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버스를 타고 중국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여기가 국경이야?" [사람]

<북중러 접경지역 탐방단>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생각을 해나가게 될까.
글 입력 2019.09.1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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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달 남짓 넘어가고 있는 그때. 감사하게도 나는 학교에서 지원하는 <대학생 북중러 접경지역 탐방단>의 일원으로 탐방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통일을 맞이할 우리 세대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인식 제고라는 목표를 가지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북한-중국-러시아의 국경이 접한 지역을 다니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고,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해나가게 될까. 7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내 생각의 고리들을 따라가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적응이라는 폭력에 대하여



6박 7일 일정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다 같이 영화 한 편을 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덮어두고 싶었던 우리의 현실을 봤다. 생계를 위해 중국으로 월경한 북한 여성, 마담 B. 그녀의 눈을 빌려 분단의 현실을 봤다. 마음에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묵직했다. 영화가 끝난 후에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에 마음에는 돌이 점점 쌓여갔다. "적응이라는 폭력에 대하여." 적응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다.


남한에서 탈북민, 고려인, 조선인을 규정하는 방식과 고정관념. 그리고 그들에게 강요되었던 적응으로 인해 그들은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적응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덜어내고, 깎아내고, 늘이고, 채우기를 반복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성장’이라는 하나의 기능으로 적응을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적응이 가진 ‘퇴보’의 기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얼마나 많은 폭력들을 행해왔을까.

  


 

백두산인가, 장백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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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눈이 일찍 뜨였다. 아침 6시 30분에 출발이니까, 5시 30분에는 일어나야겠다. 다짐하면서 맞췄던 알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백두산을 본다는 생각에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백두산이라고 부르지만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백두산, 장백산이라고 검색하니, 한국 사람임에도 장백산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괜히 속상하다.


천지를 보기 위해 조그마한 봉고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올라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숨이 트인다. 봉고차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니 어? 천지가 바로 보인다. 내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림 같다. 백두산 천지는 정말 보기 힘들다는데. 감사하고 감사하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지만 대부분을 중국 쪽에서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언제쯤 북한 땅을 밟고 백두산을 올라가 볼 수 있을까? 천지 앞에서 사진을 찍는 많은 중국 관광객들을 보니 괜한 서러움도 생긴다.

  


 

일송정 푸른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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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곳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던 곳이었으며, 소나무는 독립 의식의 상징이었다. 일제 시대에 이 소나무는 불태워졌으나 1991년, 소나무를 다시 복원하고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일송정이다. 그곳에 올라서니 과거의 만주 땅이 훤히 보인다. 이곳을 오르내리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산 아래로 내려가는 관람 열차를 탔다. 편안한 관람 열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모순적이다.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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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맞닿은 곳에는 무장한 사람들, 철조망, 고요하지만 어딘가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 것이라 예상했다. 그곳을 처음 바라봤을 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여기가 국경이야?’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깊어 보이지도 않아서 내 두 다리로 조금만 헤엄치면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바로 옆에는 중국과 북한을 잇는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으로 트럭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녔다.


정말 가까웠기 때문에 북한의 집의 생김새, 그곳 간판에 적힌 글씨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나에게 국경은 뾰족한 가시와 경고 문구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데 걸어서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존재한다니. 국경 사이의 강에는 중국인을 위한 유람선 같은 것도 떠 있다. 관광 온 중국 사람들을 보니 이곳이 국경이라는 사실도 잊을 지경이다.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하니 방천 풍경구다. 북한, 중국, 러시아 삼국 접경 지역이다. 동남쪽으로는 러시아, 서남쪽으로는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좀 더 멀리 떨어져 보였지만, 그래도 육안으로 러시아 땅, 북한 땅이 보인다. 그곳은 더 충격이다. 저기가 북한이고, 저기가 러시아야. 내 눈에 보이는 건 푸른 나무, 풀, 새들 그리고 강물뿐인데. 국경에 저렇게 아무런 표시도 없다고?


파주에 있는 부모님 댁에 가면 가끔 포탄 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철조망 같은 것도 보이고 무장한 군인도 보인다. 이상하게 긴장이 된다. 그런데 이곳은 너무 다르다. 아무런 철조망도, 무기도 없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남과 북을 갈라 놓는, 이 보이지 않는 질병 같은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버려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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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중국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이동하는 내내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해 생각해보려 애쓴다. 목적지도 모른 채 기차에 갇힌 이들의 심정을 나는 가늠할 수도 없을 것이다. 1937년 8월 21일, 일본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려인 171,781명이 중앙 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된다. 한인들은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졌다.


우리는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 센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고려인 역사관이 있었다. 고려인 강제 이주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땅이었던 연해주의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고려인과 이주민의 역사에 대해 왜 학교 교육은 아무런 말이 없었을까?’역사를 전공하던 팀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나는 왜 이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반일의사릉,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 최재형 선생의 최후 거주지. 설명이 없었다면 그곳이 역사의 맥락에 존재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던 곳들도 많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러시아의 일반 가정집이다. 과거 임시 정부 장소였던 곳에 내렸을 때, 울타리 사이로 그 안을 잠시 들여다볼 뿐이었다. 다행히 집주인 아주머니의 허락으로 집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집은 굉장히 작아 여러 명이 한 번에 들어가기 힘들었으며 천장도 매우 낮았다. 찬찬히 이곳저곳을 내 눈에 담았다. 내부는 가정집이었지만, 그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로 내가 역사의 맥락 속 하나의 점이 된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중국과 러시아, 나 혼자 여행했다면 알지도 못했을 곳곳에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역사와 흔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부끄러웠다. 불편함을 견디기 싫어서 내가 보는 큼만 바라보고, 적응하면서 잊힌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을 행해왔을까. 저녁에는 항상 이러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통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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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에서 설명을 들으며 많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했다면, 세미나에서는 내가 가진 이야기들을 발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친구들의 새로운 시각에 감탄할 수 있었고, 때로는 내 편협한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이크를 잡으면 피곤하던 몸에 아드레날린이 돌았다. 낮에 보고 느꼈던 것들을 이리저리 주무르고, 입속에서 굴려 보면서 통일에 대한 ‘나’의 의견에 집중해볼 수 있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시간에서 나는 통일을 반대하는 쪽에 손을 들었다. 각종 시험에서 북한 주민과 남한 주민이 같은 시험을 치를 것인지. 동일한 평가 기준에서 평가될 것인지. 모든 형평성을 판단하는 문제에서 의견 차이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통일을 한다고 해도 또 다른 분단이 생기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내 의견에 교수님께서 해주신 코멘트에 머리가 딩- 하고 깨지는 것 같았다.‘통일 후에 그러한 분단이 생기면 왜 안 되나요?’ 어? 정말 왜 안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런 문제들 또한 통일 후에 우리가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서워 지레 통일을 회피한다면 앞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주변 친구들에게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그 의견이 다양하다.‘통일을 찬성하지만 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니었으면.’‘통일을 이야기하며 한 민족을 말하는 것이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는다’‘질병같이 남아 있는 우리의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서 통일은 필요하다’ 모두가 저마다의 의견이 있다. 과거의 나는 수동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찬성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자신만의 생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했다.


  


한 장의 경험으로



비행기에 앉아있는 내내 생각한다.‘통일은 필요한 것일까?’‘통일은 왜 필요할 까?’‘앞으로 나는 어떤 방향성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런 경험은 종이 한 장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 동안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해서 내 사고의 체계가 바뀔까?


언제나 생각하지만, 경험은 나를 딱 종이 한 장만큼 변화시킨다. 하지만 종이가 쌓이다 보면 언젠가 책 한 권이 될 것이라 믿는다. 게다가 종이 한 장으로 그 책의 내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계속해서 종이를 쌓는 사람이, 책의 방향을 올바르게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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