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복수의 화살을 어디에 겨눠야 할 것인가 - 킬롤로지

글 입력 2019.09.03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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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 살인, 강간… 온갖 자극적인 단어들이 매일 아무렇지 않게 뉴스 란을 차지하고, 그 단어들보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러나 그 이목은 절대 올바른 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처음엔 예민하게 반응하던 사람들도 홍수처럼 쏟아지는 폭력에 익숙해져 금세 심드렁해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곧바로 자신의 일상에 몰두한다.

 

지난 몇 년간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다. 아무리 그 강도가 세도, 사건이 충격적이어도 의미 있는 비판은 잠깐뿐, 자극에 무뎌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세상엔 그보다 더 자극적인 것이 넘쳐흐르고 그와 반면에 우리들의 일상은 평온하기만 하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를 더 둔감하게 만든다.

 

근데 그 확신이 정말 맞을까? 정말 나와 상관없는 일일까? 인천 여아 살인사건, 인천 여중생 집단 성폭행으로 인한 투신사건, 이수역 폭행 사건, 강남역 살인사건 등 그 무수히 많은 일이 왜 일어났을까? 특정 가해자와 특정 피해자가,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 그럼 폭력 사건은 정말 그들 개인의 문제일 뿐일까? 그 질문에 연극 <킬롤로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연극열전] 킬롤로지 티저 포스터.jpg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살인을 위한 게임 ‘킬롤로지(Killology)’를 만든 폴, 폴이 만든 게임은 세계적으로 히트하고 그러던 어느 날 소년 데이비가 게임에서 쓰이는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은 아들과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복수를 결심하는데….



복수는 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소재이다. 그러나 <킬롤로지>에서의 복수가 관객들에게 유독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복수의 화살이 향한 곳이 아들 데이비를 죽인 개인이 아닌 사회라는 것이다.


기존 작품에서 복수라는 소재를 접할 때, 카타르시스 대신 항상 허무한 마음이 들곤 했었다. 잘못한 자에게 합당한 처벌이 내려지는 것은 당연할 일이지만, 저런 복수를 위한 복수가 진정 피해자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짜릿한 복수라고 해도 그 끝에 남은 건 결국 흥건한 피일 뿐, 이미 일어난 일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킬롤로지>에서 알란이 저지르는 복수는 그런 허무한 복수가 아니다. 알란이 복수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건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아들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알란을 행동하게 하는 동력은 원한이 아니라 의지인 것이다.


 

킬롤로지 공연사진7.jpg

2018 공연사진



그것은 이 연극의 동력이기도 하다. 연극은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 연극의 매력을 완성하는 것은 장르적인 쾌감이 아니라 폭력을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는 작품의 진지한 태도에 있다.


<킬롤로지>를 향한 평 중에 1인극 같은 3인극이라는 말이 있다. 각자 다른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이 등장해서 각자의 독백을 통해 사건과 감정을 쏟아내는 형식 때문이다. 기존 스릴러 장르 작품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다. 그 형식은 폭력을 결코 편협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의지로 느껴진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많은 폭력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때, 그 장소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특별히 그들이라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무사히 있는 것도 내가 잘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피해자와 가해자는 뉴스 기사 속에 갇혀 있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진 충격적인 일은 모니터만 끄면 사라지는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방에 있다가 간 화장실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살인을 당했을 때, 내게 그 피해자는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닌 20대 여자의 대표였다. 그리고 나는 그 범위에 속한 인간이었다. 내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같은 이유로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인 동기로 ‘여성 혐오’에 집중할 때,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조현병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내 생각이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돌리는 태도에 웃을 사람은 누구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숱한 폭력을 모두 개인의 문제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특정 이상한 개인이 저지른 일일 뿐이니, 그 당사자가 아닌 우리는 그저 손 놓고 있으면 되는 것일까? 그럼 그 이후에도 계속 피해자들이 생겨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연극 <킬롤로지>를 다 보고 나면, 그 질문에 보다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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