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합리에 대한 불만이 훗날 미술사의 한 획이 되다 [시각예술]

살롱전의 고리타분한 태도가 불러일으킨 인상주의의 불씨
글 입력 2019.09.20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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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살롱전에서 입상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4, 캔버스에 유채, 425 x 330cm)



전시의 시작에 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1725년 최초로 시작된 살롱전이다. 살롱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공모 전시로, 많은 프랑스 화가들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살롱전은 프랑스 국가 차원에서 진행되었기에 그들이 인정한 미술이라 함은 당연히 국가의 권위를 대변할 수 있는 미술을 뜻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상적인 고전미가 돋보이는 역사화들이 시상대를 장식했다.


그래서 살롱전은 아카데미의 조형이론에 반하는 작품은 배척했고 이로 인해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가들은 반발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63년 등장한 것이 <낙선전>이었다. 낙선전은 말 그대로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였다. 그리고 이때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그림은 단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였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이후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 그림은 인상주의의 특징인 야외의 빛과 그림자보다도 그 주제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풀밭 위에서 외출복을 차려입은 신사들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알몸으로 한가운데 앉아 관람자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여자. 이러한 묘한 장면은 아카데미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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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 유성페인트, 43 x 63cm



이때 시작된 인상주의의 불씨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자 전시로 이어졌다. 그들 또한 아카데미의 양식에서 벗어난 실험적인 장르를 선보였다. 그들은 대상을 이상적으로 모방하기보다는 지금 나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빛을 포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전시에 참여했던 이들이 바로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들이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사랑하는 모네의 <해돋이>는 당시 전시에서는 판매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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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그리고 흥미롭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해방 이후 저조했던 문화예술활동을 촉진시키고자 개최되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한국의 살롱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우리나라 예술가들로서는 공식적으로 심사를 받고 등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젊은 화가들이 많이 시도했던 추상회화보다는 구상회화를 중심으로 시상이 이루어지거나 서울미대와 홍대의 파벌싸움판이 되기도 했던 탓에 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제외하고도 부족한 점이 많았는지 낙선전이나 국전 보이콧, 반대 세력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권영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추상 아카데미즘,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5, p. 151)


다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마이너 양식인 비구상, 추상을 배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화가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비구상과 구상을 분류해 심사하였다. 프랑스의 살롱전도 한때 쿠르베의 민중의 일상을 담은 그림 <오르낭의 저녁식사 후>에 2등상을 수여한 적이 있으나 이는 직전의 7월 혁명, 2월 혁명 등으로 사회상이 일시적으로 진보적으로 바뀌었던 것일 뿐, 다시 보수적 성격으로 돌아왔다.


이를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미술박람회가 분류 기준을 바꾼 것은 모든 장르의 작품들을 공정히 심사하려는 시도를 위해서는 더 적합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프랑스의 살롱전과 우리나라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이에는 약 100년의 간극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추상미술을 시도했을 당시 비대상회화는 이미 서구 유럽사회에서 여러 번 시도된 상태였다고 해도 말이다.


이렇듯 살롱전의 태도는 자신들과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자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평가할 때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야 되는 걸까? 살롱전의 보수적인 태도는 당시 화가들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롱전이 처음부터 화가들의 모든 시도들을 받아들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인상주의로 인해 등장한 후기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등이 과연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했을까?


*


항상 역사는 그렇다. 하나의 작은 선택이 수많은 것들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힘겨울 때 때 항상 ‘큰 그림’을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하나의 불만거리일 뿐이지만 그것이 먼 훗날 이룰 나의 성과(?)의 시작점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정말로 내가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지금을 발판 삼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건 덤이다.



[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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