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나 그릴 수 없는' 그림, 최초의 완전추상은? [시각예술]

완전한 추상 회화를 완성시키기까지
글 입력 2019.09.1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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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말을 타고 있는 연인>

1906, 캔버스에 유화, 55 x 50.5cm



오랜 미술의 역사 동안, 그림 그리는 행위의 지향점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가들이 화면에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처럼 대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에 집중했을 때에 회화의 위기가 닥쳤는데 바로 카메라의 등장이다. 그때부터 화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카메라를 이길 수 없는 회화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붓을 잡은 시기 역시 이미 인상주의 화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래서 그의 초기작은 신인상주의의 쇠라와 브라크가 개발한 점묘법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네덜란드 해변의 휴게용 등의자>에서는 물감의 양감이 느껴지는 큰 점들로 해변의 의자들이 묘사되어 있고 <말을 타고 있는 연인>에서도 색점이 등장한다.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이 말하는 ‘대상을 재현하지 않겠다’에서의 재현이란 그 방법에 한정된다. 즉 그 대상까지 미치지는 못한 것이다. 그들이 캔버스에 옮겼던 ‘인상’도 어떤 대상을 보아야만 남는 것이었고, 대상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 역시 ‘선이나 색채를 써서 사물의 형상이나 이미지를 평면 위에 나타낸 것’으로, 어떤 사물의 외형을 옮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칸딘스키 역시 상당 기간 동안 특정 주제나 사물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렸고 그 주제를 제목에서 드러내곤 했다. 즉 재현의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사물을 변형하거나 왜곡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오늘날 우리가 공부했던 미술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이 때문은 아니다. 그가 바로 미술사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했다는 점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화실에 거꾸로 놓인 자신의 그림을 보고 새로운 감동을 느껴 비구상적인 추상 회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완전한 추상을 향한 길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칸딘스키는 본래 법률을 공부했지만 학자의 길을 버리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 30세의 나이로 뮌헨으로 이주했다. 이때 그에게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 바로 모네의 <노적가리>와 바그너의 관현악 <로엔그린>이다. 그는 이 두 작품을 통해 회화에 재현적 요소가 없어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다는 것과 음악을 색채로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드로잉 수업을 받았으나 색채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때 점묘법을 배워 자신의 그림에 적용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1901년, 그는 뮌헨 문화예술계의 진보 세력이었던 팔랑크스를 조직해 도시 풍경을 추상화했다. 하지만 1909년에 들어서 그의 회화는 자연적인 재현 요소가 남아있는 '인상', 정서의 반응을 담는 '즉흥', 음악을 암시하는 '구성'의 세 범주로 나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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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무제: 최초의 추상>
1910(1913), 종이에 연필·수채·잉크, 49.6 X 64.8cm



마침내 1911년,  그는 자신이 완전 추상으로 접어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던 청기사파를 결성한다.  그는 청기사파 활동을 통해 재현물을 점점 거부하게 되고 순수한 색과 형태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청기사파에서 활동하면서 그린 <무제: 최초의 추상>은 어떤 사물을 재현한 것도 아니며, 어떤 사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아무런 형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전의 그의 다른 작품들 중에서도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작품은 많았지만 제목에서 대상이 드러나거나 형상을 유추할 수 있었던 반면 이 작품은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가지 독특한 것은 이 작품의 제작 연도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작업 흐름을 보았을 때 1910년에 그가 완전추상을 완성했다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본다. 그래서 실제 제작연도는 1913년이지만 ‘최초로 완전 추상에 도달한 화가’라는 타이틀을 위해 3년 앞당긴 1910년으로 표기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당시 화가들의 추상을 향한 열정과 그에 수반된 경쟁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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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들로네의 <원반: 완전한 원반>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Counter Relief>



그리고 이러한 뒷이야기는 칸딘스키가 <무제: 최초의 추상>을 완성했을 시기, 다른 화가들 역시도 완전추상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를테면 1912년 제작된 오르피스트 들로네의 <원반: 완전한 원반>이나 1914년에 제작된 구축주의자 타틀린의 <Counter Relief> 등 말이다. 이외에도 완전한 추상에 도달한 화가들은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칸딘스키의 완전추상이 가장 역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작품의 제작연도가 앞당겨져 표기되었다는 추측이 유력한데도 말이다.
 

나는 <무제: 최초의 추상> 속 형상들에 주목했다. 나에게 칸딘스키의 작품이 가장 추상적이라고 느껴지는 이유는 형상들의 즉흥성에 있다. 그림 속의 자유분방한 터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습작을 그리거나 연구하는 등 고뇌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면 속 형상들은 어떤 사물도 연상시키지 않으며 규칙성도 보이지 않는다. 즉 그의 그림은 고도로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겉보기에는 즉흥적으로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가 이후에 그린 다른 그림들을 살펴보아도 비슷한 형태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형식적인 요소도 없이 오직 선과 색채만을 가지고 그림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칸딘스키의 완전추상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가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거쳤던 고뇌의 과정은 완전추상에 도달하기까지의 길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20세기 들어서 등장한 혁신적인 미술들은 종종 "저건 나도 그리겠다."라는 말을 듣는다. 반듯한 네모에 검은 테두리를 그리고 그 안을 색칠한 몬드리안과 되스부르크, 어린아이처럼 실제 형상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그린 것 같은 피카소, 심지어는 흰 사각형 하나만 달랑 그려 놓은 말레비치, 그리고 칸딘스키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은 정말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것들일까? 정말 그렇다면 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그림을 알고 있을까. 그들의 시도가 미술을 옭아매던 틀을 부수고 거대한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들의 그림들은 조금 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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