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체르노빌, 피폭된 진실을 탐하다 [TV/드라마]

What is the cost of lies?
글 입력 2019.09.1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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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미래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이다. 가상의 시나리오 속에서 희생자는 흐릿해지고 결국 주인공은 살아남는다. 재난 영화가 인재(人災)를 다루는 경우 또한 극히 드물다. 환경 보호에 힘껏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조차도 형벌을 내리는 주체는 언제나 경이롭고도 강력한 자연이다. 그러나 드라마 <체르노빌>은 이름과 형체를 가진 희생자가 있는 과거의 이야기이며, 그 원흉 또한 이름과 형체를 가진 인간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사고가 인간이 한 번도 마주해 본 적 없는 재앙이었듯, 드라마 <체르노빌> 또한 관객들이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종류의 재난 영화인 것이다.


<체르노빌>은 첫 장면부터 핵 물리학자인 발레리 레가소프의 목소리를 빌려 이 이야기가 영웅에 관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원전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었고, 그중 일부는 인류를 보호하겠다는 사명 아래 고통스럽게 죽어갔지만, <체르노빌>은 그들의 영웅적인 공적을 치하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데 집중하지 않는다. <체르노빌>은 막을 수 있었고, 막아야만 했던 사고의 원흉을 찾는 이야기다. <체르노빌>은, 너무 많은 거짓에 함몰되어 사람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진실을 향한 이야기다. 그래서 <체르노빌>은 다른 재난 영화와 달리 감동적이거나 두렵지 않다. 그저 무섭도록 불쾌하고 끔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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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를 극복해야만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리 퀴리



노벨상 최초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 수상한 마리 퀴리는 자신이 발견한 원소인 라듐을 매일 밤 머리맡에 두고 잤다고 한다. 사람들은 미지의 원소였던 라듐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마리 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골수염과 백혈병을 방사능 피폭과 연관 짓길 주저했지만, 라듐을 시계에 칠하던 노동자들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방사성 원소의 위험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나가사키 투하된 원자폭탄과 1976년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에 대한 소련 대중의 인식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우라늄 노심이 드러날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지만, 초기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 대원과 화재를 지켜보던 시민들 중 누구도 사고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민의 생명보다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관리자들은 시민 누구에게도 사고의 위험성을 알리지 않았다. 그것은 체르노빌의 첫 번째 거짓이었다.


거짓은 언제나 진실에게 빚을 진다. 그러나 진실이 완전히 호도되어 존재 자체가 지워질 때조차, 진실은 거짓에 대항하거나 변상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거짓이 묵묵히 대가를 치르기를 기다릴 뿐이다. 원자력 발전소 소장과 팀장, 연구소장은 상부에 체르노빌의 피해가 크지 않다고 보고한다. 시 의원들은 동요하지만, 지독한 관료주의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은 아무도 없었다. 소련 정부는 사고로 인한 인민들의 동요를 원하지 않았고, 시 원로의 그릇된 결정으로 인해 시민들은 체르노빌을 떠나기는커녕 체르노빌에 갇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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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bridge. 이 날 철교에서 화재를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철교에서 화재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향해 엄청난 양의 방사능 낙진이 눈처럼 날리는 장면은 체르노빌의 첫 번째 거짓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극적 장치다. 어린아이들은 소복하게 쌓인 낙진을 밟으며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때 이른 눈발을 경계하면서도 즐거워한다. 그러나 초기 대응에 나섰던 소방 대원과 발전소 직원들을 포함하여 철교에서 화재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사고 발생 하루가 지나자 거짓의 대가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잔혹한 손길을 뻗쳤다. 병원에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환자들이 넘쳐나고 통제된 병원 안에서 갓난아이만은 외부로 데려가 달라는 부모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로 인해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련 정부의 은폐와 무지(無知)에 살해당했다. 진실은 그렇게 첫 번째 거짓의 대가로 수 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체르노빌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아이들의 외출을 자제시킨다는 소식이 들리자 소련 정부는 사고 발생 36시간 만에 체르노빌에 소개령을 내린다. 그때마저도 소련 정부는 몇 달 후면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메시지로 시민들을 안심시켰고, 정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던 시 원로는 가장 먼저 대피용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대피령의 지연은 고지식한 원로 한 명의 잘못된 결정의 결과라기보다는 고압적인 공산주의 체계가 발전소 관리자들의 거짓과 맞물리면서 발생한 재해에 가깝다. 거짓의 눈덩이는 점점 커져 더는 빚을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사람의 목숨을 진실에게 바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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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냉각수가 가득 찬 지하실에 들어가길 자원한 세 명의 영웅들



<체르노빌> 2화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기차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3명의 사람이 철로에서 일을 하고 있고, 기차에는 17명의 사람이 타고 있다. 사람이 일하는 선로로 방향을 전환하면 17명이 살지만, 3명의 사람이 죽고 선로를 변경하지 않으면 3명의 사람이 살지만, 기차에 타고 있던 17명이 죽는다. 만약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현대 민주주의에서 기차 이야기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수 십 명의 목숨을 위해 3명이 희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오염된 지하실에 사람을 보내는 것을 승인하고 3명의 사람이 자진하여 오염된 냉각수로 가득 찬 지하실에 들어간다. 지하실에서의 연출은 정말 압권인데, 하늘을 찌를 듯 왱왱거리는 방사능 감지계의 알람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설상가상으로 손전등까지 고장 나면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2화는 막을 내린다.


발레리 레가소프가 노심 용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또 다른 핵물리학자 호뮤크는 재발 방지를 위해 진상조사에 나선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간 병실에는 온몸에 수포가 생기고 피부가 벗겨져 겨우 인간의 형체만 남은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면에 담긴 피폭자의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이 장면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녹아내려 눈알이 비정상적으로 드러난 모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한데, 고어 영화의 팬은 아니지만 수년간 수사물을 봐온 연륜으로 웬만한 시체에는 무덤덤한 편인데도 <체르노빌>을 보고 난 후에는 한동안 잠들기 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를 계속해서 외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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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역 배우(우)와 실제 류드밀라(좌)의 모습



그러나 드라마가 오직 정화 작업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류드밀라는 초기 진압을 맡았던 소방대원의 아내로 남편의 임종까지 함께할 정도로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열렬한 인물이다. 레가소프와 류드밀라의 이야기와 교차하면서 <체르노빌>은 일반 시민의 시선에서 원자력 폭발 사고를 조망한다. 그녀가 등장함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희생된 다수의 사람들이 아닌, 이름을 가진 한 명의 희생자가 된다. 시인 김춘추는 이름을 불러줄 때야 비로소 꽃이 된다 했던가. 입체적인 이야기 구도를 통해 <체르노빌>은 더욱 풍부하고 탄탄한 완결성을 갖는다.


4화의 오프닝은 압도적이다. 러시아 혁명과 대기근, 세계대전을 모두 겪고도 고향을 지킨 82세의 노인은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대피령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그녀가 짜고 있는 우유마저도 이미 방사능에 오염되어 마실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군인은 젖소를 쏴버리고 노인은 결국 고향을 떠난다. 이 장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러시아 혁명과 대기근, 세계대전보다도 더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4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리하게 짜인 각본과 연출이란 바로 이런 장면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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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주변의 동물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소년



방사능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17세의 소년은 체르노빌 주변의 동물들을 죽이는 임무를 맡는다. 전쟁이 아님에도 그는 손에 총을 들어야 했고, 난생처음 생명을 쏴 죽여야 했으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강아지 시체를 이끌며 딱딱한 빵으로 한 끼를 때워야 했던 소년의 삶은 누구도 보상해주지 않았다. 그가 나중에 방사능으로 인해 직접적인 신체적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년은 분명히 이 지난한 재앙의 또 다른 희생자다.


그러나 희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격납고 건설을 위해선 지붕 위의 흑연을 치워야 하는데 그곳의 방사능은 너무 심각해서 무선 로봇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1986년 10월, 소비에트 연방은 3282명의 국민에게 효과를 알 수 없는 방호복을 입히고 직접 지붕 위의 흑연을 치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60초 동안의 거친 숨소리, 긴박하게 흔들리는 화면과 방사능 계기음의 듣기 힘든 소음이 끝나고 나면 그곳에는 찢어진 방호복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You're done.'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대사는 끝나버린 것이 그의 임무만이 아님을 담담하게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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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로봇'이 되어 발전소 지붕의 흑연을 치우는 병사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회. 발레리 레가소프는 소련 정부가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소련 정부의 추악한 행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소련 정부는 제어봉 끝에 값싼 흑연을 사용했고 그 사실을 은폐했다. 기밀로 분류된 RBMK 노심의 진실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나던 날 밤 아무도 몰랐으며,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체르노빌의 두 번째 거짓이었다. 노심 폭발로 거짓이 녹아내린 자리에는 추악한 진실만이 거짓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스러진 수많은 영혼 뒤에는 또 다른 거짓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발레리 레가소프가 자살한 후에야 RBMK 원자로의 결함을 인정했고, 원자로는 2차 체르노빌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개량되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세포가 분해되어 죽고, 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치솟고, 17살 소년이 총을 들고 나서야 진실은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이 쌓인 거짓과 지식의 검열은, '유토피아'가 되어야만 했던 소련의 오만함은 각각 350KG이 넘는 제어봉들을 폭발시킬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거짓은 강력하지만 영원하진 않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은 폭발이 훑고 간 자리를 수많은 영혼으로 메꿔야 했다. 각본과 대사, 연출이 모여 만들어낸 피폭된 진실을 향한 탐사는 사고가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경과 인종을 넘어 우리에게 묻는다.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고통받고 희생한 모두를 기리며-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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