 기억은 폴의 기억 속에 평생 자리해 있었고, 폴은 마지막까지 별을 향해 손을 뻗었다.


[2] 폴(이율)_24살 생일, 자신을 무시하는 아빠를 게임속에서 끔찍하게 죽이고 살려내서 또 죽이면서 킬롤로지의 영감을 얻었다. 유레카!.jpg
 

알란도 마찬가지다. 알란이 데이비를 떠난 이유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알란은 데이비를 끔찍하게 아꼈다. 마지막 순간에는 말이다. 알란의 기억 속에 남은 데이비는 갓난아기다. 데이비가 아주 어렸을 때, 아직은 가정이 너무나 고요하고 평화롭던 시절. 이 기억의 편린으로 알란은 매 순간을 버텼다. 조각난 기억이 날카로운 단면으로 자신을 찌르는 줄도 모르는 채, 알란은 과거를 회고하며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의미 없는 가정으로 매일을 살아낸다.

데이비는 다를까. 데이비 역시 엄마의 무관심과 아빠의 부재 속에서 애정이 결핍된 아이였다. 따뜻한 가정, 사랑 받는 아들, 웃음 많은 엄마와 다정한 아빠. 데이비와 알란, 폴이 갈망한 것은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별을 원했고 별에게 손을 뻗었다. 영원히 가 닿지 못할 빛줄기를 바라보며 따뜻한 애정과 시선을 원했다. 이들에게 별은 사랑, 나아가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다가왔을 터다.

그러니 ‘킬롤로지’에서 중요한 것은 게임 킬롤로지가 아니다. 게임은 그저 촉발제였을 뿐, 폭발에 필요한 모든 조건은 갖추어진 상태였다. 사랑과 애정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스라이 멀고, 점점 빈곤해지는 가정과 인간관계 탓에 자꾸만 갈망만 비대해진다. 이런 부족함을 잊을 만큼 강렬한 자극이 되어주는 게 바로 게임 킬롤로지다. 결국 연극 ‘킬롤로지’에서 짚는 문제점은 유대의 소멸, 느슨해진 너와 나 사이의 관계다.


[8] 알란(윤석원)과 데이비(은해성)_알란의 꿈속에서데이비는 아픈 알란에게 잔소리도 하고, 보살피기도 하는 아들이다..jpg
 

110분 연극에 인터미션을 넣다보니 2막이 35분밖에 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해버렸지만, 현실과 환상을 가름하려는 의도는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었다는 초연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한 호흡으로 전개되었다면 극 전개가 조금 더 매끄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알란과 폴, 데이비는 결국 별에게 가 닿지 못했다. 이들의 이야기가 비추는 우리 사회 역시 별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별의 자취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기 전에 빈곤한 애정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대의 회복인 것이다.





킬롤로지
- Killology -


일자 : 2019.08.31 ~ 2019.11.17

시간
평일 8시
주말 및 공휴일 3시, 6시 30분
월 공연 없음

*
8/31(토), 9/1(일) 6시 30분 공연만 있음
9/12(목) 3시, 6시 30분
9/13(금) 4시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티켓가격
R석 55,000원
S석 40,000원

제작
(주)연극열전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25분 (인터미션 : 15분)


전문필진.jpg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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