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해, 여름 [사람]

오랜 뒤에도 기억나는 우리의 여행
글 입력 2019.09.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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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게슴츠레 창문 밖을 바라보니 해가 중천에 떠서 정오는 훨씬 넘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대만 여행 2일차- 타이베이에서 가오슝으로 향했다.


영어가 잘 통하는 타이베이와는 다르게 가오슝은 다들 중국어만 사용했고 덕분에 숙소를 찾는 데에 꽤나 고생을 했다. 힘들어서 늦잠을 잤구나, 생각하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더니 6시였다.


오후 6시가 아닌 오전 6시. 대 낮처럼 환한 탓에 절대 오전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꼭두새벽부터 한낮처럼 해가 쨍 하게 뜨는 나라. 여행을 다녀 온 지 3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가장 생생히 남은 대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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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떠오른 태양은 친구와 나를 여행 내내 쉼 없이 따라다녔다. 대만의 여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다.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친구는 내내 힘들어했고 여름을 좋아하는 나도 햇살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우리 둘 다 성인이 되어 해외로 떠나는 첫 자유 여행이었고 계획을 짜는 데에 있어서 능숙하지 못했다. 게다가 날씨까지 어마어마하게 더웠으니 예상 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친구와 나는 계속 의견이 서로 달랐고 다투지는 않았지만 종국에는 따로 다니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여행 준비할 때는 서로 떨어져 다닐 거라는 선택지를 두지 않아서 합의 하에 친구만 핸드폰 로밍을 해왔던 것이다. 친구는 걱정이 없어 보였지만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구글 맵도 없이 책 한 권에 의지해서 여행을 한다는 게 가능할까? 영어도 잘 안 통하는 이 낯선 곳에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생겨났다.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지기로 해서 걸음을 옮기는 데 갑자기 이 여행에서 내가 친구를 배려한 것만큼 친구는 나를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서운함이 마구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곳이 다르면 따로 가면 되면 되지 않겠냐고 의견을 제시한 친구가 밉살스러웠다. 함께 하려고 온 여행인데 각자 가고 싶은 곳에 가자는 말이 무심하고 냉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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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량한 자존심에, 그리고 랜드 마크에 가겠다는 친구와 달리 치진 해수욕장이 보고 싶었기에 일단 알겠다고 했지만 속이 시끄러웠다. 결국 나는 밥을 먹다가 말고 씩씩 거리며 친구에게 "핸드폰 로밍 안 해 와서 너랑 따로 다닐 수 없어!"라고 말했다.


지금에야 내가 느낀 감정들을 조금 더 솔직히 표현했어도 상관없었겠다, 싶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친구에게 함께 다니고 싶다는 걸 나타내는 게 왠지 지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지질하지만 그랬다. 친구는 순순히 자기만 핸드폰 로밍 해온 걸 깜박했다며 알겠다고 답했다.


우리 둘은 일단 랜드 마크도 아니고 해변도 아닌 곳을 먼저 가기로 했다. 가는 내내 미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시쯔완에 도착해 다거우 영국 영사관을 찾았다. 날이 깊어져 해가 기울면서 푸른 하늘이 군데군데 분홍과 보랏빛으로, 발갛게 붉어지다가 점점 짙은 무채색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친구와 나는 영사관 담장에 걸터앉아 짧은 감탄만 반복하며 넋을 놓고 바다 위로 해가 저무는 풍경을 바라봤다. 가로등 빛만 남고 모든 게 깜깜해지고 나서야 우리는 담장에서 내려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웃고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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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남은 여행 기간 동안 친구와 나는 더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날의 '각자도생' 여행 계획 때문에 약간의 마찰을 빚은 이후로는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애썼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빙수가게를 세 곳이나 들러 하루에 빙수를 세 그릇 먹는 진귀한 경험도 했고, 예술 작품을 좋아하는 나를 따라 미술관에 방문한 친구는 예쁜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


대만에서 돌아와 한 달 뒤 쯤, 친구가 통화 중에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 자신이 저번 여행에서 너무 이기적으로 군 것 같다며 지나고 보니 고마웠다고 말이다. 나도 엉겁결에 괜찮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싱거운 상황에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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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에서 바라보던 해는 정오가 되어야 하늘 높이 떴는데 대만에서 맞이한 해는 새벽 6시에 벌써 하늘의 정점에 떠 있었다. 같은 태양인데 말이다.


어스름한 저녁에 동네 공원을 함께 산책하던 친구와 4박 5일 동안 대만의 뙤약볕을 나와 나란히 걷던 친구는 사뭇 새로웠다. 같은 사람인데 말이다.


아마 시간이 거듭 지나면서 우리는 또 서로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해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뜻밖의 상황에서 서로가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결국엔 우리가 오랜 친구라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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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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